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숙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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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의 왕녀 의숙공주 | 懿淑公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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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숙공주와 정현조의 합장묘 전경 | |
출생 | |
사망 | |
묘소 | |
재위기간 | 조선 의숙공주 |
의숙공주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세조는 수양대군이었다. 1453년(단종 1) 정인지의 차남 정현조와 혼인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455년(세조 1)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의숙공주가 되었고, 정현조 또한 하성위에 책봉되었다.[1]
그러나 1477년(성종 8) 의숙공주가 37세의 나이로 슬하에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났고, 정현조는 사족 출신 이징(李徵)의 딸과 다시 혼인하여 9남 1녀를 보았다. 이때문에 문제가 되었는데, 나중에 이들이 과거 시험을 보고자 한 것이다. 1510년(중종 5) 부인 이씨가 자식들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성종 시절에 이미 첩으로 간주하였다고 하여 응시 자격이 없다고 재확인하였다.[2]
이것은 모두 정현조의 잘못이었는데, 공주가 죽고 정희왕후에게 "양첩에게 장가가겠다"고 말하여 허락받고 이징의 딸을 속여서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금방 들통나 정현조는 성종의 꾸중을 들었는데, 중종은 '정희왕후를 속인 죄'로 끝까지 이징의 딸을 정실 부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성종은 의숙공주의 제사를 주관하고 명복을 비는 사찰로 정토사(淨土寺)[3]를 지정하였다. 그런데 명종 대에 이르러, 유생들이 정토사에서 소란을 피우자 이 절은 보통의 절이 아니라 하여 해당 유생들의 과거 응시를 금지 시킨 일이 있다.[4]
그러나 1477년(성종 8) 의숙공주가 37세의 나이로 슬하에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났고, 정현조는 사족 출신 이징(李徵)의 딸과 다시 혼인하여 9남 1녀를 보았다. 이때문에 문제가 되었는데, 나중에 이들이 과거 시험을 보고자 한 것이다. 1510년(중종 5) 부인 이씨가 자식들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성종 시절에 이미 첩으로 간주하였다고 하여 응시 자격이 없다고 재확인하였다.[2]
이것은 모두 정현조의 잘못이었는데, 공주가 죽고 정희왕후에게 "양첩에게 장가가겠다"고 말하여 허락받고 이징의 딸을 속여서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금방 들통나 정현조는 성종의 꾸중을 들었는데, 중종은 '정희왕후를 속인 죄'로 끝까지 이징의 딸을 정실 부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성종은 의숙공주의 제사를 주관하고 명복을 비는 사찰로 정토사(淨土寺)[3]를 지정하였다. 그런데 명종 대에 이르러, 유생들이 정토사에서 소란을 피우자 이 절은 보통의 절이 아니라 하여 해당 유생들의 과거 응시를 금지 시킨 일이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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