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베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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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이름 | 에드워드 프랜시스 베일리 Edward Francis Baily | |
출생 | ||
사망 | ||
국적 | ||
포지션 | 인사이드 포워드 | |
신체조건 | 170cm | 69kg | |
소속팀 | 선수 | |
지도자 | 토트넘 홋스퍼 (1963~1974 / 수석코치) | |
국가대표 | 9경기 5골 (잉글랜드 / 1950~1952) |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
베일리는 1938년에 토트넘과 유스 계약을 맺었고 이 당시의 그는 크리켓 경기도 하면서 인쇄 회사와 주식 중개 회사에서도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베일리는 왕립 스코틀랜드 소총병대 소속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베일리의 소속팀 토트넘은 베일리가 실종된 줄 알고 베일리의 선수 등록을 취소했다. 그러나 베일리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그는 자신이 소속된 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첼시와 아마추어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베일리는 후에 토트넘의 감독이 될 지미 앤더슨과 우연히 만난 후 토트넘이 첼시에 양해를 구해 다시 토트넘의 선수가 될 수 있었다.
1947년 1월 19일, 베일리는 웨스트 브롬위치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1949-50 시즌에 토트넘이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승격하고 다음 해에 1부 리그 첫 우승을 달성할 때 베일리는 토트넘의 푸시 앤드 런 전술의 주축 선수가 되어 있었다. 1952년 4월 2일에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허더스필드 타운전에서 베일리는 심판을 맞춰 코너킥을 얻어내는 행위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51년의 우승 이후 토트넘의 순위는 내리막을 탔고 1954-55, 1955-56 시즌에는 강등권에 위치했다. 베일리의 토트넘 생활은 1956년 1월에 끝났고 그는 포트 베일에 7천 파운드로 이적했다. 베일리는 포트 베일에서 27경기 8골로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남겼지만 그의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포트 베일에서 오래 있지 못했다. 그는 같은 가격으로 그해 10월에 노팅엄 포레스트로 재판매되었고 그해 노팅엄의 1부 리그 승격에 힘을 보탰다.
노팅엄은 1958년에 10위를 기록하며 1부 리그에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베일리는 노팅엄에서 14골을 넣었다. 하지만 그는 1958년 12월에 레이턴 오리엔트로 팀을 옮겼고 그곳에서 은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베일리는 왕립 스코틀랜드 소총병대 소속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베일리의 소속팀 토트넘은 베일리가 실종된 줄 알고 베일리의 선수 등록을 취소했다. 그러나 베일리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그는 자신이 소속된 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첼시와 아마추어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베일리는 후에 토트넘의 감독이 될 지미 앤더슨과 우연히 만난 후 토트넘이 첼시에 양해를 구해 다시 토트넘의 선수가 될 수 있었다.
1947년 1월 19일, 베일리는 웨스트 브롬위치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1949-50 시즌에 토트넘이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승격하고 다음 해에 1부 리그 첫 우승을 달성할 때 베일리는 토트넘의 푸시 앤드 런 전술의 주축 선수가 되어 있었다. 1952년 4월 2일에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허더스필드 타운전에서 베일리는 심판을 맞춰 코너킥을 얻어내는 행위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51년의 우승 이후 토트넘의 순위는 내리막을 탔고 1954-55, 1955-56 시즌에는 강등권에 위치했다. 베일리의 토트넘 생활은 1956년 1월에 끝났고 그는 포트 베일에 7천 파운드로 이적했다. 베일리는 포트 베일에서 27경기 8골로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남겼지만 그의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포트 베일에서 오래 있지 못했다. 그는 같은 가격으로 그해 10월에 노팅엄 포레스트로 재판매되었고 그해 노팅엄의 1부 리그 승격에 힘을 보탰다.
노팅엄은 1958년에 10위를 기록하며 1부 리그에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베일리는 노팅엄에서 14골을 넣었다. 하지만 그는 1958년 12월에 레이턴 오리엔트로 팀을 옮겼고 그곳에서 은퇴했다.
베일리는 당대 최고급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평가받았으며 눈부신 기술과 예리한 패스, 생각과 움직임이 매우 빠르다는 평이 있었다.
베일리는 1952년 12월 엘시와 결혼, 아들 그레이엄과 딸 제인을 두었다.
- 잉글랜드 디비전 1 우승 1회: 1950-51(토트넘 홋스퍼 FC)
- 잉글랜드 디비전 2 우승 1회: 1949-50(토트넘 홋스퍼 FC)
- 잉글랜드 디비전 1 준우승 1회: 1951-52(토트넘 홋스퍼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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