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카 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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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사다오 山中貞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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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山中貞雄[1] (야마나카 사다오) | ||||||||
국적 | |||||||||
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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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흡사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라울 월시, 혹은 킹 비더가 일본에서 영화를 만든 것처럼 놀라우리만치 생동감이 넘친다. (...)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세상은 그를 미조구치 겐지보다 더 깊이 존경하고, 오즈 야스지로보다 더 크게 사랑하고,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보다 그의 영화 앞에 더 자주 경탄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영화 감독.
야마나카는 1909년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고작 18세의 나이로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초기에 각본가로 활동하던 그는 빠른 속도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1932년부터는 직접 연출을 맡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들은 다수가 시대극 장르에 속해 있었으며, 초기에는 여타 일본 영화들처럼 무성 영화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1937년 <인정 종이풍선>의 제작을 마친 후 징집당해 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에 배치되게 된다. 그곳에서 수인성 전염병에 걸리게 된 그는 1938년 고작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2] 1937년까지 영화 27편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대다수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1937년 <인정 종이풍선>의 제작을 마친 후 징집당해 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에 배치되게 된다. 그곳에서 수인성 전염병에 걸리게 된 그는 1938년 고작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2] 1937년까지 영화 27편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대다수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 <백만 냥의 항아리> (1935)
- <고치야마 소슌> (1936)
- <인정 종이풍선>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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