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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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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
장사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長沙大韓民國臨時政府廳舍
창사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터
위치
후난 성 창사시 카이푸구 시위안베이리 2호
1. 개요2. 상세
2.1. 창사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전시관 (조선혁명당 본부)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중국 후난 성 창사시에 두었던 정부청사이다.

2. 상세[편집]

1937년 12월 중일전쟁에서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이 함락 당하자 전장시난징시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1937년 11월 말부터 난징을 빠져 나와 후난성 창사시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1938년 7월 광저우로 이동하기까지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임시정부는 당시 김구와 친교가 있던 후난성 주석인 장즈중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창사시로 위치를 옮겼다. 그 덕분에 임시정부는 서원북리 6호에 비교적 큰 건물에 정부 청사를 마련하게 되었다.출처
오늘날에는 임시정부의 청사였다는 표지나 증거는 따로 남겨져 있지 않으며 민가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장사임시정부청사에 대해 독립운동가와 현지 전문가 사이에서 상반된 해석을 하고 있어 명확한 장소를 비정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남목청에 장사대한민국임시정부활동구지 기념관을 설치하여 당시 임시정부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2.1. 창사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전시관 (조선혁명당 본부)[편집]

창사대한민국임시정부활동구지
위치
후난 성 창사시 연승가 남목청향6호
민족혁명당에 참여했던 지청천 세력은 의열단사회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갖게 된다. 이에 비판을 가하던 지청던이 제명되면서 조선혁명당을 만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이후 이 곳을 조선혁명당 본부로 사용하면서 김구한국국민당(1935년), 조소앙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간의 통합 운동이 일어난다. 1938년 5월 세 당의 통합을 의논하기 위해 열린 회의에서 조선혁명당 출신의 이운한이 김구를 저격하는 남목청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현재의 기념관은 2007년 창사시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에 복원하여 정식으로 개관을 하였다. 김구 선생님의 흉상과 휘호,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하였던 집무실, 여러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최근 이 지역은 문화의 거리로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주변 경관이 상당히 변화되었다. 그로 인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잠시 임시 휴관 상태였으며 재개관 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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