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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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국의 왕사는 다른 가야 소국들에 비해 상세하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가락국기》 덕분이며, 각 군주의 생년월일까지 확인할 수가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 《가락국기》의 전편이 실린 것이 아닌 일부만 실려있어서 왕호와 재위 연도만 확인할수 있고 군주의 재위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수로왕 때를 제외하곤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심지어는 삼국유사 권 제1의 '왕력'편과 삼국유사 권 제2의 '가락국기'편에서 전하는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삼국유사》에 확인되는 군주는 총 10명이며, 존재 여부가 불확실한[2] 11대 말왕(末王)을 포함하면 11명이다.
김해 수로왕릉 옆 숭선전과 숭안전에 역대 군주들의 위패가 있다.
《삼국유사》에 확인되는 군주는 총 10명이며, 존재 여부가 불확실한[2] 11대 말왕(末王)을 포함하면 11명이다.
김해 수로왕릉 옆 숭선전과 숭안전에 역대 군주들의 위패가 있다.
순서 | 왕호 | 재위 시기 | 재위 기간 | 전대 왕과의 관계 | 비고 |
1대 | 수로왕(首露) | 42년 - 199년 | 158년 | - | |
2대 | 거등왕(居登) | 199년 - 253년 | 55년 | 태자 | 가락국기에 의하면 치세는 39년 |
3대 | 마품왕(麻品) | 253년 - 291년 | 39년 | 태자 | |
4대 | 거질미왕(居叱彌) | 291년 - 346년 | 56년 | 태자 | |
5대 | 이시품왕(伊尸品) | 346년 - 407년 | 61년 | 왕자 | 왕력편에 의하면 406년에 사망 |
6대 | 좌지왕(坐知) | 407년 - 421년 | 15년 | 왕자 | |
7대 | 취희왕(吹希) | 421년 - 451년 | 31년 | 아들 | |
8대 | 질지왕(銍知) | 451년 - 492년 | 42년 | 왕자 | 왕력편에 의하면 487년에 사망 |
9대 | 겸지왕(鉗知) | 492년 - 521년 | 30년 | 왕자 | |
10대 | 구형왕(仇衡) | 521년 - 532년 | 11년[3] | 왕자 | 왕력편과 개황록에 의하면 532년 투항, 가락국기에 의하면 562년에 투항 |
금관국과 함께 가야 지역에서 가장 강성한 국력을 떨쳤던 대가야에 대한 자료는 굉장히 부족한 편이다. 시조인 이진아시왕과 관련된 자료도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어있는 것이 전부. 여기에 인용된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신라사 초기 기록에는 신라의 주변국으로서 그나마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많은 내용은 진위 여부가 불투명하다.
대가야는 1대 이진아시왕부터 16대 도설지왕까지 총 16대로 알려져 있지만 10대 군주로 추정되는 월광태자와 도설지왕과의 공통점들이 발견됨에 따라 10대일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존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가야조에는 1대 이진아시, 9대 이뇌, 16대 도설지라고 정확히 제시되어있다.
금림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하지왕은 《남제서》에서, 이뇌왕은 《일본서기》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월광태자는 《석순응전》에서, 도설지왕은 《석이정전》과 "진흥왕순수비"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들 군주들의 실존 유무와 금관국 군주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가설들이 있어 확실하게 대가야 군주라고 확인된 군주는 이진아시와 금림왕, 이뇌왕, 도설지왕 뿐이다. 월광 태자와 도설지왕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 이유중 하나로는 9대 이뇌왕이 494년에 즉위하여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은 기록이 있는데 가야제국들이 멸망하는 562년까지 40년밖에 안 되는데 16대까지라면 40년사이에 군주가 최소 7명이상이 수명을 다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 382년 (4세기 후엽)에 활동한 임나의 5대 군주 기본한기(己本旱岐)를 대가야의 군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몇 대 군주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며 추측으로서는 금관국처럼 5대 군주라는 추측도 전해진다.
대가야는 1대 이진아시왕부터 16대 도설지왕까지 총 16대로 알려져 있지만 10대 군주로 추정되는 월광태자와 도설지왕과의 공통점들이 발견됨에 따라 10대일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존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가야조에는 1대 이진아시, 9대 이뇌, 16대 도설지라고 정확히 제시되어있다.
금림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하지왕은 《남제서》에서, 이뇌왕은 《일본서기》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월광태자는 《석순응전》에서, 도설지왕은 《석이정전》과 "진흥왕순수비"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들 군주들의 실존 유무와 금관국 군주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가설들이 있어 확실하게 대가야 군주라고 확인된 군주는 이진아시와 금림왕, 이뇌왕, 도설지왕 뿐이다. 월광 태자와 도설지왕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 이유중 하나로는 9대 이뇌왕이 494년에 즉위하여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은 기록이 있는데 가야제국들이 멸망하는 562년까지 40년밖에 안 되는데 16대까지라면 40년사이에 군주가 최소 7명이상이 수명을 다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 382년 (4세기 후엽)에 활동한 임나의 5대 군주 기본한기(己本旱岐)를 대가야의 군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몇 대 군주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며 추측으로서는 금관국처럼 5대 군주라는 추측도 전해진다.
