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본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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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본햄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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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본햄 John Bonha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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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넘](http://i.namu.wiki/i/NNAUaZmaPYM3xIZR7lf7QP49bpaKBIJh3GL6P4r83CmeFgnl_ENMRdxRT2wH02aIudcX3J1NyNNKmfVJfgs0PaZ0Gm40qvei88-ggevI7antzZI87-u4zFWa14PWDZ5odD5GTZ7-x9jZfDMKG1eKWg.webp)
존 본햄은 1948년 잉글랜드 우스터셔 주 레디치에서 조안과 잭 본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엌의 냄비와 팬을 두드리길 좋아했고, 다섯 살 때는 빈 통과 커피 깡통으로 첫 번째 드럼 키트를 만들기도 했다.[3] 열 살쯤에는 진짜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15살에는 아버지의 선물로 중고 드럼 키트를 갖게 되었다.
![보넘](http://i.namu.wiki/i/7bjIjAK1hE3SVjHSIwWqkKuEimFZqrUxlOTkfVSPKnbZKvsGtClRM90JuheUlLnGVa9Zw4xmQUqTqXrAe6N1Ag.gif)
존 본햄은 마지막으로 레드 제플린에 합류한 구성원이다. 1968년, 밴드 오브 조이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인 로버트 플랜트는 뉴 야드버즈라는 밴드에 새로 가입했는데, 드러머가 없던 뉴 야드버즈에서 드러머로 그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존 본햄은 처음에는 합류하기를 주저했다. 플랜트는 본햄을 설득하기 위해 본햄의 단골 술집인 'Three Men in a Boat'로 8통의 전보를 보냈으며, 이어 뉴 야드버즈의 매니저 피터 그랜트가 40통의 전보를 보냈다. 당시 본햄은 여러 밴드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그중에서 음악이 가장 마음에 든 뉴 야드버즈를 선택하여 가입했고, 이 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레드 제플린’으로 밴드명을 바꾼다.
레드 제플린은 1968년 12월에 바닐라 퍼지의 오프닝 밴드로 미국 공연을 시작했다. 본햄은 이때 친분을 맺은 바닐라 퍼지의 드럼 연주자 카마인 어피스의 권유로 드럼을 루딕으로 바꾸고, 이후 평생 동안 루딕 드럼을 사용했다. 당시 록 음악 드러머로는 드물게 대부분의 공연에서 30분 이상을 솔로로 연주하였으며, Led Zeppelin II에는 드럼 중심의 연주곡 Moby Dick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1980년 9월 25일, 고작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밴드의 말기,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의 계속되는 친목질에 지친 존 폴 존스가 밴드에서 일시적으로 탈퇴하는 등, 긴장감 넘치는 밴드의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했던 본햄은 원래 술에 약한 체질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술을 찾기 시작했다.
1980년 9월 24일 리허설을 하기 위해 지미 페이지의 저택에 온 본햄은 아침부터 하루 내내 서른 잔이 넘는 보드카를 오렌지 주스에 섞어 마셨고 결국 자정이 넘어서 존 폴 존스와 다른 한 사람이 만취한 그를 침대로 옮겼다. 그런데 다음날인 25일 오후 1시 45분, 존스가 본햄이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4] 부검 결과 본햄은 수면 중 구토로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5]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10월 4일, 우스터셔의 교회에 묻혔고 이후 레드 제플린은 12월 4일 성명을 내고 해체를 선언했다.
존 본햄 사후 아들 제이슨 보넘(Jason Bonham)이 아버지를 이어 전업 드러머로 활동 중이다. 1966년생이라 1948년생인 아버지 존 본햄과 고작 열여덟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아들인 제이슨은 아버지가 사망한 다음해인 15세 때 처음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해[6] 88년 아버지의 밴드 동료였던 지미 페이지의 솔로 앨범 투어에 따라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UFO, 포리너, 마이클 잭슨 등 여러 음악가들에게서 세션 드러머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2007년 아버지가 계시던 밴드의 생존한 세 삼촌들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12월 2일 레드 제플린이 미국 케네디 센터에 헌액됐을 땐 헌액기념식에서 레드 제플린의 대표곡인 Stairway to Heaven을 공연할 때 드럼 연주를 담당하기도 했다. 공연 영상
제이슨 보넘의 아들이자 존 본햄에게는 손자이기도 한 제이거 보넘(Jager Bonham)은 보디빌더 일을 하고 있는 동시에 겸사겸사 드럼도 연주한다.
1980년 9월 24일 리허설을 하기 위해 지미 페이지의 저택에 온 본햄은 아침부터 하루 내내 서른 잔이 넘는 보드카를 오렌지 주스에 섞어 마셨고 결국 자정이 넘어서 존 폴 존스와 다른 한 사람이 만취한 그를 침대로 옮겼다. 그런데 다음날인 25일 오후 1시 45분, 존스가 본햄이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4] 부검 결과 본햄은 수면 중 구토로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5]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10월 4일, 우스터셔의 교회에 묻혔고 이후 레드 제플린은 12월 4일 성명을 내고 해체를 선언했다.
존 본햄 사후 아들 제이슨 보넘(Jason Bonham)이 아버지를 이어 전업 드러머로 활동 중이다. 1966년생이라 1948년생인 아버지 존 본햄과 고작 열여덟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아들인 제이슨은 아버지가 사망한 다음해인 15세 때 처음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해[6] 88년 아버지의 밴드 동료였던 지미 페이지의 솔로 앨범 투어에 따라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UFO, 포리너, 마이클 잭슨 등 여러 음악가들에게서 세션 드러머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2007년 아버지가 계시던 밴드의 생존한 세 삼촌들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12월 2일 레드 제플린이 미국 케네디 센터에 헌액됐을 땐 헌액기념식에서 레드 제플린의 대표곡인 Stairway to Heaven을 공연할 때 드럼 연주를 담당하기도 했다. 공연 영상
제이슨 보넘의 아들이자 존 본햄에게는 손자이기도 한 제이거 보넘(Jager Bonham)은 보디빌더 일을 하고 있는 동시에 겸사겸사 드럼도 연주한다.
