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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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한 수사관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쓰러지더랍니다."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한 발언
1927년 5월 13일 평안남도 진남포(현 북한 남포시)에서 태어났고 최종 학력은 5년제 중학교 졸업이다. 해방 후 아버지가 친일 혐의로 체포되자[1] 소련군 사령관 통역을 맡으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홀로 월남하여[2] 경찰학교 17기에 응시한 후 1947년 종로경찰서 사찰계로서 경찰 근무를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남조선노동당 지하조직 적발과 조직원 검거에 참여하는 등 처음부터 대공수사에 전념했고 9.28 서울 수복 후 김창룡 특무부대장 산하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검사 오제도와 함께 남로당원 및 부역 혐의자 검거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8년에는 내무부 치안국 특수정보과(경위)로 발령받았다. 3.15 부정선거 때도 이강학 내무부 치안국장이 경찰서에 하달한 부정선거 계획의 외부 유출을 막는 비밀경찰 일을 수행했는데 4.19 혁명 후 부정선거 공작 은폐에 참여한 비밀경찰 대부분이 쫓겨났으나 박처원은 쫓겨나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그해 11월 4일에 전북경찰서 정보과로 발령받았다.
1966년에는 경감으로 승진해 치안국 정보과 3계로 발령받았고 1971년부터는 치안국 정보과 공작분실에서 근무했으며 1975년에는 총경으로 승진하여 치안본부 공작실장을 맡았고 1982년에는 경무관에 올랐는데 1986년에는 무려 치안감(5차장)에 오르기까지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40여년간 경찰 생활을 하며 승진해 오면서도 경찰서장이나 시,도경찰국장 증 직책을 마다하고 오로지 대공업무만 담당하며 치안감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3] 통상 경찰서장을 맡게 되는 경정-총경 시절이나 지방시도경찰국장(현재의 지방경찰청장)을 맡는 경무관 계급에서도 일선 지휘보직은 일절 맡지 않았다. 당장 그의 치안감 보직인 치안본부 5차장도 원래 정보외사파트인 4차장 관할이었던 대공수사파트를 이 사람의 치안감 진급에 맞추어 따로 분리하고 신설하여 만들어준 것이었다.[4]
1966년에는 경감으로 승진해 치안국 정보과 3계로 발령받았고 1971년부터는 치안국 정보과 공작분실에서 근무했으며 1975년에는 총경으로 승진하여 치안본부 공작실장을 맡았고 1982년에는 경무관에 올랐는데 1986년에는 무려 치안감(5차장)에 오르기까지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40여년간 경찰 생활을 하며 승진해 오면서도 경찰서장이나 시,도경찰국장 증 직책을 마다하고 오로지 대공업무만 담당하며 치안감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3] 통상 경찰서장을 맡게 되는 경정-총경 시절이나 지방시도경찰국장(현재의 지방경찰청장)을 맡는 경무관 계급에서도 일선 지휘보직은 일절 맡지 않았다. 당장 그의 치안감 보직인 치안본부 5차장도 원래 정보외사파트인 4차장 관할이었던 대공수사파트를 이 사람의 치안감 진급에 맞추어 따로 분리하고 신설하여 만들어준 것이었다.[4]
치안감으로 영전하면서부터 치안본부 대공수사처 처장으로서 5공화국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총괄하게 되었는데 그는 부하들에게도 애정이 남달랐다.[5] 특히 그는 후술할 이근안 경감과 백남은 경정, 김수현 경감을 더 신임했다고 한다.#
그는 임기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하며 1981년 학림 사건, 1985년 서울대 민추위 사건 등 온갖 공안사건 처리를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운동권이 남영동에서 죽었으며 당시 남영동의 위상은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서빙고 국군보안사령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6] 이러한 수사 처리능력을 높이 산 정부는 박 치안감에게 1980년 녹조근정훈장, 1981년 홍조근정훈장 등을 수여했다. 이 시기에 그가 이끈 대공 수사조직은 경찰 내의 베테랑 수사 인력 중 선발된 요원들로 구성되었으며 '박처원 사단'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던 이가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이었다. 즉, 그는 수많은 민간인들을 고문하도록 명령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악행의 실무 책임자였던 셈이다.[7]
1987년 2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후 5월 29일에 고문 경관을 축소해 발표하고 거짓 진술을 지시한 혐의로 유정방, 박원택 등과 함께 구속되어 9월 21일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그는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과 함께 항소하여 1990년 8월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1991년 12월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됐고 1993년 파기환송심을 거쳐 1996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최종적으로 1심처럼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자신이 지시하고 은폐한 고문 행위에 대해 사과는 없었으며 당뇨 증상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 사이인 1988년에 퇴직한 후 1993년까지 경찰청보안간부연수소 사무실을 빌려 '현대비교문화연구소'를 세워 공산주의 비교 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임기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하며 1981년 학림 사건, 1985년 서울대 민추위 사건 등 온갖 공안사건 처리를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운동권이 남영동에서 죽었으며 당시 남영동의 위상은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서빙고 국군보안사령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6] 이러한 수사 처리능력을 높이 산 정부는 박 치안감에게 1980년 녹조근정훈장, 1981년 홍조근정훈장 등을 수여했다. 이 시기에 그가 이끈 대공 수사조직은 경찰 내의 베테랑 수사 인력 중 선발된 요원들로 구성되었으며 '박처원 사단'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던 이가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이었다. 즉, 그는 수많은 민간인들을 고문하도록 명령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악행의 실무 책임자였던 셈이다.[7]
1987년 2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후 5월 29일에 고문 경관을 축소해 발표하고 거짓 진술을 지시한 혐의로 유정방, 박원택 등과 함께 구속되어 9월 21일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그는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과 함께 항소하여 1990년 8월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1991년 12월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됐고 1993년 파기환송심을 거쳐 1996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최종적으로 1심처럼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자신이 지시하고 은폐한 고문 행위에 대해 사과는 없었으며 당뇨 증상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 사이인 1988년에 퇴직한 후 1993년까지 경찰청보안간부연수소 사무실을 빌려 '현대비교문화연구소'를 세워 공산주의 비교 연구를 하기도 했다.
