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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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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금 제6대 황제
장종 | 章宗
金 章宗 完顔麻達葛
출생
무주 유원현
(現 허베이성 창베이현)
사망
1208년 12월 29일 (향년 40세)
중도 대흥부 황궁 만복전
(現 베이징시)
능묘
도릉(道陵)
재위기간
금의 황태손
제6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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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완안(完顔)
중국식 : 경(璟)
여진식 : 마달갈(麻達葛)
부모
부황 현종
모후 효의황후
형제자매
7남 8녀 중 2남
배우자
흠회황후
자녀
6남 3녀
작호
금원군왕(金源郡王) → 원왕(原王)
묘호
장종(章宗)
시호
헌천광운인문의무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神聖英孝皇帝)
연호
명창(明昌, 1190년 ~ 1196년)
승안(承安, 1196년 ~ 1200년)
태화(泰和, 1201년 ~ 1208년)
절일
천수절(天壽節)

1. 개요2. 몽골, 금, 그리고 남송3. 장종의 치세4. 후사5. 기타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금나라의 6대 황제. 이름은 완안마달갈(完顔麻達葛)로 중국식으로는 완안경(完顔璟)이다. 아버지는 세종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완안윤공(完顔允恭)[1]으로, 선종은 장종의 서형(庶兄)에 해당된다. 아버지는 세종의 황태자였으나 요절하였기 때문에 손자였던 그가 조부의 지명을 받아 황태손이 되었다. 1189년 세종이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

2. 몽골, 금, 그리고 남송[편집]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옹 칸과 함께 장종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이에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남송의 권신 한탁주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개희북벌을 감행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2]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 대신)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한탁주의 머리는 수도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에 걸렸고 장종은 종묘에 나가 다시 한 번 승리를 조상에게 고했다.(태화정벌)

3. 장종의 치세[편집]

장종 때 금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삼황오제은나라, 주나라, 한나라, 당나라의 역대 군주 17명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금나라가 중원의 한족 왕조들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금나라의 중국화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금나라가 조금만 더 오래갔더라면 남북조 시대의 북위 등 선비족 왕조들처럼 완전하게 한족에 동화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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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의 글씨

세종 때부터 이어진 금의 전성기는 장종의 치세까지도 지속되었다. 장종은 서화(書畵)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수금체(瘦金體)[3] 등 서예에 매우 능한 문예인이었다. 금나라의 제도 정비도 장종때 완성되었고 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급속한 한화로 인하여 사치 풍조가 만연해졌고 정복 왕조임에도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가 생겼다.[4] 장종 재위 후반에 몽골이 준동하기 시작했고[5] 황하의 제방이 3번이나 터졌다.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여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재정난이 가중되었다. 장종이 승하한 후 전성기는 끝나고 몽골이 침입하면서 결국 멸망테크를 타게 된다.

원래 금나라 완안씨 황실에는 황후로 맞이할 수 잇는 가문들이 정해져 있었고, 이 가문들 이외 출신 여성들은 황후가 될 수 없었다. 도단(徒單), 당괄(唐括), 포찰(浦察), 나나(拏懶), 복산(僕散), 흘석렬(紇石烈), 오림답(烏林答), 오고론(烏古論), 배만(裴滿)씨 등 여진 귀족 가문 여성들이 황후가 되었는데 장종은 한족인 이사아(李師兒)를 사랑했다. 심지어 이사아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죄인의 자식이었다. 금나라에는 전쟁 포로, 혹은 죄인의 자식을 황실의 노비로 삼게 했는데 이사아가 바로 그 케이스. 워낙 아름다운 데다가 다재다능하고 총명하기까지 한 이사아에게 홀딱 반한 장종은 마침 황후가 일찍 죽어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사아를 황후로 책봉하고 싶어했으나 대신들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황후 책봉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장종은 이사아를 황후 다음 가는 귀비인 원비(元妃)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장종은 이사아를 황후로 못 들였던 것이 한스러웠는지 그 후 후대 황제들은 민간에서 황후를 들일 것을 명하는 칙조를 내렸고 금선종은 역시 한족인 왕운, 왕예 자매를 궁중에 불러들여 그중 왕예를 황후로 책봉했다.

비록 이사아는 황후가 되지 못했지만 장종의 사랑을 바탕으로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아의 가족들 역시 그 덕에 벼락 출세를 했고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사아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뇌물을 바쳤다.

