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스 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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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1978년 출생
- 1996년 데뷔
- 2014년 은퇴
- 빅토리아 주 출신 인물
- 호주의 축구선수
- 밀월 FC/은퇴, 이적
- 블랙번 로버스 FC/은퇴, 이적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에버튼 FC/은퇴, 이적
- 갈라타사라이 SK/은퇴, 이적
- 알 자지라 클럽/은퇴, 이적
- 알 와슬 FC/은퇴, 이적
- 시드니 FC/은퇴, 이적
- 오미야 아르디자/은퇴, 이적
- 왓포드 FC/은퇴, 이적
- 동커스터 로버스 FC/은퇴, 이적
- 호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참가 선수
- 호주의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
-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참가 선수
-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참가 선수
- 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 참가 선수
- 호주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2000 시드니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97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말레이시아 참가 선수
루카스 닐의 역임 직책 | ||||||||||||||||||||
루카스 닐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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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前 축구선수 | ||
이름 | 루카스 닐 Lucas Neill | |
본명 | 루카스 에드워드 닐 Lucas Edward Neill | |
출생 | ||
국적 | ||
신체 | 185cm | |
직업 | ||
소속 | 선수 | 맨리 유나이티드 FC (1991~1993 / 유스) AIS (1994~1995 / 유스) 밀월 FC (1996~2001) 블랙번 로버스 FC (2001~2007)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07~2009) 에버튼 FC (2009~2010) 갈라타사라이 SK (2010~2011) 알 자지라 클럽 (2011~2012) 알 와슬 (2012~2013) 시드니 FC (2013) 오미야 아르디자 (2013) 왓포드 FC (2014) → 동커스터 로버스 (2014 / 임대) |
국가대표 | 96경기 1골 (호주 / 1996~2013) | |
가족 | 부모: 프랜 닐, 애드 닐 형제자매: 팀 닐 배우자: 린제이 모리스2008~ |
호주의 前 축구선수.
블랙번에서는 2001년 9월 선덜랜드 AFC전에서 처음 출장했고, 그해 11월에 볼턴 원더러스전에서 첫 득점을 기록하였다. 그는 팀에서 빠르게 적응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팀에서 5년 넘게 주전 우측 수비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블랙번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내며 단숨에 리그에서 손꼽히는 수비수로 거듭나게 된다.
첫 시즌에 팀이 풋볼 리그 컵 결승에 진출하여 토트넘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면서 생애 두번째로 트로피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2006-07 시즌을 앞두고, 그의 에이전트 피터 해리슨은 "그는 블랙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클럽과 팬들을 사랑하며 이제 변화가 필요할 때라고 느낀다"고 말하며 이적을 암시했으며 닐은 팀과 재계약을 서명하지 않기로 발표했다. 이유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라고 밝혔고, 이후 첼시 FC와 FC 바르셀로나가 그의 영입에 관심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첫 시즌에 팀이 풋볼 리그 컵 결승에 진출하여 토트넘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면서 생애 두번째로 트로피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2006-07 시즌을 앞두고, 그의 에이전트 피터 해리슨은 "그는 블랙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클럽과 팬들을 사랑하며 이제 변화가 필요할 때라고 느낀다"고 말하며 이적을 암시했으며 닐은 팀과 재계약을 서명하지 않기로 발표했다. 이유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라고 밝혔고, 이후 첼시 FC와 FC 바르셀로나가 그의 영입에 관심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겨울 이적시장을 앞두고 리버풀 FC와의 이적설이 강력하게 연결됐다. 이는 닐이 어린시절 리버풀 팬이었다고 밝혔고, 당시 감독인 라파엘 베니테즈도 닐이 영입에 관심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리버풀로의 이적이 유력했으나, 정작 그는 부진에 빠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선택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택에 의아해했는데, 자신의 열렬히 응원했던, 그리고 규모가 있는 빅클럽인 리버풀로 이적할 것으로 당연히 생각했으나, 강등 위기에 처한 웨스트햄으로 이적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도 안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정에 많은 사람들이 돈에 정신팔려 이적했냐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에 그는 돈 때문이 아니라 리버풀에서 뛴다면 본인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며, 웨스트햄의 야망에 끌려 이적을 결심하게 됐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닐의 해명에도 많은 이들의 비판은 멈추지 않았고, 한동안 경기에 나설때마다 야유를 받기도 했다.
2007년 2월, 왓포드 FC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른 뒤 무릎 부상으로 잠시 결장했지만, 복귀 이후에는 계속해서 주전 수비수로 출전했다.
2008-09 시즌에 구단과의 1년 재계약을 사양하면서 자유계약으로 풀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결정에 많은 사람들이 돈에 정신팔려 이적했냐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에 그는 돈 때문이 아니라 리버풀에서 뛴다면 본인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며, 웨스트햄의 야망에 끌려 이적을 결심하게 됐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닐의 해명에도 많은 이들의 비판은 멈추지 않았고, 한동안 경기에 나설때마다 야유를 받기도 했다.
2007년 2월, 왓포드 FC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른 뒤 무릎 부상으로 잠시 결장했지만, 복귀 이후에는 계속해서 주전 수비수로 출전했다.
2008-09 시즌에 구단과의 1년 재계약을 사양하면서 자유계약으로 풀리게 되었다.
2009년 9월 17일, 대표팀 동료이자 절친인 팀 케이힐이 있는 에버튼에 자유계약으로 합류했다. 2009년 9월 23일 리그 컵에서 에버튼 데뷔전을 가졌으며 전반기동안 리그 12경기 포함 14경기에 출전했다.