안라국은 후기 가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나라였으나 아쉽게도 국내외 사서를 종합해도 군주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금관국, 반파국 다음으로 이들과 더불어 가야의 대표적인 연맹 세력 또는 제국(諸國)들을 이루는 국가였으나 이곳도 가실왕이 안라국 군주라는 추측만 있을 뿐 확실하진 않다. 안라왕 항목 참조.
아이러니하게도 안라국의 2인자격인 차한기(次旱岐) 지위의 이탄해(夷呑奚)·대불손(大不孫)·구취유리(久取柔利) 등은 이름이 기록에 남았는데, 이들이 사비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2차 사비회의 때는 이탄해가 오지 않았는데 노인을 사신으로 보내지 않는 관습과 셋 중 가장 먼저 호명된 정황상 군주로 등극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신찬성씨록에 임나국왕으로 기록된 풍귀왕(豊貴王)을 안라국 국왕으로 추정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출처]
아이러니하게도 안라국의 2인자격인 차한기(次旱岐) 지위의 이탄해(夷呑奚)·대불손(大不孫)·구취유리(久取柔利) 등은 이름이 기록에 남았는데, 이들이 사비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2차 사비회의 때는 이탄해가 오지 않았는데 노인을 사신으로 보내지 않는 관습과 셋 중 가장 먼저 호명된 정황상 군주로 등극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신찬성씨록에 임나국왕으로 기록된 풍귀왕(豊貴王)을 안라국 국왕으로 추정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출처]
소가야의 왕사는 문헌과 유적등에서는 거의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족보를 보면 알에서 태어난 여섯동자중 막내가 소가야의 시조 말로왕이라는 것 뿐이다. 고성 김씨 족보에 따르면 9대까지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확실하지않다. 아래 표는 삼국사기 등 사서가 아닌 고성김씨 족보에만 나와있는 내용이다.
※ 검증된 사료가 아니므로 열람 시 주의할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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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순국의 군주들은 국내 기록에는 없고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만 남아있는 상태다. 다만 말금한기의 경우 실제 이름일 가능성은 적어서, 제대로 이름이 전해지는 군주는 아리사등 뿐이다.
왕명 | 비고 |
임나국(任那国) 하라하실왕(賀羅賀室王) | 사쿄(左京) 미치타노무라지(道田連)의 시조. |
임나국인(任那国人) 도로하라아사라지(都怒賀阿羅斯止) | 사쿄(左京) 오치노오비토(大市首)의 시조. |
임나국인(任那国人) 도로하아라지지(都怒何阿羅志止) | 사쿄(左京) 시미즈노오비토(清水首)의 시조. |
어간명국주(御間名国主) 이리구모왕(尓利久牟王) | 야마시로쿠니(山城国) 타타라노키미(多多良公)의 시조. |
임나국주(任那国主) 도노가아라사등(都奴加阿羅志等) | 야마토노쿠니(大和国) 히라토노오비토(辟田首)의 시조. |
야마토노쿠니(大和国) 오토모미야츠코(大伴造)의 시조. | |
임나국인(任那国人) 좌리금(左李金) 혹은 좌리기모(佐利己牟) | 셋쓰노쿠니(摂津国) 도요츠노미야츠코(豊津造)의 시조. |
좌리금(左李金) 혹은 좌리기모(佐利己牟)의 후손 | 셋쓰노쿠니(摂津国) 가라히토(韓人)의 시조. |
임나국(任那国) 풍귀왕(豊貴王)의 후손 | 셋쓰노쿠니(摂津国) 아라라노키미(荒荒公)의 시조. |
미마나국주(弥麻奈国主) 모류지왕(牟留知王)의 후손 | 우쿄(右京) 미마메이키미(三間名公)의 시조. |
이중 가실왕(=하라하실왕), 아리사등(=도로하라아사라지, 도로하아라지지, 도노가아리사등)을 제외한 나머지 군주(이리구모왕, 용주왕, 좌리왕, 풍귀왕, 모류지왕)들은 단지 임나(미마나)의 군주로만 기록되어 있어서 출신이 명확하지 않다.
[1]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일본서기를 다룰 때 독이 가득한 복어 회를 손질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워낙 일본의 견해가 심한 사서라 어떤 게 프로파간다이고 어떤 게 사실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지만, 국내 자료가 워낙 부족하니 일단 옛날에 쓰여진 책임은 확실한 이쪽 자료라도 가리고 가려내서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2] 김해김씨의 족보에서만 확인이 된다.[3] 셋째 아들 김무력은 신라의 장군으로 등용되어 백제 성왕과의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김무력의 손자가 김유신. 즉 김유신은 옛 가야의 군주인 구형왕의 증손자다.[4] 554년 관산성 전투 부근으로 추측[출처] 정효운, 阿羅國의 멸망과 日本列島로 건너간 아라국의 후예들,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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