이사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장종 말엽을 기점으로 뇌물 수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국정이 쇠퇴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개희북벌을 단행한 한탁주 역시도 금나라의 쇠퇴를 감지하고 일으킨 것이기도 했다.[6]

4. 후사[편집]

장종에게는 6명의 황자가 있었지만 모두 요절하여 태자가 없었고 사후 숙부 위소왕이 뒤를 이었다. 사실은 후궁 가씨의 뱃속에 장종의 유복자가 있었으나... 이사아를 싫어했던 위소왕은 "임신하지도 않은 가씨가 이사아 측의 꼬드김으로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가씨의 뱃속에 들어있는 태아는 장종의 자식이 아니다. 이 모든 게 이사아의 음모다!"라고 개드립을 치는 바람에 가씨와 이사아가 피살되어 그대로 복중에서 죽었다. 아마 위소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에 해가 갈까봐 그랬던 것 같다.

5. 기타[편집]

  • 특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화장품 만들기였다. 자신이 만든 화장품을 여인들에게 바르게 했으며, 그렇게 만든 화장품의 질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 장종의 아들 중 한 명이 고려로 건너와서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송광사의 9대 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장종의 아들이라는 이야기이다.출처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에서는 시나리오 2번과 유저 시나리오에서 5번땅 화북의 금나라의 국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B 전투D 지도C 매력B의 정치력과 매력이 준수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금나라의 치세의 기간에 있던 군주라 그런지 능력치를 정치와 매력에 높게 책정해준듯 하다.
attachment/장종/장종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에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그닥 좋지 않다.[7] 그런데 장종의 배우자로 있는 기국공주는 위소왕의 딸로, 사실 그의 사촌동생이다.
  • 2023년 3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에서 고려 시대 공적 건물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적 중 일부에 "승안 3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승안은 이 사람의 연호이며, 승안 3년은 1198년이다. 아마 이때 고려에서 금나라의 연호를 쓰며 서울에 건물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졌다시피 고려는 인종 때[8] 금나라의 신하 나라를 칭하기 시작해 90년간[9] 그랬었으니, 금나라의 연호를 썼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10여년만에 금나라가 몽골군에게 심하게 당하면서 고려가 금나라의 연호를 쓸 일은 없어졌다.

6. 둘러보기[편집]

[ 본기(本紀) ]
1권 「세기(世紀)」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4권 「희종기(熙宗紀)」
5권 「전폐제기(前廢帝紀)」
6·7·8권 「세종기(世宗紀)」
9·10·11·12권 「장종기(章宗紀)」
13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4·15·16권 「선종기(宣宗紀)」
17·18권 「애종기(哀宗紀)」
19권 「세기·보(世紀補)」

※ 20권 ~ 58권은 志에 해당. 59권 ~ 62권은 表에 해당. 금사 문서 참고
[ 열전(列傳) ]
63·64권 「후비전(后妃傳)」
65·66권 「시조이하종실전(始祖以下宗室傳)」
67권 「석현등전(石顯等傳)」
68권 「완안환도등전(完顔歡都等傳)」
석현 · 환난 · 산달 · 오춘 · 납배 · 마산 · 둔은 · 유가 · 아소 · 회리보
69권 「태조제자전(太祖諸子傳)」
70권 「완안살개등전(完顔撒改等傳)」
71권 「완안알로등전(完顔斡魯等傳)」
72권 「완안누실등전(完顔婁室等傳)」
73권 「완안아리합만등전(完顔阿離合懣等傳)」
74권 「완안종한등전(完顔宗翰等傳)」
75권 「노언륜등전(盧彥倫等傳)」
76권 「태종제자등전(太宗諸子等傳)」
77권 「완안종필등전(完顔宗弼等傳)」
78권 「유언종등전(劉彥宗等傳)」
79권 「역경등전(酈瓊等傳)」
80권 「희종제자등전(熙宗諸子等傳)」
81권 「골모파등전(鶻謀琶等傳)」
82권 「곽약사등전(郭藥師等傳)」
83권 「장통고등전(張通古等傳)」
84권 「완안고등전(完顔杲等傳)」
85권 「세종제자전(世宗諸子傳)」
86권 「이석등전(李石等傳)」
87권 「흘석렬지녕등전(紇石烈志寧等傳)」
88권 「흘석렬양필등전(紇石烈良弼等傳)」
89권 「소보형등전(蘇保衡等傳)」
90권 「조원등전(趙元等傳)」
91권 「완안살개등전(完顏撒改等傳)」
92권 「모석등전(毛碩等傳)」
93권 「현종제자등전(顯宗諸子等傳)」
94권 「협곡청신등전(耶律化哥等傳)」
95권 「이랄리등전(移剌履等傳)」
96권 「황구약등전(黃久約等傳)」
97권 「배만형등전(裴滿亨等傳)」
98권 「완안광등전(完顏匡等傳)」
99권 「도단일등전(徒單鎰等傳)」
100권 「맹주등전(孟鑄等傳)」
101권 「완안승휘등전(完顔承暉等傳)」
102권 「복산안정등전(僕散安貞等傳)」
103권 「완안중원등전(完顏仲元等傳)」
104권 「납탄모가등전(納坦謀嘉等傳)」
105권 「정채등전(程寀等傳)」
106권 「장위등전(張暐等傳)」
107권 「고여려등전(高汝礪等傳)」
108권 「서정등전(胥鼎等傳)」
109권 「완안소란등전(完顏素蘭等傳)」
110권 「양운익등전(楊雲翼等傳)」
111권 「고리갑석륜등전(古里甲石倫等傳)」
112권 「완안합달등전(完顏合達等傳)」
113권 「완안새불등전(完顏賽不等傳)」
114권 「백화등전(白華等傳)」
115권 「완안노신등전(完顏奴申等傳)」
116권 「도단올전등전(徒單兀典等傳)」
117권 「도단익도등전(徒單益都等傳)」
118권 「묘도윤등전(苗道潤等傳)」
119권 「점갈노신등전(粘葛奴申等傳)」
120권 「세척전(世戚傳)」
121·122·123·124권 「충의전(忠義傳)」
125·126권 「문예전(文藝傳)」
127권 「효우·은일전(孝友隱逸傳)」
128권 「순리전(循吏傳)」
129권 「혹리·영행전(酷吏佞幸傳)」
130권 「열녀전(列女傳)」
131권 「환관·방기전(宦官方技傳)」
132권 「역신전(逆臣傳)」
133권 「반신전(叛臣傳)」
134·135권 「외국열전(外國列傳)」

