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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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입종 갈문왕의 왕비 지소부인 | 只召夫人 | |
신라 법흥왕의 왕녀 김지소 | 金只召 | |
이름 | |
출생 | 520년경[4] |
사망 | 574년 이후[5] |
본관 | |
부왕 | |
모후 | |
부군 | |
자녀 | |
시호 | 지소부인(只召夫人) |
이칭 | 지소태후(只召太后) /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6]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좀 다른데 삼국사기에서는 법흥왕과 보도부인(保刀夫人)의 딸이며, 법흥왕의 동생, 즉 자신의 삼촌인 김입종과 혼인하여[7] 삼맥종(훗날의 진흥왕)과 숙흘종을 낳았다.
그리고 진흥왕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섭정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다르게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지소태후라고 집어서 말한 게 아니라 그저 왕태후가 섭정했다고만 되어 있어서 이 태후가 전 왕비인 보도부인인지 어머니 지소부인인지 불확실하게 서술되어 있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에서는 섭정하는 태후를 가리켜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 갈문왕의 비(妃)라고 하여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학계에서 위서로 보는 필사본 화랑세기는 애초에 '지소태후'라고 서술했다.
부여태후를 제외하면 한국사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여성의 섭정 기록인데, 단순히 진흥왕의 어머니일뿐 아니라 법흥왕의 딸이기도 하다는 점이 그녀가 직접적으로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된 것 같다.
어쨌든 기록에선 진흥왕의 즉위 시점에 섭정했다는 것이 끝이고 따라서 언제 섭정을 거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진흥왕이 12세가 되던 545년에 진흥왕이 직접 명령을 내려 국사를 편찬한 기록이 있는만큼 이 시점에서 진흥왕의 친정이 이루어지고 지소태후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진흥왕이 연호를 바꾼 551년에 섭정을 거뒀다고 본다.
울산광역시에 있는 울주 천전리 각석에 남아있는 신라시대 방명록 중 지소태후가 남긴 것도 두 개 있는데[8] 남편 입종 갈문왕과 찾아온 것과 훗날 남편이 죽은 뒤 어린 아들 삼맥종을 데리고 옛날 남편의 흔적이 있는 곳에 다시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임종하기 전 불교식으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왕실의 어른인 태후이자 성골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삭발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 많은 왕실 인물들이 그렇듯, 지소태후도 생몰년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진흥왕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섭정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다르게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지소태후라고 집어서 말한 게 아니라 그저 왕태후가 섭정했다고만 되어 있어서 이 태후가 전 왕비인 보도부인인지 어머니 지소부인인지 불확실하게 서술되어 있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에서는 섭정하는 태후를 가리켜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 갈문왕의 비(妃)라고 하여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학계에서 위서로 보는 필사본 화랑세기는 애초에 '지소태후'라고 서술했다.
부여태후를 제외하면 한국사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여성의 섭정 기록인데, 단순히 진흥왕의 어머니일뿐 아니라 법흥왕의 딸이기도 하다는 점이 그녀가 직접적으로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된 것 같다.
어쨌든 기록에선 진흥왕의 즉위 시점에 섭정했다는 것이 끝이고 따라서 언제 섭정을 거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진흥왕이 12세가 되던 545년에 진흥왕이 직접 명령을 내려 국사를 편찬한 기록이 있는만큼 이 시점에서 진흥왕의 친정이 이루어지고 지소태후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진흥왕이 연호를 바꾼 551년에 섭정을 거뒀다고 본다.
울산광역시에 있는 울주 천전리 각석에 남아있는 신라시대 방명록 중 지소태후가 남긴 것도 두 개 있는데[8] 남편 입종 갈문왕과 찾아온 것과 훗날 남편이 죽은 뒤 어린 아들 삼맥종을 데리고 옛날 남편의 흔적이 있는 곳에 다시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임종하기 전 불교식으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왕실의 어른인 태후이자 성골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삭발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 많은 왕실 인물들이 그렇듯, 지소태후도 생몰년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1]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2] 召는 조선 시대에 기혼 여성의 이름으로 흔히 보이는 조이(召史)를 축약해 표기한 것일 수 있다.[3]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4] 진흥왕의 생년으로 단지 추측할 뿐이다.[5] 574년에 불국사를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6] 몰(沒)을 수(須)로 판독하기도 한다. 둘 다 소(炤)의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7] 현대 기준으로는 근친상간에 개족보지만, 고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한참 뒤 500여년이 지난 고려시대에도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곧잘 이루어졌다.[8] 이름은 아마 본명일 '지몰시혜(只没尸兮)'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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