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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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8일 - 하인리히 4세에 대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파문이 교황의 용서로 해제되었다.
- 10월 : 셀주크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만을 고집하는 니키포리치스[1]와 미카일 7세 정권에 분노한 니키포로스 보타니타스가 프리기아에서 반란. 비슷한 시기 세르비아 격파하며 명성 얻은 디라키움 총독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도 니키포리치스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소문에 황제 칭하며 반란, 동생 요안니스와 장군 바실라시오스 동참.
- 11-12월 : 니키포로스 보타니타스의 군대가 프리기아와 비티니아 사이의 코타이움 일대 장악한 튀르크 군벌 쉴레이만과 타협하여 그에게 비티니아 도시들 (보스포루스까지!) 주둔 허용. 이후 반란군은 크리소폴리스로 진격.
- 그레고리오 7세가 코르시카 섬을 피사 주교구 하에 포함시켰다.
-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바다호스 토후국을 격파하고 코리아를 점령하였다.
- 브세볼로드가 키예프 루스의 대공으로 즉위하였다.
- 고립된 에데사의 아르메니아 인들이 봉기, 그 지도자인 필라르테스가 둑스 레오를 체포하고 바실 아포카페스를 총독으로 옹립.
- 요안니스 두카스, 첫부인 잃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와 자신의 손녀이자 안드로니코스의 딸인 11세의 이레네 결혼시킴.
- 바이외의 태피스트리가 완성되었다.
- 윌리엄 1세의 아들 로베르토가 부왕에게 대항하였다.
- 중세 유럽의 결투 재판에 대한 첫 기록이 잉글랜드 측 문서에 등장한다.
[1] 예산이 없었거나 군부의 정권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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