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라한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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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라한[1] 칸국 حاجی ترخان خانلغی Хаҗитархан Ханлыгы | ||
1466~1556 | ||
위치 | 볼가 강 하류 인근 | |
정치체제 | ||
국가원수 | ||
타타르어, 노가이어 | ||
종족 | 타타르족, 노가이족 | |
성립 이전 | ||
멸망 이후 |
킵차크 칸국이 내부 분열과 쇠퇴를 겪자 15세기 중반 크림 칸국, 카잔 칸국 등과 함께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킵차크 칸국의 대칸 쿠축 무함마드의 손자 카심 1세(قاسم بن محمود)를 시조로 한다.
아스트라한은 동서방 교역로 사이에 위치한 도시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개 무역으로 번성했던 곳이었다. 카심 1세의 뒤를 이은 압둘 카림(عبد الکریم) 재위 이후 아스트라한 칸국은 지리적 이점을 잘 이용해 칸국을 통과하는 유목민들과의 무역을 번성시킴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서 교역로 사이에 위치했다는 것은 때로 부작용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는데, 바로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이었다. 아스트라한 칸국은 대부분이 튀르크 계열 유목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외부와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국가의 지도자인 칸 대신 각기 부족장들이 나섰기 때문에 중앙 정부의 권력이 꽤나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삼는 일종의 도시 국가에 가까웠기 때문에 국력이 크림 칸국이나 모스크바 대공국에도 미치지 못했다.
16세기 초부터 격화된 칸위 다툼으로 인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크림 칸국과 노가이 칸국의 침공으로 국력을 상당히 소모했다. 게다가 1552년 카잔 칸국을 점령한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가 1556년을 군대를 이끌고 아스트라한에 쳐들어왔고 끝내 루스 차르국에 병합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아스트라한은 동서방 교역로 사이에 위치한 도시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개 무역으로 번성했던 곳이었다. 카심 1세의 뒤를 이은 압둘 카림(عبد الکریم) 재위 이후 아스트라한 칸국은 지리적 이점을 잘 이용해 칸국을 통과하는 유목민들과의 무역을 번성시킴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서 교역로 사이에 위치했다는 것은 때로 부작용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는데, 바로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이었다. 아스트라한 칸국은 대부분이 튀르크 계열 유목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외부와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국가의 지도자인 칸 대신 각기 부족장들이 나섰기 때문에 중앙 정부의 권력이 꽤나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삼는 일종의 도시 국가에 가까웠기 때문에 국력이 크림 칸국이나 모스크바 대공국에도 미치지 못했다.
16세기 초부터 격화된 칸위 다툼으로 인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크림 칸국과 노가이 칸국의 침공으로 국력을 상당히 소모했다. 게다가 1552년 카잔 칸국을 점령한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가 1556년을 군대를 이끌고 아스트라한에 쳐들어왔고 끝내 루스 차르국에 병합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하자르 칸국의 수도 아틸은 오늘날 아스트라한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지점의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다.
이주엽, 『몽골제국의 후예들』, 책과함께, 2020.
[1] 타타르어로 하지타르한(Xacitarxan, حاجی ترخان). 타타르어의 җ는 /dʒ/ 발음이 난다. 오늘날에는 애스테르한(Ästerxan)으로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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