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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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진 鄭尙鎭[1] Юрий Данилович Те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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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국적 | |
직업 | 군인, 정치인 |
직업 | |
학력 | 소련 크즐오르다 사범대 노문학부 학사 |
가족 | 배우자, 슬하 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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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해외순방 당시 정상진 |
8.15 광복 후 1945년 9월 19일에 소련 정치부의 지시로 원산항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마중했다. 그는 '김성주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김일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소련 정치부에 김일성은 없었다고 보고하면서 그가 김일성임을 알았다고 한다.
소련의 정책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 러시아 어문학과 학과장직과 문학 및 예술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6.25 전쟁 당시에는 조선인민군 병기총국 부국장을 지내다가 1952년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급)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7년에 숙청되었는데 이유는 최승희, 홍명희 같은 인물들을 비호했다는 것이었다. 숙청 후 소련 국적자였으므로 살해되진 않고 소련으로 귀국했는데 타쉬켄트의 고급당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61년 크즐오르다와 알마티의 레닌기치(고려일보) 편집부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1991년 소비에트 한인재단의 이사장, 1992년부터는 북한민주화 및 해방 재단의 이사장직을 겸임했다. 1989년부터 여러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좌우대립 상황에서 소련의 정책, 김일성 관련 등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 역시 북한 공산정권의 성립에 가담했지만 김일성에게 숙청된 후엔 반북주의자가 됐으며 소련 붕괴 후엔 대놓고 반북 활동을 했는데 대한민국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 회원으로 참여하고 북한 민주화에 대해 자문 활동을 하기도 했다.
후술랑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조선 독립을 강조하며 그를 조선어 학교에 보낼 정도로 민족주의 정신이 있던 아버지가 대숙청 당시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이게 '소수민족의 자유'를 강조하던 레닌의 소련이 맞냐, 소련은 1937년에 망했다는 식으로 굉장히 분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일단 소련의 정책에 맞춰 가면서 활동했지만 1991년 소련이 무너질 때는 소련 자체의 존속보단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민주화된 느슨한 연방체제'로의 전환을 원했다고 한다.
따라서 소련의 내부 사정을 폭로하거나 북한 민주화를 돕는 것이 본인의 기존 신념이나 행적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늦게나마 기회가 오자 자신의 신념에 상당히 충실하게 행동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전쟁 정상진](http://i.namu.wiki/i/0SPnAzKrYHaVSFpcPi0Ke55uiux4w9OnQryQr_VYnWQ0SHl4s6-_pwzg6r6iqeY1JfqZTe96AFhNKHZZyZ2kuxWL0-Atb0rErHnq7YsOOmGFoNICddqlBxaDSeuGdAfXwydUmetoHs6rJfrq-eAn5Q.webp)
2010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 나와 증언하는 모습.
2013년 6월 15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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