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스틴 바바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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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1978년 출생
- 나이지리아의 축구선수
- RSC 안데를레흐트/은퇴, 이적
- 첼시 FC/은퇴, 이적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로스앤젤레스 갤럭시/은퇴, 이적
- 나이지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2000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가나/나이지리아 참가 선수
- 2002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말리 참가 선수
- 2004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튀니지 참가 선수
- 나이지리아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2000 시드니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나이지리아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1993 FIFA U-17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 일본 참가 선수
나이지리아의 前 축구선수 | |
이름 | 셀레스틴 바바야로 Celestine Babayaro |
본명 | 셀레스틴 보이드 존토 히치스 바바야로 Celestine Boyd Jonto Hycieth Babayaro |
출생 | |
국적 | |
신체 조건 | |
직업 | |
소속팀 | 플래토 유나이티드 (1994 / 유스) RSC 안데를레흐트 (1994~1997) 첼시 FC (1997~200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8)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2008) |
국가대표 | 27경기 (나이지리아 / 1995~2004) |
자국의 플래토 유나이티드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1994년 RSC 안데를레흐트에 입단하여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내며 16살의 나이에 1군에서 레귤러 멤버로 활약하였다. 안데를레흐트에서 활약하는 동안 상당한 재능을 보이며 벨기에 올해의 영 플레이어 상을 두번이나 수상했고, 1996년에는 벨기에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흑인 선수들에게 수여하는 에보니슈를 수상했다.
참고로 그는 1994년 11월,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라운드 경기에 출전하면서 UCL 최연소 출전 선수(16세 87일)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다 2020년 12월 7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소속인 유수파 무코코(16세 18일)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조별라운드 경기에서 후반 13분 펠릭스 파슬라크 대신 교체투입되며 26년만에 경신되었다. 또한 최연소 선발 출전 기록 또한 2023년 10월 4일 FC 바르셀로나의 라민 야말이 16세 83일로 기록을 경신했다.
참고로 그는 1994년 11월,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라운드 경기에 출전하면서 UCL 최연소 출전 선수(16세 87일)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다 2020년 12월 7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소속인 유수파 무코코(16세 18일)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조별라운드 경기에서 후반 13분 펠릭스 파슬라크 대신 교체투입되며 26년만에 경신되었다. 또한 최연소 선발 출전 기록 또한 2023년 10월 4일 FC 바르셀로나의 라민 야말이 16세 83일로 기록을 경신했다.
2005년 1월, 8년간 이어진 첼시 생활을 마무리하고 뉴캐슬에 입단하였다. 그동안 첼시에서 보여준 모습에 많은 뉴캐슬 팬들이 기대했으나, 첫 시즌부터 악명높은 3B[3]의 일원으로서 수준 이하의 수비력을 선보이며 팬들에게 끔찍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골키퍼 셰이 기븐의 성장을 견인했다. 자세한 내용은 3B 항목 참조.
당연히 다음 시즌부터는 벤치로 쫒겨났으며, 이후 잦은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되자 뉴캐슬은 2007년 12월 초에 2010년까지 예정된 주급을 모두 일시불로 주는 조건으로 그를 방출시켰다. 구단이 얼마나 바바야로를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당연히 다음 시즌부터는 벤치로 쫒겨났으며, 이후 잦은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되자 뉴캐슬은 2007년 12월 초에 2010년까지 예정된 주급을 모두 일시불로 주는 조건으로 그를 방출시켰다. 구단이 얼마나 바바야로를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2008년 1월 21일, 뉴캐슬에서 쫒겨나다시피 나온 바바야로는 LA 갤럭시에 입단하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3월 3일, LA 갤럭시의 방한으로 추진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FC 서울과의 친선전에서 박스 안 파울로 경고를 받고 PK를 내주는 등 3B 시절을 연상케하는 수비력을 선보이며 하프타임 후 교체되었으며, 이 경기를 끝으로 두 달만에 시즌도 치러보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사실 이러한 결정은 이유가 있었다. 이전부터 바바야로는 자신을 향한 대우에 큰 불만을 품으며[4] 프리시즌 기간동안 훈련과 경기를 불성실하게 참여하는 행동을 보이면서 뤼트 휠릿 감독과 알렉시 랄라스 단장을 포함한 팀 수뇌부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였는데, 매 경기 수준 이하의 경기력까지 선보이자 실력과 태도 모두 불량한 그를 더이상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계약해지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후 한동안 팀을 구하지 못한 채 무직상태로 지내다가 2010년 7월 8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한때 최고의 윙백 유망주로 평가받았던 선수치고는 너무나도 쓸쓸한 퇴장이었다.
사실 이러한 결정은 이유가 있었다. 이전부터 바바야로는 자신을 향한 대우에 큰 불만을 품으며[4] 프리시즌 기간동안 훈련과 경기를 불성실하게 참여하는 행동을 보이면서 뤼트 휠릿 감독과 알렉시 랄라스 단장을 포함한 팀 수뇌부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였는데, 매 경기 수준 이하의 경기력까지 선보이자 실력과 태도 모두 불량한 그를 더이상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계약해지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후 한동안 팀을 구하지 못한 채 무직상태로 지내다가 2010년 7월 8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한때 최고의 윙백 유망주로 평가받았던 선수치고는 너무나도 쓸쓸한 퇴장이었다.
은완코 카누, 제이제이 오코차 등과 함께 나이지리아의 황금세대 일원으로서 1993년 FIFA U-17 세계 축구 선수권 우승과 1996년 하계 올림픽 금메달을 기여하였다. 나이지리아 성인 대표팀에는 1995년 처음으로 발탁되어 1998 FIFA 월드컵, 2002 FIFA 월드컵에 참가하였고, 2004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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