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이
최근 수정 시각:
|
몽골 제국 섭정 대칸 툴루이 칸 | ᠲᠤᠯᠤᠢ ᠬᠠᠭᠠᠨ | |
원 추존 황제 예종 | 睿宗 | |
예종(睿宗) | |
인성경양황제(仁聖景襄皇帝) | |
툴루이 칸(ᠲᠤᠯᠤᠢ ᠬᠠᠭᠠᠨ / Тулуй хаан) (拖雷汗 / 타뢰한) | |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Боржигин) (孛兒只斤 / 패아지근) | |
툴루이(ᠲᠥᠯᠦᠢ/Тулуй) (拖雷 / 타뢰) | |
생몰 기간 | 1192년 ~ 1232년 (40세) |
재위 기간 | 1227년 ~ 1229년 (2년) |
칭기즈 칸의 적자 중 가장 용맹했던 전사로 금나라 정벌이나 호라즘 왕조 정벌, 중앙아시아 원정까지 아버지를 따라 종횡무진하며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단, 형들인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가 일군을 이끌고 다른 방면의 사령관을 맡아 전공을 세웠는데 툴루이는 아버지 칭기즈 칸의 막하에서 활동했다.
칭기즈 칸은 생전에 본인의 후계자로 툴루이가 아닌 오고타이를 지목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나서 차기 대칸을 추대하는 쿠릴타이가 열렸는데 거기서 툴루이가 더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아버지의 뜻을 기억하고 있던 툴루이는 2년 동안 임시로 대칸의 권한을 행사하다가[1] 1229년의 쿠릴타이에서 형 오고타이가 신임 대칸으로 선출되도록 했다. 사실 본인의 세력이 오고타이보다 컸기 때문에 아버지의 유훈이고 뭐고 자기 아들처럼 경쟁자를 쓸어버리고 대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2]
금나라 원정[3]에서 공을 세웠지만 돌아오는 길에 병사했다. 죽음에 대해서는 오고타이 칸이 금나라 산천(山川)의 신들이 내린 저주를 받아 병이 들어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자신이 대역이 되어 형의 목숨을 살려주고 자신이 죽었다는 희생의 이야기가 《원조비사》에 남아 있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일단 술병이었다.
하지만 오고타이 가문과의 묘한 알력 때문에 일각에서는 오고타이 가문이나 숙부인 테무게 옷치긴 일파에 의해 모살된 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오고타이는 툴루이 사후에 자신의 제수씨이자 툴루이의 부인인 소르각타니 베키에게 자신의 아들과 결혼하라는 권유까지 해서 관계가 나빠졌다. 한반도에도 고대에는 형사취수제 같은 게 있었고 몽골에서는 당시까지도 남편이 죽은 이후라면 가능한 일이긴 했으나, 이런 풍습은 가장이 죽었을 때 미망인이 혼자 유족들을 부양하기 힘들어서 생긴 것인데 징기스칸의 며느리씩이나 되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없는 일이었므로 이건 그냥 동생 툴루이의 영지를 빼앗으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물론 의도를 알았던 소르칵타니 베키는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원조비사》에서도 형을 대신해 죽을 때 가족을 부탁하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모살 쪽에 더 무게가 실리긴 한다. 혹은 가족을 살려주는 대가로 자살을 강요받았을 수도 있다. 다만 술을 워낙 좋아해서 진짜로 술병 때문에 죽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4] 단언하기는 어렵다.
바투를 비롯한 주치의 일족이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와 갈등이 있었던 뒤로 툴루이의 아들 몽케를 밀어준 덕분에 차기 대칸은 툴루이의 후손들이 맡게 되었다. 훗날 원나라가 들어선 이후, 아들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예종(睿宗)'으로 추존되었다. 그리고 임시라고는 하나 어쨌든 2년간은 대칸 지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대칸이었던 인물로 꼽기는 한다.
칭기즈 칸은 생전에 본인의 후계자로 툴루이가 아닌 오고타이를 지목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나서 차기 대칸을 추대하는 쿠릴타이가 열렸는데 거기서 툴루이가 더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아버지의 뜻을 기억하고 있던 툴루이는 2년 동안 임시로 대칸의 권한을 행사하다가[1] 1229년의 쿠릴타이에서 형 오고타이가 신임 대칸으로 선출되도록 했다. 사실 본인의 세력이 오고타이보다 컸기 때문에 아버지의 유훈이고 뭐고 자기 아들처럼 경쟁자를 쓸어버리고 대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2]
금나라 원정[3]에서 공을 세웠지만 돌아오는 길에 병사했다. 죽음에 대해서는 오고타이 칸이 금나라 산천(山川)의 신들이 내린 저주를 받아 병이 들어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자신이 대역이 되어 형의 목숨을 살려주고 자신이 죽었다는 희생의 이야기가 《원조비사》에 남아 있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일단 술병이었다.
하지만 오고타이 가문과의 묘한 알력 때문에 일각에서는 오고타이 가문이나 숙부인 테무게 옷치긴 일파에 의해 모살된 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오고타이는 툴루이 사후에 자신의 제수씨이자 툴루이의 부인인 소르각타니 베키에게 자신의 아들과 결혼하라는 권유까지 해서 관계가 나빠졌다. 한반도에도 고대에는 형사취수제 같은 게 있었고 몽골에서는 당시까지도 남편이 죽은 이후라면 가능한 일이긴 했으나, 이런 풍습은 가장이 죽었을 때 미망인이 혼자 유족들을 부양하기 힘들어서 생긴 것인데 징기스칸의 며느리씩이나 되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없는 일이었므로 이건 그냥 동생 툴루이의 영지를 빼앗으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물론 의도를 알았던 소르칵타니 베키는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원조비사》에서도 형을 대신해 죽을 때 가족을 부탁하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모살 쪽에 더 무게가 실리긴 한다. 혹은 가족을 살려주는 대가로 자살을 강요받았을 수도 있다. 다만 술을 워낙 좋아해서 진짜로 술병 때문에 죽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4] 단언하기는 어렵다.
