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입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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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헨리크 요한 입센 Henrik Johan Ibsen |
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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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수잔나 입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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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노르웨이의 항구 도시 시엔(Skien)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집이 부유해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7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집안이 몰락하면서 15살 때 그림스터라는 조그마한 읍의 약제사 조수가 되어 생계를 근근히 유지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인 18세에 약국 하인이었던 엘제 소피 옌스다터 비르케달렌(Else Sophie Jensdatter Birkedalen)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기도 했다. 이 아이가 14살이 될 때까지 입센이 양육비를 지원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작문에 흥미가 있어 신문의 문예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했다. 22세에 데뷔작인 희곡 <카틸리나>를 발표했다. 그 후 1막극 <전사의 무덤>이 수도 크리스티아니아[3]에서 상연되자 대학 진학의 꿈을 버리고 전업작가로 전향한다. 30세에 베르겐 시의 목사 한스 콘라드 토레센의 딸인 수잔나 토레센(Suzannah Daae Thoresen)[4]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35세에 사극 <왕위를 노리는 자>를 썼으나 인정받지 못하자 외유에 나서기로 한다. 36세에 로마로 떠났고 그 후 28년 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유랑생활을 한다. 39세에 극시 페르 귄트(Peer Gynt)를 발표했다. 당시에 문단은 난해함에 대해서 비판했으나 입센은 노르웨이 시의 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고 그것은 그대로 되었다. 페르 귄트는 이후 역시 노르웨이 출신인 음악가 그리그가 동명의 모음곡으로 작곡했으며, 지금은 이쪽이 더 유명하다.
1879년 51세 때 인형의 집(Et dukkehjem)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한 해방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사실주의 연극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 후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다가 1891년 2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나이 63세였다. 1906년 동맥 경화증으로 인해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노르웨이 정부는 국장의 예로 작가의 공로에 보답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작문에 흥미가 있어 신문의 문예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했다. 22세에 데뷔작인 희곡 <카틸리나>를 발표했다. 그 후 1막극 <전사의 무덤>이 수도 크리스티아니아[3]에서 상연되자 대학 진학의 꿈을 버리고 전업작가로 전향한다. 30세에 베르겐 시의 목사 한스 콘라드 토레센의 딸인 수잔나 토레센(Suzannah Daae Thoresen)[4]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35세에 사극 <왕위를 노리는 자>를 썼으나 인정받지 못하자 외유에 나서기로 한다. 36세에 로마로 떠났고 그 후 28년 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유랑생활을 한다. 39세에 극시 페르 귄트(Peer Gynt)를 발표했다. 당시에 문단은 난해함에 대해서 비판했으나 입센은 노르웨이 시의 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고 그것은 그대로 되었다. 페르 귄트는 이후 역시 노르웨이 출신인 음악가 그리그가 동명의 모음곡으로 작곡했으며, 지금은 이쪽이 더 유명하다.
1879년 51세 때 인형의 집(Et dukkehjem)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한 해방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사실주의 연극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 후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다가 1891년 2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나이 63세였다. 1906년 동맥 경화증으로 인해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노르웨이 정부는 국장의 예로 작가의 공로에 보답하였다.
- 카틸리나
- 바다에서 온 여인
- 들오리
- 페르 귄트
-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 로스메르스홀름
- 건축가 솔네스
- 헤다 가블러
-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 아기 에욜프
- 성 요한의 전야
- 올라프 실예크란스
- 헬겔란트의 바이킹
- 브랜드
- 황제와 갈릴레이
- 현대 희곡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대학 연극과에서도 안톤 체호프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극작가이다.
- 2022년 6월, 한국어판 헨리크 입센 전집이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한국연극학회 회장을 지낸 김미혜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노르웨이어를 직접 공부하여 번역했다고 한다.
[1] 노르웨이 왕정 수립에 공헌했다.[2] 결혼 전에 낳은 아이이다.[3] 지금의 오슬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를 기념하여 20세기까지 크리스티아니아로 불렸다.[4] 수잔나는 적극적인 페미니스트였으며 토레센 가의 가정교사였다가 새어머니가 된 안나 막달렌 토레센(Anna Magdalene Thoresen, 결혼 전 성은 Kragh) 또한 작가인 동시에 여러 배우, 문학가들과 교류하여 영향을 끼치는 등으로 당대 기준 매우 진보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입센의 아내와 장모는 그의 작품의 여성 인물들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5] 다만, 이 말은 다소 어폐가 있는데, 애초에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는 모두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의 북게르만어군에 속하여서 뿌리도 같을 뿐더러, 양쪽 언어가 방언연속체를 이룰 만큼 비교언어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라서, 애초에 두 언어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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