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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카와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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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1. 일본의 소설가2. 일본의 자위관
아사히 신문 로고 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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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川英治 (よしかわ えいじ)
(1892년 8월 11일~ 1962년 9월 7일)

카나카와현 요코하마시 출생으로 본명은 히데츠구(英次, ひでつぐ). 1914년에 등단해 대표작으로 나루토 비첩, 미야모토 무사시, 신서태합기[1] 등이 있다. 그리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연재한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로 유명[2]하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이 시기에 일부의 일본작가들이 현실에 등을 돌리고 역사물을 집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타니자키 준이치로는 이 시기에 겐지모노가타리의 번역에 착수한다.

필명인 에이지는 출판사가 본명인 히데츠구의 한자 英次를 英로 잘못 표기한 것에서 유래했는데, 본인이 이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대로 필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소학교를 중퇴하고 생계를 위해 공장을 전전했다고 하며, 1926년에 나루토 비첩을 통해 인기 작가가 되었다. 1938년에 중일전쟁 때 마이니치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중국에 갔으며, 1939년 2월부터 신서태합기(新書太閤記)를 연재하였고, 7월에 미야모토 무사시가 완결된 뒤 8월부터 삼국지를 연재한다. 이중 신서 태합기는 군국주의 일본의 팽창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를 통해 정당화하려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종전 이후 패전에 충격을 받아 펜을 내려놓은 적도 있으나 1947년부터 연재를 다시 시작했으며, 1960년에 문화훈장을 받았고 사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상이 만들어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상의 한계였음을 감안해도 일본군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던 극우 성향의 작가로, 전시에만 해도 1942년에 일본해군에 발탁되어 해군 전사(戦史) 편찬에도 참여했으며, 야마구치 다몬 제독 같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 전사자들의 전기를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하는 등 일본 군부의 팽창 정책을 문학으로 정당화하고 옹호하였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패전 뒤 은둔 중이던 츠지 마사노부의 도피 자금을 대준 전력도 있다.

그가 저술한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는 한국, 일본에서 여러 작품에 영향을 줬는데,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가 이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를 기초로 삼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20세기에 대부분 모종강본 아니면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를 기초로 삼아 재창작된 판본만 나올 정도였으며, 만화로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고우영 삼국지가 있다.

다른 것 없이 요시카와 에이지는 책의 판매량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작가로서, 특히 그의 대표작인 미야모토 무사시는 지금까지 대략 1억 2천만 부 정도가 팔린 것으로 되어 있다.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 해리 포터 시리즈가 대략 4억 5천만 부 정도로 추산하는 걸로 보면 1930~40년대라는 시대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요시카와가 사망할 당시 일본 인구는 1억을 넘지 않았다.

본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으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이 있다.이 가운데 문학신인상은 신인공모상이 아니라 아쿠타가와상처럼 신인급 작가에게 주는 상이다.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은 일본의 문화활동에 현저히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모두 요시카와 에이지가 생전에 마이니치 신문에 기부하면서 창설되었으며, 현재는 코단샤 내의 요시카와 에이지 국민문화 진흥회라는 재단 법인에 의해 개최되고 있다. 1960년대부터 이어지는 유서깊은 문학상으로 꼽힌다.

2016년에는 문학상과 문화상 50주년을 맞이하여 문고상이 신설되었다. 5권 이상 계속되는 시리즈 문고 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마주이자 친구이며 동시기에 같이 유명했던 소설가 키쿠치 칸[3]의 권유로 1939년부터 마주를 했었는데, 단순히 경주마 여럿을 보유한 유명인이 아닌 뛰어난 실력을 가진 명마들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53년에 스프링 스테이크스, 도쿄 암말 특별, 퀸 스테이크스, 나카야마 4세 스테이크스를 우승하고, 1954년 나카야마 기념까지 우승하며 최초의 케이슈샤상 최우수 5세 이상 암말로 뽑힌 체리오, 1955년 사츠키상을 우승한 케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1956년 도쿄 우준에 출주한 엔메이가 1코너의 낙마사고로 예후불량으로 살처분 되고, 당시 엔메이의 기수였던 아베 쇼타로가 중상을 입어 기수 생활이 끝나버리는 비극을 겪은 이후로는 마주를 그만두고 골프에 전념하게 되었다. 아베 쇼타로는 은퇴후 조교사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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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吉川榮治 (よしかわ えいじ). 왼쪽은 미군 합참의장을 지낸 마이크 멀린.

일본의 해상자위관. 28대 해상막료장(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1948년 1월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1967년방위대학교 15기(해군사관학교 25기)로 입학했다. 1990년에 1등해좌로 진급했고 해막 감리부 총무과 총무반장, 제41호위대 사령 등을 지내고 1996년에 해장보로 승진했다. 제3호위대군 사령, 연습함대 사령관, 통합막료회의 사무국 제5참모실장을 거쳐 2003년에 해장으로 승진했다. 오미나토지방대 총감과 요코스카지방대 총감을 지냈고 2006년사이토 다카시에 이어 해상막료장이 되었다.

재임 기간 중에 야동으로 인한 정보 유출, 이지스함과 어선 충돌, 보온병 사고로 배가 불탄 사건 등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2008년에 사임했다. 사실상 불명예 퇴진인지라 전역 전에 하는 영예례[4]를 하지 않고 나갔다. 대신 이임식에서 당시 방위상인 이시바 시게루와 후임자인 아카호시 게이지가 모자 흔들기(帽振れ)로 배웅했다.


[1] 국내에는 '전국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동서문화사 대망 13~17권으로 "다이코"라는 명칭으로 번역되었다.[2] 국내에 코너스톤 출판사에서 완역 출간되어있다[3] 이름을 훈독한 키쿠치 히로시라고도 했다. 마주로서는 1940년 천황상의 전신인 제실어상전을 우승한 토키노 치카라를 보유했다.[4] 자위대에서 중령 이상의 장교가 전역할 때 기지에서 사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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