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청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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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읍성 세진루 전경 | 북청도호부 관아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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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부 청해면 토성리 북청사자놀이패의 모습 | 북청부 읍내 장날 풍경 |
북청에서 하루 묵고 남송정 돌아드니
끝없는 넓은 바다 동쪽 하늘 끝이 없고
산들이 첩첩하여 남쪽이 아득하다.김진형, 「북천가(北遷歌)」 中
조선시대 함경도 북청 지역을 다스리던 도호부. 함경도 남부지역의 문화와 행정과 군사적 중심지로서, 조선시대 함경남병영이 위치하였다. 함경도 북부 지역의 중심지인 경성부와 더불어서 함경도 지역의 비공식적 계수관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래 고조선의 영향력을 받았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조선 멸망 이후로는 옥저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옥저가 고구려에 편입된 이후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수년이 지난 뒤, 발해가 건국된 이후 남경남해부가 이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발해가 멸망한 뒤 여진족들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려가 이 지역을 다시 복속시켜 한민족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기 전까지 이 지역은 온전히 여진족들의 생활권에 들어가게 된다.
고려 때에 이르러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권이 점차 행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천리장성은 원산만으로 이어져 있었기에, 천리장성 북쪽에 있었던 북청은 여진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또한 윤관의 동북 9성 개척 이후에도 여진족의 활동 지역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원나라는 쌍성총관부를 이 일대 지역에 설치했는데,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가 혁파되면서 대대적인 변형이 일어났다. 당시 고려조정은 북청과 수복 지역에 안북천호방어소를 설치, 이후 북청주만호부로 개칭하였다.
1392년,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면서 북청부 역시 수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태조 당시 북청부는 청주부로 개칭되었으나, 1416년에 충청도의 청주목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인하여 '북쪽의 푸른 고을'이라는 뜻의 '북청(北靑)'으로 이름을 고치며 지금의 명칭으로 고정되었다.
고려 때에 이르러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권이 점차 행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천리장성은 원산만으로 이어져 있었기에, 천리장성 북쪽에 있었던 북청은 여진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또한 윤관의 동북 9성 개척 이후에도 여진족의 활동 지역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원나라는 쌍성총관부를 이 일대 지역에 설치했는데,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가 혁파되면서 대대적인 변형이 일어났다. 당시 고려조정은 북청과 수복 지역에 안북천호방어소를 설치, 이후 북청주만호부로 개칭하였다.
1392년,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면서 북청부 역시 수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태조 당시 북청부는 청주부로 개칭되었으나, 1416년에 충청도의 청주목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인하여 '북쪽의 푸른 고을'이라는 뜻의 '북청(北靑)'으로 이름을 고치며 지금의 명칭으로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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