[ 펼치기 · 접기 ]
1·2권 「태조기(太祖紀)」
3·4·5·6·7·8권 「태종기(太宗紀)」
9·10·11·12권 「희종기(熙宗記)」
13·14·15권 「해릉양왕기(海陵煬王紀)」
16·17·18권 「세종기(世宗紀)」
19·20·21권 「장종기(章宗紀)」
22·23권 「동해군후기(東海郡侯紀)」
24·25권 「선종기(宣宗紀)」
26권 「의종기(義宗紀)」
27권 「개국공신전(開國功臣傳)」
28·29권 「문학한원전(文學翰苑傳)」
30권 「장방창록(張邦昌錄)」
31권 「유예록(劉豫錄)」


[1] 현종(顯宗)으로 추존되었다.[2] 개희북벌 추진 당시에도 금나라와 남송의 차이를 안 많은 이들은 북벌에 반대했고 찬성파들조차도 20년 정도는 준비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할 지경이었지만 개희북벌 자체가 약해지는 자신의 권력을 다잡기 위한 한탁주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거라 막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한 성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3] 이 서체는 북송휘종이 개발한 것이다.[4] 세종 대정 7년에 남송의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를 열었을 때 활쏘기 경연을 했는데 남송 사신이 쏜 화살은 과녁에 50발이나 맞았는데 사신을 호위하는 금인들의 화살은 7발만 명중했다.[5] 칭기즈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한 시기이다. 즉, 장종 사망 이후 금과 몽골은 본격적으로 부딪히게 된다.[6] 다만 그럼에도 개희북벌이 실패한 건 근본적으로는 그에 못지않게 남송도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7] 능력치는 정치 68, 전투 55, 지모 47이며, 내정특기로 농업, 문화가 있고, 전투특기는 복병 뿐이다.[8] 당시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긴장했고, 전설의 소드마스터 장군 척준경이 왕에게 금나라를 상국으로 모시자고 했다.[9] 이후 13세기 초 칭기즈 칸과 후손들에게 금나라가 작살나 멸망의 길을 걸으면서, 천도까지 하게 되자 저절로 이 관계로부터 해방됐다. 그리고 얼마 못가 원나라의 신하 나라가 되었다. 금나라는 천도후에도 어느 정도 버텨서 바로 멸망하지 않았지만 몽골에게 이미 습격 당하고 천도하게 되어 사실상 고려는 금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므로 멸망하기 전에 관계를 끊어버렸다. 금나라가 원군을 요청했을 때도 사신 접견을 노골적으로 거부했을 정도. 어차피 그렇다고 몽골하고도 싸우기 힘든 금나라가 고려에 쳐들어올 군사력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애초에 조공-책봉 관계가 일방적인 갑을관계가 아니기도 하지만, 특히 금나라는 내부 단속에도 지쳐서 허덕이는 지경이라서, 더더욱 형식적인 상전 노릇만 하고 남송이나 몽골, 유목 부족들을 제외한 주변국들의 일에 관심을 끊다시피 했다. 오죽하면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려의 영토의 상당수를 금나라에 바치려 했으나, 금나라 조정이 이를 거부하고는 오히려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로 송환해서 고려 조정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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