장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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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제6대 황제 장종 | 章宗 | |
출생 | |
사망 | |
능묘 | 도릉(道陵) |
재위기간 | 금의 황태손 |
제6대 황제 | |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의 옹 칸과 함께 장종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이에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남송의 권신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개희북벌을 감행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2]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 대신)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한탁주의 머리는 수도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에 걸렸고 장종은 종묘에 나가 다시 한 번 승리를 조상에게 고했다.(태화정벌)
장종 때 금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삼황오제와 은나라, 주나라, 한나라, 당나라의 역대 군주 17명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금나라가 중원의 한족 왕조들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금나라의 중국화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금나라가 조금만 더 오래갔더라면 남북조 시대의 북위 등 선비족 왕조들처럼 완전하게 한족에 동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장종의 글씨 |
세종 때부터 이어진 금의 전성기는 장종의 치세까지도 지속되었다. 장종은 서화(書畵)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수금체(瘦金體)[3] 등 서예에 매우 능한 문예인이었다. 금나라의 제도 정비도 장종때 완성되었고 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급속한 한화로 인하여 사치 풍조가 만연해졌고 정복 왕조임에도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가 생겼다.[4] 장종 재위 후반에 몽골이 준동하기 시작했고[5] 황하의 제방이 3번이나 터졌다.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여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재정난이 가중되었다. 장종이 승하한 후 전성기는 끝나고 몽골이 침입하면서 결국 멸망테크를 타게 된다.
원래 금나라 완안씨 황실에는 황후로 맞이할 수 잇는 가문들이 정해져 있었고, 이 가문들 이외 출신 여성들은 황후가 될 수 없었다. 도단(徒單), 당괄(唐括), 포찰(浦察), 나나(拏懶), 복산(僕散), 흘석렬(紇石烈), 오림답(烏林答), 오고론(烏古論), 배만(裴滿)씨 등 여진 귀족 가문 여성들이 황후가 되었는데 장종은 한족인 이사아(李師兒)를 사랑했다. 심지어 이사아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죄인의 자식이었다. 금나라에는 전쟁 포로, 혹은 죄인의 자식을 황실의 노비로 삼게 했는데 이사아가 바로 그 케이스. 워낙 아름다운 데다가 다재다능하고 총명하기까지 한 이사아에게 홀딱 반한 장종은 마침 황후가 일찍 죽어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사아를 황후로 책봉하고 싶어했으나 대신들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황후 책봉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장종은 이사아를 황후 다음 가는 귀비인 원비(元妃)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장종은 이사아를 황후로 못 들였던 것이 한스러웠는지 그 후 후대 황제들은 민간에서 황후를 들일 것을 명하는 칙조를 내렸고 금선종은 역시 한족인 왕운, 왕예 자매를 궁중에 불러들여 그중 왕예를 황후로 책봉했다.
비록 이사아는 황후가 되지 못했지만 장종의 사랑을 바탕으로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아의 가족들 역시 그 덕에 벼락 출세를 했고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사아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뇌물을 바쳤다.
이사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장종 말엽을 기점으로 뇌물 수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국정이 쇠퇴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개희북벌을 단행한 한탁주 역시도 금나라의 쇠퇴를 감지하고 일으킨 것이기도 했다.[6]
- 특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화장품 만들기였다. 자신이 만든 화장품을 여인들에게 바르게 했으며, 그렇게 만든 화장품의 질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에서는 시나리오 2번과 유저 시나리오에서 5번땅 화북의 금나라의 국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B 전투D 지도C 매력B의 정치력과 매력이 준수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금나라의 치세의 기간에 있던 군주라 그런지 능력치를 정치와 매력에 높게 책정해준듯 하다.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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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종(顯宗)으로 추존되었다.[2] 개희북벌 추진 당시에도 금나라와 남송의 차이를 안 많은 이들은 북벌에 반대했고 찬성파들조차도 20년 정도는 준비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할 지경이었지만 개희북벌 자체가 약해지는 자신의 권력을 다잡기 위한 한탁주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거라 막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한 성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3] 이 서체는 북송의 휘종이 개발한 것이다.[4] 세종 대정 7년에 남송의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를 열었을 때 활쏘기 경연을 했는데 남송 사신이 쏜 화살은 과녁에 50발이나 맞았는데 사신을 호위하는 금인들의 화살은 7발만 명중했다.[5] 칭기즈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한 시기이다. 즉, 장종 사망 이후 금과 몽골은 본격적으로 부딪히게 된다.[6] 다만 그럼에도 개희북벌이 실패한 건 근본적으로는 그에 못지않게 남송도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7] 능력치는 정치 68, 전투 55, 지모 47이며, 내정특기로 농업, 문화가 있고, 전투특기는 복병 뿐이다.[8] 당시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긴장했고, 전설의 소드마스터 장군 척준경이 왕에게 금나라를 상국으로 모시자고 했다.[9] 이후 13세기 초 칭기즈 칸과 후손들에게 금나라가 작살나 멸망의 길을 걸으면서, 천도까지 하게 되자 저절로 이 관계로부터 해방됐다. 그리고 얼마 못가 원나라의 신하 나라가 되었다. 금나라는 천도후에도 어느 정도 버텨서 바로 멸망하지 않았지만 몽골에게 이미 습격 당하고 천도하게 되어 사실상 고려는 금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므로 멸망하기 전에 관계를 끊어버렸다. 금나라가 원군을 요청했을 때도 사신 접견을 노골적으로 거부했을 정도. 어차피 그렇다고 몽골하고도 싸우기 힘든 금나라가 고려에 쳐들어올 군사력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애초에 조공-책봉 관계가 일방적인 갑을관계가 아니기도 하지만, 특히 금나라는 내부 단속에도 지쳐서 허덕이는 지경이라서, 더더욱 형식적인 상전 노릇만 하고 남송이나 몽골, 유목 부족들을 제외한 주변국들의 일에 관심을 끊다시피 했다. 오죽하면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려의 영토의 상당수를 금나라에 바치려 했으나, 금나라 조정이 이를 거부하고는 오히려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로 송환해서 고려 조정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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