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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문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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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1. 개요2. 상세

1. 개요[편집]

土們勘界
19세기 말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 초기에 이루어진 두 차례의 회담 등을 지칭한다. 이때 회담을 이끌던 사람을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라고 불렀다.

2. 상세[편집]

19세기 말 조선은 숙종때의 국경회담 이후로도 여러차례과 두만강 이북의 간도와 그 일대 지배권 및 영유권을 둘러싼 여러가지 문제로 국제적인 신경전이 이루어 졌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는 이러한 외교적 마찰을 여러차례 회담을 개최하면서 풀고자 하였다. 그리고 당시 고종은 조선 측 책임자 및 대표자로 덕원부사 이중하를 임명하였다. 이때 이중하가 맡았던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란 토문의 경계를 살피는 관리라는 뜻으로, 이 당시에 토문강의 발원지와 그 지류가 진행되는 방향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하겠다는 조선측의 주장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청나라는 이 당시 백두산에서 발원한[1] 토문강을 두만강의 별칭이였던, 이른바 '도문강'이라는 부분의 또다른 명칭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여 양국의 동북방 지역의 경계를 자국에게 유리한 최남단 지류였던 두만강으로 결정하려고 하였다.
한편 숙종 때 이후로도 조선은 국제적, 외교적, 정치적 환경 등 여러가지 요인들에 따라서 그 주장을 바꾸었다. 하지만 토문강의 발원지와 방향을 지금의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이거나 백두산 북쪽에 위치한 샘들을 기준으로 하여금 토문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자료들을 기준으로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 당시 동아시아 외교관계 속 '토문감계(土們勘界)'는 단순히 조선 측이 주장하는 관할권과 영토의 기준이 되는 물줄기를 국경의 기준으로 정하려고 하는 시도가 담긴 단어라고 보고있다.

[1] 조선의 주장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조선과 청나라 모두 토문강이 백두산이 발원지라는 사실은 그 뜻을 같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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