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1924)
최근 수정 시각:
분류
역임한 직위 | ||
|
1924년 12월 17일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5년제 경북중학교[4]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8년에 제3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1950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 대한민국 해군 군법무관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하였다.
이후 판사로 근무하다, 1975년 박정희 정부에서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지명으로 유태흥의 뒤를 이어 대법원장이 되었다.1988년 6월 15일 대법원장 퇴진을 촉구하는 소장 법관들의 서명으로 전개된 제2차 사법 파동에 직면하게 되면서 사임하였다.[5]
이후, 한양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1988∼2011년)와 학교법인 경희학원 이사장(2006∼2015년)을 지냈다.
2020년 11월 10일, 자신의 고향인 성주군에서 운영하는 장학재단인 별고을 장학회에 1억원을 기탁했다.#
2023년 3월 14일, 98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빈소는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17일 장례는 법원장으로 거행되었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 대한민국 해군 군법무관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하였다.
이후 판사로 근무하다, 1975년 박정희 정부에서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지명으로 유태흥의 뒤를 이어 대법원장이 되었다.1988년 6월 15일 대법원장 퇴진을 촉구하는 소장 법관들의 서명으로 전개된 제2차 사법 파동에 직면하게 되면서 사임하였다.[5]
이후, 한양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1988∼2011년)와 학교법인 경희학원 이사장(2006∼2015년)을 지냈다.
2020년 11월 10일, 자신의 고향인 성주군에서 운영하는 장학재단인 별고을 장학회에 1억원을 기탁했다.#
2023년 3월 14일, 98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빈소는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17일 장례는 법원장으로 거행되었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마지막 대법원장이다.
- 일제강점기에 법률교육을 받은 경험 없이 해방 이후에 법률교육을 받은 첫 번째 대법관이다.
- 대법원장 재임 중 즉결심판을 개선하고, 전산실을 설치하여 등기사무 및 소송사무 전산화의 기초를 다졌다.
- 생전 청조근정훈장(1979년)과 수교훈장 광화대장(198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2015년) 등 상훈을 받았다.
- 사위(최성준)도 판사 출신 변호사이다.
-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오래 생존한 인물 중 하나이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