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기무사령관
최근 수정 시각:
보안사령관에서 넘어옴
관련 문서: 국군기무사령부
국군방첩사령부 창설 이후인 국군방첩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국군방첩사령관 문서 참고하십시오.
|
국군기무사령부의 사령관은 원칙적으론 전 군에서 다 맡을 수 있는 직책이지만, 전부 대한민국 육군에서 지냈다. 게다가 단 3명을 제외하고 역대 기무사령관들은 모두 육사 출신이다. 그나마 대한민국 공군 출신은 안보지원사령부로 해편된 이후 전제용 장군이 취임함으로서 탄생했지만 대한민국 해군 출신은 국군기무사령부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개편된 이후에도 나오지 않았다.[1]
공식적으로 중장 서열 2위며 1위는 해병대사령관이다. 해군 내에서도 사실상 따로 굴러가는 대한민국 해병대 특수성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중장 서열 1위다. 박정희 때만 해도 소장 2차 보직이었지만[2] 전두환 때부터 군단급으로 격상된 특전사, 수방사와 같이 지휘관의 계급이 중장으로 높아졌다.[3]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는 최고 요직이었지만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이후 힘이 크게 빠지면서 중장 진급에 실패한 말년 소장 중 선별해 임기제 진급을 시키고 임명하는 자리로 바뀌었다.[4]
특성상 힘이 막강하기에 소장으로 기무사령관 직을 격하시키려고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이 시도했고 특히 김영삼은 소장 기무사령관이 1년도 지나지 않아 전역하자, 한 술 더 떠 학군 출신 준장(당시 참모장)을 내정했다. 그러나 하나회 숙청이 얼추 끝나자 다시 소장을 거쳐 중장으로 환원되었고[5] 노무현 때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나마 타협된 것이 야전부대의 소장의 임기제 진급과 사령관 임명이라고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중장 서열 2위며 1위는 해병대사령관이다. 해군 내에서도 사실상 따로 굴러가는 대한민국 해병대 특수성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중장 서열 1위다. 박정희 때만 해도 소장 2차 보직이었지만[2] 전두환 때부터 군단급으로 격상된 특전사, 수방사와 같이 지휘관의 계급이 중장으로 높아졌다.[3]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는 최고 요직이었지만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이후 힘이 크게 빠지면서 중장 진급에 실패한 말년 소장 중 선별해 임기제 진급을 시키고 임명하는 자리로 바뀌었다.[4]
특성상 힘이 막강하기에 소장으로 기무사령관 직을 격하시키려고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이 시도했고 특히 김영삼은 소장 기무사령관이 1년도 지나지 않아 전역하자, 한 술 더 떠 학군 출신 준장(당시 참모장)을 내정했다. 그러나 하나회 숙청이 얼추 끝나자 다시 소장을 거쳐 중장으로 환원되었고[5] 노무현 때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나마 타협된 것이 야전부대의 소장의 임기제 진급과 사령관 임명이라고 볼 수 있다.
역대 | 성명 | 사 진 | 임 관 | 최종 계급 | 임 기 |
비 고 | |||||
특무부대장 | |||||
초대 | 군영 | 1950년10월 21일~1950년 12월 15일 | |||
2 | 일본육군항공학교 | 중장 | 1950.12.15~1951.1.13 | ||
3 | 중장 | 1951.1.13~1951.4.6 | |||
4 | 김종면 | - | 1951.4.19~1951.5.15 | ||
육군본부 정보국장(1951), 서울신문 전무이사(1974),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1981) | |||||
5 | 육사3기 | 중장 | 1951.5.15~1956.1.30 | ||
6 | 정인택 | 육사3기 | 준장 | 1956.1.30~1957.9.25 | |
7 | 김재현 | 육사2기 | 준장 | 1957.9.25~1959.10.10 | |
8 | 하갑청 | 육사2기 | 1959.10.10~1960.5.1 | ||
학도기간대 창설 | |||||
9 | 이소동 | 육사2기 | 대장 | 1960.5.1~1960.6.1 | |
파월 백마부대 부대장 | |||||
방첩부대장 | |||||
10 | 박창록 | 육사3기 | 준장 | 1960.6.1~1961.4.1 | |
11 | 육사2기 | 준장 | 1961.4.1~1961.6.10 | ||
중앙정보부 차장, 1980년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당사자 | |||||
12 | 육사5기 | 소장 | 1961.6.10~1962.7.12 | ||
13 | 육사5기 | 1962.7.12~1964.1.8 | |||
