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올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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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올리나 Cicciolina | |
본명 | 슈털레르 일로너 언너(Staller Ilona Anna)[1] |
출생 | |
신체 | 168cm |
가족 | 제프 쿤스 (배우자) (1991년~1994년) 루드윅 막시밀리언 쿤스 (아들) |
직업 |
어려서 부친이 가족을 떠났기 때문에 모친이 재혼, 의붓아버지를 맞아들여 자랐다. 1964년경부터 모델일을 시작했고, 60년대 말부터는 호텔에서 메이드로 일하기도 했다고.[2]
1970년대에 결혼하면서 이탈리아로 이주. 거기에서 포르노 사진작가인 리카르도 스키키(Riccardo Schicchi)와 만나서 포르노 일을 시작하게 된다. 1973년에 라디오 쇼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고, 예명 치치올리나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영화에서 단역을 맡았지만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 그녀는 점차 수위를 높여나갔고, 결국 포르노 배우로써 명성과 인지도를 획득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결혼하면서 이탈리아로 이주. 거기에서 포르노 사진작가인 리카르도 스키키(Riccardo Schicchi)와 만나서 포르노 일을 시작하게 된다. 1973년에 라디오 쇼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고, 예명 치치올리나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영화에서 단역을 맡았지만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 그녀는 점차 수위를 높여나갔고, 결국 포르노 배우로써 명성과 인지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녀는 포르노 업계에서 일하면서도 별도로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79년 그녀는 이탈리아 최초의 녹색당인 '태양당(Lista del Sole)'의 후보로 공천되었다. 이 해가 그녀의 정계 입문 첫해가 된다. 이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 정계에 여성 정치인은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었고, 그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여성 정치인들 중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었다. 그후 NATO와 핵무기, 대마초 등에 대해서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급진당(Partito Radicale)' 으로[3] 이적, 1987년의 총선에 출마하여 2만 표 가량을 획득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녀의 임기 중에 걸프전이 터졌는데, 그녀는 사담 후세인이 평화를 선택한다면 그와 섹스하겠다는 등의 돌출발언으로 굉장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임기 후에 다시 당선되지는 못했다.
1991년 그녀는 업계동료인 모아나 포치(Moana Pozzi)와 함께 '애정당(Partito dell'Amore)을 창당, 매춘 합법화 등의 공약을 내걸고 정치활동을 지속하였다. 한쪽 유방을 드러내는 그녀 특유의 선거운동 방법이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 이르러서는 또 사담 후세인에게 대량살상무기 시찰을 받는 조건으로 섹스해 주겠다는 발언을 했다(...). 2006년에는 오사마 빈 라덴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1991년 그녀는 업계동료인 모아나 포치(Moana Pozzi)와 함께 '애정당(Partito dell'Amore)을 창당, 매춘 합법화 등의 공약을 내걸고 정치활동을 지속하였다. 한쪽 유방을 드러내는 그녀 특유의 선거운동 방법이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 이르러서는 또 사담 후세인에게 대량살상무기 시찰을 받는 조건으로 섹스해 주겠다는 발언을 했다(...). 2006년에는 오사마 빈 라덴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1989년에 치치올리나는 또 한 번의 인생의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키치 예술가인 제프 쿤스(Jeff Koons)의 작품 <메이드 인 헤븐> 작품에서 제프 쿤스와 치치올리나는 자신들의 성행위를 사진으로 찍어 작품으로 만들었고, 두 사람은 예술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스타가 되었다. 그들이 포르노를 예술에 도입한 첫 사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프 쿤스 정도의 예술가가 자기 스스로를 대상으로 그러한 것을 한 적은 없었다. 이후 제프 쿤스는 침체기는 있었지만, 이때 얻은 악명을 통해 스타 예술가이자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1991년에는 제프 쿤스와 재혼까지 하였지만, 결국 결혼은 3년도 채 못 가서 파탄났고[4], 치치올리나는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인 루트비히 막시밀리안(Ludwig Maximilian)의 양육권을 놓고 제프와 법적 투쟁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하지만 이혼 후 치치올리나는 아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가버렸기 때문에 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그러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1991년에는 제프 쿤스와 재혼까지 하였지만, 결국 결혼은 3년도 채 못 가서 파탄났고[4], 치치올리나는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인 루트비히 막시밀리안(Ludwig Maximilian)의 양육권을 놓고 제프와 법적 투쟁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하지만 이혼 후 치치올리나는 아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가버렸기 때문에 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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