바투를 비롯한 주치의 일족이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와 갈등이 있었던 뒤로 툴루이의 아들 몽케를 밀어준 덕분에 차기 대칸은 툴루이의 후손들이 맡게 되었다. 훗날 원나라가 들어선 이후, 아들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예종(睿宗)'으로 추존되었다. 그리고 임시라고는 하나 어쨌든 2년간은 대칸 지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대칸이었던 인물로 꼽기는 한다.
- 황후(皇后): 현의장성황후 겁렬(케레이트)씨(顯懿莊聖皇后 怯烈氏) - 추존황후(追尊皇后)[5]
- 황비(皇妃): 내마진씨(乃馬眞氏)
- 8남: 발작 대왕(撥綽 大王)
- 황비(皇妃): 불명
- 차남: 홀도도 대왕(忽睹都 大王) - 생모미상(生母未詳)
- 3남: 미상(未詳) - 생모미상(生母未詳)
- 5남: 미상(未詳) - 생모미상(生母未詳)
- 9남: 말가 대왕(末哥 大王) - 생모미상(生母未詳)
- 10남: 세가도 대왕(歲哥都 大王) - 생모미상(生母未詳)
- 11남: 설별태 대왕(雪別台 大王) - 생모미상(生母未詳)
- 장녀: 노국대장공주 야속불화(魯國大長公主 也速不花) - 생모미상(生母未詳), 홍길랄 알진(弘吉剌 斡陳)에게 하가(下嫁)
- 차녀: 독목간 공주(獨木干 公主) - 생모미상(生母未詳), 홍길랄 섭고태(弘吉剌 聶古台)에게 하가(下嫁)
- 3녀: 조국공주 설불한(趙國公主 薛不罕) - 생모미상(生母未詳), 홍길랄 섭고태(弘吉剌 聶古台)에게 하가(下嫁)
- 4녀: 비치케 - 생모 오굴 카미시, 제찬규(諸燦圭)에게 하가(下嫁)
현대의 여러 매체를 보면 막내아들이었기에 칭기즈 칸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나온다.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징기스칸 4에서는 오리지널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등장한다. 잘못 쓴 게 아니라 진짜로. 왜냐하면 오리지널에서는 칭기스 칸의 적자로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이 셋만 사실장수로 등장하고 툴루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툴루이를 출현시키는 조건이 있는데 칭기즈 칸으로 플레이해서 왕비 보르테와 아들을 낳으면 아이 이름을 투루이라고 지으면 된다. 성인이 되어 아군에 합류하면 정치 63, 전투 92, 지모 73 특기는 농업/기동/돌격/복병인 아이가 나온다. 단 가공장수 취급인지라 열전에 '가공인물'이라고 뜨며 얼굴도 가공장수 얼굴이다. 그리고 칭기즈 칸이 죽고 '투루이'에게 후계한 뒤, 아들을 낳을 때 이름을 '몬케', '쿠빌라이', '흐라그'라고 지으면 역시 그 역사 속의 몽케, 쿠빌라이, 훌레구를 출연시킬 수 있다. 특히 쿠빌라이는 얼굴 CG도 사실장수 쿠빌라이 칸의 얼굴을 달고 나온다. 단 이들 모두 가공장수 취급.
파워업키트에서는 수정되어서 칭기즈 칸과 보르테 사이에서 나온 아이가 자동으로 '툴루이'로 명명되어 나오며, 전용 얼굴까지 따로 준비되어 있다. 추가 시나리오 3(1229년)에서는 위에 언급된 자기희생의 미담 이벤트를 보여주며 사망하는데, 이 이벤트 말미에 우구데이의 부인 투레게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이는 투레게네의 기본 초상화[6] 때문에 그런 것으로, 툴루이 모살설에 대한 내용이 이벤트 끝에 나올 때 트레게네도 등장한다.
《사조영웅전》에서는 주인공인 곽정과 의형제를 맺고 몽골 관련 에피소드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작중에선 출생년도가 늦춰져 1199년생으로 1200년생인 곽정보다 1살 많다. 《사조영웅전》이 우리나라에서 해적판인 《영웅문》 1부로 발매되었을 때, 이름이 한자를 우리나라식으로 적어 타뢰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후에 정발되면서 툴루이로 나온다.
슈토헬에서는 쌍둥이 형제가 있는 것으로 나오며 작전 도중 죽어서, 상속자를 필요로 하는 칭키즈 칸에 의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된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칭기즈 칸 사후인 1228년~1231년 사이로 연도를 돌리면 어째서인지 일 칸국의 초대 군주가 되어 있다.
|
[1] 툴루이가 임시 대칸으로 있던 도중에 서하가 멸망했다.[2] 겉보기와는 달리 칭기즈 칸 사후에 차기 대칸이 되려고 하지 않았나 여기는 이들도 있는데 임시로 맡은 군권을 안 내놓으려 했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몽골을 비롯한 유목 민족들은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 각자의 상속분을 챙겨 분가한 이후에 막내가 아버지의 남은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말자 상속에 대한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툴루이는 막내로 형들인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가 분가한 뒤 남아서 칭기즈 칸 사후에 후계를 잇게 되었다.[3] 이 원정은 1232년이었고, 금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건 1234년이었다.[4] 바로 윗형인 오고타이도 주벽이 상당히 심했다.[5] 휘는 '소르칵타니(Сорхагтани)' 였다.[6] 전용 초상화는 아니며 공용 초상화를 쓴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