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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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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천도교 투명
동학 · 천도교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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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
초대
2대
3대
4대
교령
초대
2대
3대
4대
정광조
공탁
5대
6-10대
11-15대
16대
신용구
김명진
17대
17-19대
20-21대
22대
이우영
이영복
고정훈
정운채
23-24대
25-26대
27대
28대
김재중
김광욱
김철
29대
30대
31대
32대
이철기
한광도
김동환
임운길
33대
34대
35대
36대
박남수
송범두
박상종
제2대 동학 교조
최시형
崔時亨
최시형
초명
최경상(崔慶翔)
이명
최갑대(崔甲大)
출생
사망
1898년 6월 2일 (향년 71세)
한성부 중서 정선방 대묘동계 묘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3]
본관
경오(敬悟) 또는 경상(景祥)
해월(海月)
비고
동학의 2대 교주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종교 사상가이자 동학의 제2대 교주.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출신으로 최제우와 동향(同鄕) 사람이다.

2. 생애[편집]

1827년 3월 21일 경상도 경주부 경주읍내 황오방(현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에서 빈농인 아버지 최종수(崔宗秀)와 어머니 경주 배씨 사이의 1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5]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2살 때 아버지까지 여의어 계모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한때 조지소에서 종이를 만드는 노동을 하다가 1861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교하였다. 입교할 당시 최시형은 머슴으로 생계를 잇는 처지였는데 최제우가 철저하게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골랐음을 보여주는 대목. 1864년 제1대 교주 최제우가 조정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자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어 신도들을 이끌었다.

이후 태백산에 은신하며 포교 활동을 하였고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강원도 울진현 등의 고을을 돌며 포교하다가 소백산에 은신하였다. 1892년 교조의 신원, 동학 활동의 자유, 포교 활동의 자유 등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요구하였으며 1893년 한양으로 올라와서 동학 대표 40명을 통해 당시 임금 고종 앞에서 통곡하며 청원하여 고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으나 시행되지 않자 충청북도 보은에서 척왜 운동, 포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운동 등을 벌였다. 이후 조정에서 충청도 관찰사 등을 해임하자 최시형도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

1894년 전라북도 고부의 접주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 계획에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전봉준, 손병희 등이 계속해서 간청하고 따르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들불처럼 번지자 동참하고 지지를 표하며 활동하였다. 1895년 전봉준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자 충청남도 논산에서 남접군과 합세하여 관군 및 일본군과 공주에서 교전을 벌였으나 참패하고 장수에서도 패배하자 몸을 숨겼다. 1898년 강원도 원주군에 머물던 중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호매곡면 송곡리(현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에서 체포되었고 한성부에 압송된 뒤 그 해 한성부 중서 정선방 대묘동계 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1898년 6월 2일 교수형에 처해졌다.[6][7]

1907년 7월 11일 한성부 남서 미동에 사는 박형채(朴衡采)의 청원으로 고종의 윤허를 받아 최제우와 함께 신원이 회복되었다.#

3. 기타[편집]

  • 손병희의 여동생 손조이(孫召史)와 결혼하여 장남 최동희, 차남 최동호를 낳았다. 두 아들은 후에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손자 최익환(崔益煥)(1913. 3.19.~1999. 6.14.) 또한 천도교 종법사를 지냈다. 외손자인 정순철은 국민동요 짝짜꿍, 졸업식 노래 등을 작곡했다.
  • 1865년에서 1871년까지 은거지로 가졌던 영양 일월산에 추정 흔적이 발견되었다.#
  • 노년기 모습이 담긴 사진이 2장 남아 있는데, 사실 이는 같은 날, 정확히는 최시형의 처형 직전 대한제국에 주재하던 주한 러시아 공사 니콜라이 G. 마튜닌(Николай Гавлирович Матюнин 1849.12.2~1907.5.18)이 촬영한 것들이다. 몇 초 간격으로 촬영되어 최시형의 오른손의 위치가 다른 것 외에 기본적인 차이는 없으며,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져 발이 퉁퉁 붓고 혼자 서는 것은 커녕 앉아 있는 것조차 버거워하여 앉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받쳐줘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1년 개봉한 영화 <개벽>에서는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

여담으로 위의 이 유이한 작품 속 배역을 맡은 두 사람은 각기 10년을 사이로 두는 KBS1 주말에 한 사극 무인시대에서 이의민과 책사 두두을 역으로 호흡을 같이 하였다.

[1] 이곳에는 외가가 있었으며, 본가는 경주부 경주읍성 북문밖 북성건(현 경주시 성건동)에 있었다.#[2] 출생지 227번지 부근의 229번지에 천도교 경주교구가 있다.#[3] 지금의 단성사빌딩 앞에서 사형되었다.#[4] 관가정공파 27세.#[5] <경주 최씨 대동보> 7권 464쪽에는 아버지 최종수에게 부인으로 연일 정씨만 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6] 최시형을 포함하여 정식으로 재판받은 동학군 지도부 인사 전원은 서양식으로 바뀐 형벌 제도에 따라 교수형을 받았다. 참수 및 화형 등은 언제까지나 양반 혹은 지역 관료들이 사적으로 행한 것을 조정이 묵인한 것에 불과하다.[7] 아이러니한 점은 이 때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한 판사가 고부 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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