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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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할아버지 김주원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원성왕이 되는 김경신의 계략에 밀려났고, 하서주(명주, 현 강릉시)로 떠나게 된다.
아버지 김헌창은 822년(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난을 일으켜 장안국을 세워 신라를 몰아붙였으나 결국 패배해 자결한다. 이때 김범문은 김헌창의 난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범문은 이후 3년이 지난 825년(헌덕왕 17년)에 다시 난을 일으켰다.[1] 수도를 남평양[2]에 두고 나라를 세우려 했지만 한산주도독 김총명에게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후 무열왕계 진골은 6두품으로 강등되어 버린다(족강일등). 그렇다고 모든 무열왕계가 족강된 것은 아니다. 김양 등은 진골로 신라에서 지배계층으로 남았다
김헌창, 김범문의 반란은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귀족이 토착세력을 끌어들여 일으킨 반란의 시초격인 사건으로 이후 후삼국시대까지 이어지는 분열의 전조가 되었다.
아버지 김헌창은 822년(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난을 일으켜 장안국을 세워 신라를 몰아붙였으나 결국 패배해 자결한다. 이때 김범문은 김헌창의 난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범문은 이후 3년이 지난 825년(헌덕왕 17년)에 다시 난을 일으켰다.[1] 수도를 남평양[2]에 두고 나라를 세우려 했지만 한산주도독 김총명에게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후 무열왕계 진골은 6두품으로 강등되어 버린다(족강일등). 그렇다고 모든 무열왕계가 족강된 것은 아니다. 김양 등은 진골로 신라에서 지배계층으로 남았다
김헌창, 김범문의 반란은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귀족이 토착세력을 끌어들여 일으킨 반란의 시초격인 사건으로 이후 후삼국시대까지 이어지는 분열의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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