무엇이 존 본햄을 뛰어난 드러머로 만드는가? |
Fool in the Rain 드럼 섹션 | Moby Dick 연주 |
레드 제플린의 공연을 처음 보러갔을 때가 기억난다. 존 본햄이 드럼 솔로를 시작하자, 그 사운드의 압박에 프레디와 나는 엎어 자빠졌다.
현대 드럼 연주의 주법의 뿌리를 찾아가면 결국 존 본햄에게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사실로 인해 가장 위대한 드러머로 평가된다. 롤링 스톤 등 대다수의 음악 평론 잡지에서도 록 음악에 국한하지 않고 드럼이라는 악기를 다루는 드러머 중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러머를 뽑을 때는 존 본햄을 1위로 뽑는다. 선구자의 역할로 봐도, 연주자의 역할로 봐도 어느 쪽도 빠지는 구석이 없어서 이런 투표를 하면 존 본햄이 맨 윗자리를 고정적으로 가져간다고 봐도 무방하다.[7] 기타를 배우거나 연주하는 사람들이 레드 제플린, 크림은 몰라도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튼 등의 기타리스트를 알듯이, 드럼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들은 레드 제플린, 더 후는 몰라도 존 본햄, 키스 문을 모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사람이 드럼이라는 악기에 미친 영향은 1960년대 대중문화에 비틀즈가 미친 영향급으로 거대하다. 지미 헨드릭스라는 천재가 오늘날의 기타 사운드를 정립했다면, 드럼에는 존 본햄이 있었다. 그의 드러밍은 록밴드의 드럼 소리를 표현할 때 흔히 표기되는 '쿵 - 빡'을 가장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주력 면에서도 역대 최고라고 평가받을 만한데, 그는 키스 문이 추구했던 힘뿐만 아니라 박자감 또한 매우 정확했고 그루브 또한 최상급이었다. 이러한 괴물같은 실력을 라이브에서도 그대로 발휘했는데, 라이브에서 박자를 틀렸던 적이 제로에 가까웠다.[8] 그중에서도 Moby Dick을 10분 정도나 늘려서 연주하는 라이브는 현재까지도 드럼계에서 레전드로 자리잡아 있다.[9]
존 본햄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록 음악 최초로 컴비네이션 주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거대한 투베이스 드럼 세트는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한 것일 뿐 드럼 연주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본적인 드럼 세트만 있어도 모든 리듬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컴비네이션을 폭넓게 사용한 드럼 솔로로 입증했다.
그의 연주력을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 Good Times Bad Times 등 더블 베이스를 사용해야 하는 곡들마저 기본 드럼 세트로만 연주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를 라이브에서도 똑같이 기본 드럼 세트로만 연주하는 등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곡같은 경우 프로 드러머들도 더블 베이스를 사용해야 커버할 수 있는 곡인데도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었으니…
지식채널ⓔ <심장의 고동> 편에 존 본햄이 소개되었다. 지식채널에서 록 뮤지션이 소개된 건 지미 헨드릭스 이후 두번째였다. 여담으로, 해당 방송분에는 '다른 드러머들'로 더 후의 키스 문과 딥 퍼플의 이안 페이스, 비틀즈의 링고 스타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1] '토트넘' '베컴' 등 유사하게 발음되는 어휘들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심의 결과를 준수한 표기. 실제 원어 발음에 보다 가깝다 할 수 있으나, 70년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던 '본햄'이라는 표기가 오늘날까지도 더 많이 통용되고 있다.[2] 생전 소속 밴드였던 레드 제플린이 워낙 많은 장르를 다루었다보니 존 본햄 또한 수많은 장르의 곡들에서 드러머로 활약했다.[3] 스네어드럼 소리를 내기 위해 커피 깡통에다가 느슨한 철사를 감았다고 한다. 실제로 스네어 드럼에 철사 재질의 와이어가 감겨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관찰력이 대단한 셈.[4] 당시 흑마법 같은 오컬트에 심취해 있었던 지미 페이지는 그를 되살리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흑마법 주문을 외웠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이에 크게 실망한 지미 페이지는 이후로 흑마법에 관심을 끊었다고 한다.[5] Volcano라고 불린다.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불리우는 지미 헨드릭스, AC/DC의 보컬리스트 본 스콧과 같은 사인이다. 최고의 기타리스트와 최고의 보컬리스트, 최고의 드러머가 같은 사인으로 사망한 셈이다.[6] 18세 경에는 'Airrace'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퀸의 The Works 투어의 서포트 밴드로 활동하기도 했다.[7] 여기에 더 후의 키스 문이 늘 2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드러머의 위대함을 순위로 매기는 투표는 사실상 3위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기타계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존재로 인해 최고의 기타리스트 순위를 매기는 투표가 사실상 2위부터 시작한다는 것과 동일하다.[8] 그와 연주력에서 비견되는 키스 문은 매번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기에 라이브에서의 연주 실력은 최상급은 아니었다. 더 후 멤버들도 이를 지적했다고.[9] 1970년 로얄 알버트 홀에서 한 라이브는 유튜브에도 영상으로 풀려 있다.[10] 레드 제플린 활동 전에 사용하던 가명이지만 레드 제플린 데뷔 이후에는 그의 별명이 되었다. 본 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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