1999년 이근안 도피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지만 2000년에 당뇨 및 치매 등 중병으로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는데 2018년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2008년경에 사망했다고 한다.[8]
1996년 11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내가 뭘 더 바라겠다고 거짓말을 하겠소. 난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도 상실했소. 무슨 미련을 갖겠소."라며 뒤늦게 후회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9]
2014년 '학림 사건' 관련자였던 우파 언론인 박성현이 뉴데일리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저자 측은 수년 전 재향경우회 측에 그의 근황에 대해 물었으나 경우회 측은 "저희는 그런 사람 선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라며 없는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1996년 11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내가 뭘 더 바라겠다고 거짓말을 하겠소. 난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도 상실했소. 무슨 미련을 갖겠소."라며 뒤늦게 후회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9]
2014년 '학림 사건' 관련자였던 우파 언론인 박성현이 뉴데일리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저자 측은 수년 전 재향경우회 측에 그의 근황에 대해 물었으나 경우회 측은 "저희는 그런 사람 선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라며 없는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 무공포장 (1952, 1962)
- 화랑무공훈장 (1955)
- 대통령표창 (1960, 1974, 1980, 1981)
- 국무총리표창 (1963, 1966)
- 보국훈장 광복장 (1965)
- 보국훈장 삼일장 (1969)
- 녹조근정훈장 (1980)
- 홍조근정훈장 (1984)
- 2005년작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강철이 분했다. 오타인지 실제 박처원의 항의 때문인지 몰라도 계속 박처언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 2017년작 영화 1987에서는 김윤석이 박처원 역을 맡았는데 스틸컷이나 캐릭터 컷을 보면 싱크로율이 상당하다. 김윤석은 박처원과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머리를 M자로 올리고 마우스피스와 옷 안에 보형물을 착용했는데 이 때문에 풍채가 상당히 커 보인다. 박처원 역시 상당한 거구였음을 감안하면 훌륭한 고증인 셈. 이외에도 평안도 사투리를 쓰거나 공산주의자에게 일가족이 학살당했다는 설정을 부과하여 상당히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어내었다. 상술하듯 실제 박처원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고초를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는 확실하지 않다.
[1] 정확히는 아버지 박동훈이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제1회 졸업생 출신으로, 조선총독부와 평안남도청에서 근무한 후 군수로 일했다고 한다.[2]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군 보급기지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손톱과 발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3] 이는 상술한 것처럼 가족이 공산당에 몰살당한 것으로 인한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라고 한다.[4] 박처원의 치안감 승진발표가 10월 24일에 났는데# 내무부 직제개정을 통한 치안본부 제5조정관 보직 신설은 10월 27일에 이루어졌다.#[5] 경찰 내부에서는 박처원이 '업무에서는 호랑이처럼 굴다가도 부하들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고 평가했다.[6]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는 다르게 5공 정권의 고문 행위는 주로 남산 안기부가 아니라 남영동을 비롯한 경찰에 의해 자행되었으며(애초에 안기부는 그렇게 인원이 많은 곳이 아니다.) 5공 정권의 대표적인 치부인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안기부가 아닌 경찰의 소행이다. 심지어 당시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로 악명높은 이근안도 안기부나 보안사 소속이 아닌 현직 경찰로서 박처원의 경호와 허드렛일을 도맡던 사람이다.[7] 남영동 대공분실 소속 전직 경관의 증언에 따르면 윗사람이 내려와 "말로 해서 되겠느냐"라며 고문을 독려했다고 한다.[8] 링크의 기사(2018년 기사)에 '10년 전 고령으로 사망했다'는 언급이 있다.[9] 그러면서도 박처원은 "간첩 잡을 경찰이 다 없어졌어요"라는 발언을 남겼다.[10] 해당 에피소드 내용은 박처원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의 사기 사건이었다.[11] 다만, 박처원의 이런 지침이 실제로 반영되는 일은 그닥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5공시기 대공 사건들 중에는 공안조작 사건도 다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누구누구를 간첩으로 몰아서 여론을 묻으라' 는 청와대의 지시로 조작 대상이 구체적으로 지정되어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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