마지막 프리미어 리그 시즌이었으며 리그 통산 279경기 6골 11도움 블랙번~에버튼 시절까지 종합 331경기 9골 12도움을 기록하였다.
마지막 프리미어 리그 시즌이었으며 리그 통산 279경기 6골 11도움 블랙번~에버튼 시절까지 종합 331경기 9골 12도움을 기록하였다.
1996년 10월, 그는 18살의 나이에 리야드에서 열린 사우디와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면서 대표팀에 데뷔했다. 이는 해리 큐얼과 던컨 커밍스에 이은 역대 3번째 최연소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데뷔였다.
2000년에는 자국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블랙번에서 두드러진 기량 발전을 이루어내자 2004년부터는 A대표팀에 자주 소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월드컵 최종예선 기간동안 마크 슈워처 등과 함께 후방을 든든히 지키며 대륙간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우루과이를 꺾고 32년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짓는데 크게 기여했다.
월드컵 본선에서도 팀의 4경기 모두 출전하여 맹활약했지만,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페널티에리어에서 파비오 그로소를 넘어뜨려 실점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2]
월드컵을 마친 뒤에는 사커루의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파라과이전(경기 결과는 1:1)에서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달았다. 그리고 조국의 2007 AFC 아시안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그리고 1년 뒤 본선에 참가하여 우승을 노렸으나, 이라크와의 조별라운드에서 특유의 다혈질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심판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고, 8강에서는 일본을 만나 승부차기에서 실축을 범해 패배의 원흉으로 비판받으면서 대회기간동안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과 2011 AFC 아시안컵 두 대회 모두 주장으로 참가였고, 아시안컵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다.
이후에는 급격한 노쇠화로 실력이 크게 떨어졌음에도 대표팀에서 철밥통 신세로 지내자 호주의 축구팬들과 전문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2013년 9월 7일에 치러진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와 10월 11일 프랑스와의 친선경기에서 2경기 연속으로 6:0으로 패하자 비난의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폭스 스포츠 오스트레일리아는 경기 후 가진 비디오 분석에서 호주가 2경기동안 내준 12골 실점 중 절반 이상이 닐에게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몇몇 전문가들은 이제는 닐이 주장 자리는 물론이고, 대표팀 자리에서도 물러나야된다며 은퇴를 촉구하는 강도 높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6일,엔지 포스테코글루 대표팀 감독은 그를 브라질 월드컵 최종명단에 포함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그의 대표팀 커리어도 막을 내렸다.
2000년에는 자국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블랙번에서 두드러진 기량 발전을 이루어내자 2004년부터는 A대표팀에 자주 소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월드컵 최종예선 기간동안 마크 슈워처 등과 함께 후방을 든든히 지키며 대륙간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우루과이를 꺾고 32년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짓는데 크게 기여했다.
월드컵 본선에서도 팀의 4경기 모두 출전하여 맹활약했지만,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페널티에리어에서 파비오 그로소를 넘어뜨려 실점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2]
월드컵을 마친 뒤에는 사커루의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파라과이전(경기 결과는 1:1)에서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달았다. 그리고 조국의 2007 AFC 아시안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그리고 1년 뒤 본선에 참가하여 우승을 노렸으나, 이라크와의 조별라운드에서 특유의 다혈질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심판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고, 8강에서는 일본을 만나 승부차기에서 실축을 범해 패배의 원흉으로 비판받으면서 대회기간동안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과 2011 AFC 아시안컵 두 대회 모두 주장으로 참가였고, 아시안컵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다.
이후에는 급격한 노쇠화로 실력이 크게 떨어졌음에도 대표팀에서 철밥통 신세로 지내자 호주의 축구팬들과 전문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2013년 9월 7일에 치러진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와 10월 11일 프랑스와의 친선경기에서 2경기 연속으로 6:0으로 패하자 비난의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폭스 스포츠 오스트레일리아는 경기 후 가진 비디오 분석에서 호주가 2경기동안 내준 12골 실점 중 절반 이상이 닐에게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몇몇 전문가들은 이제는 닐이 주장 자리는 물론이고, 대표팀 자리에서도 물러나야된다며 은퇴를 촉구하는 강도 높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6일,엔지 포스테코글루 대표팀 감독은 그를 브라질 월드컵 최종명단에 포함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그의 대표팀 커리어도 막을 내렸다.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 2000-01
- 풋볼 리그 컵 : 2000-01
- OFC 네이션스컵 : 2004
- 호주 U-20 축구 국가대표팀
- OFC U-20 챔피언쉽: 1997
- 리버풀과의 악연이 꽤 있는 선수다. 블랙번 시절 그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전투적인 플레이로 서포터즈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반대로 상대팬들은 그를 싫어했다. 그 중에서도 리버풀 팬들은 더욱 심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2003년 9월 13일, 리버풀 FC과의 경기에서 그의 거친 태클로 제이미 캐러거의 다리를 부러뜨렸고, 즉시 닐은 퇴장당했다. 캐러거는 이후 6개월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블랙번과 닐은 즉각 사과를 하지 않으면서 두 구단 사이에는 불꽃 튀는 설전이 벌어졌었다. 두 팀은 한달 후 다시 만났고, 닐은 그 경기에서도 또다시 퇴장당했다. (..) 이후 상술했던 이적 사건으로 콥들의 가슴에 두번 못 박으면서 쐐기를 박았다. 아이러니한건 정작 닐은 어린 시절 콥이었다고 한다.
행보를 봤을때 뻥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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