14 | 박영석 | 육사5기 | 준장 | 1964.1.8~1965.3.6 | |
15 | 육사8기 | 소장 | 1965.3.6~1968.2.17 | ||
육군보안사령관 | |||||
16 | 육사 2기 | 중장 | 1968.2.17~1971.9.23 | ||
17 | 육사8기 | 소장 | 1971.9.23~1973.8.14 | ||
18 | 육사4기 | 대장 | 1973.8.14~1975.2.26 | ||
국군보안사령관 | |||||
19 | 육사8기 | 대장 | 1975.2.28~1979.3.5 | ||
20 | 육사11기 | 대장 | 1979.3.5~1980.8.21 | ||
21 | 육사11기 | 대장 | 1980.8.21~1981.7.14 | ||
22 | 육사12기 | 대장 | 1981.7.14~1984.7.6 | ||
23 | 육사12기 | 대장 | 1984.7.6~1985.6.1 | ||
제1야전군사령관, (사)대한노인회 상임부회장, 제13~14대 대한노인회장 | |||||
24 | 육사14기 | 대장 | 1985.6.1~1986.7.4 | ||
25 | 육사15기 | 대장 | 1986.7.4~1987.12.29 | ||
26 | 최평욱 | 육사16기 | 중장 | 1987.12.29~1988.12.7 | |
27 | 육사18기 | 대장 | 1988.12.7~1990.10.10 | ||
국군기무사령관 | |||||
28 | 육사18기 | 대장 | 1990.10.10~1991.12.4 | ||
29 | 서완수 | 육사19기 | 중장 | 1991.12.4~1993.3.8 | |
제10대 육군특수전사령관 | |||||
30 | 김도윤 | 육사 22기 | 소장 | 1993.3.8~1993.10.22 | |
31 | 임재문 | 학군3기 | 중장 | 1993.10.22~1998.3.25 | |
32 | 육사23기 | 대장 | 1998.3.25~1999.10.27 | ||
33 | 김필수 | 육사26기 | 중장 | 1999.10.27~2001.10.10 | |
34 | 문두식 | 육사27기 | 중장 | 2001.10.10~2003.4.21 | |
35 | 육사27기 | 중장 | 2003.4.21~2005.2.5 | ||
36 | 김영한 | 육사29기 | 중장 | 2005.2.5~2006.12.4 | |
합동참모본부 전력기획부장 | |||||
37 | 육사30기 | 중장 | 2006.12.4~2008.3.20 | ||
육군훈련소장, 남북평화통일연합회, 평화통일국민연합 회장, 국민행복당 대표, 대한애국당 공동대표 | |||||
38 | 3사6기 | 중장 | 2008.3.20~2010.4.2 | ||
39 | 배득식 | 육사33기 | 중장 | 2010.4.2~2013.4.24 | |
국군기무학교 교장,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에 연루. | |||||
40 | 장경욱 | 육사36기 | 소장 | 2013.4.24~2013.10.25 | |
41 | 육사37기 | 중장 | 2013.10.25~2014.10.13 | ||
육군 인사사령관,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 |||||
42 | 육사38기 | 중장 | 2014.10.13~2017.9.26 | ||
재임 중 기무사에서 계엄령을 검토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 |||||
43 | 육사41기 | 중장 | 2017.9.26~2018.8.4 | ||
44 | 학군23기 | 대장 | 2018.8.4~2018.9.1 | ||
[1] 현재는 국군방첩사령부로 또다시 개편되었다.[2] 그래도 상당한 알짜보직이었다.[3] 게다가 이 시기는 기무사령관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는데 지금의 합참 작전본부장 수준이었다.[4] 김대중 때의 이남신을 빼면 상당수가 기무사령관에서 옷을 벗었다.[5] 같은 사람이 무려 4년 반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 중간에 계속 진급을 한 것을 감안해도 이례적인 일이었다.[6] 선인학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규모의 사학비리를 저질렀다.[7] 하나회 척결 전까지 육사 출신이자 하나회 출신이 독차지했던 기무사령관에 최초로 임명된 학군 출신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숙군작업의 일환으로 임명했지만, 하나회랑 똑같은 쓰레기였다는 게 드러나며 사실상 김영삼은 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이 되어 버렸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을 받을 때인 1996년11월에 직접 명령을 내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에 중요한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파기시키면서 빅엿을 날렸기 때문이다. (#)[8] 준장으로 취임해 2달만에 소장, 다시 1년 10개월만에 중장으로 진급.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