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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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가문인데 쓰러진 새한그룹 이야기 |
1973년에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가 왕자의 난 실패로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 마그네틱 미디어와 합작해 창업한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가 기원이다. 초기에는 카세트 테이프로 시작해 1975년에 '(주)미디어'를 거쳐 1977년 '새한전자'로 사명을 바꾸며 '새한' 사명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정식 귀국한 1979년에는 미국측 지분을 사서 토종 기업으로 변모시켜 기록매체 중심으로 내실을 다졌으며, 1985년 공기업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부터 충주 비료공장을 사들여 옥사이드공장으로 고쳐 화학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1988년 새한미디어 충주공장 화재로 시련을 겪었고, 공장 재건 직후인 1991년 이창희 회장이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아내 이영자[1]가 회장을 맡아 이듬해 미국 GMS사를 인수했고, 새한이동통신을 세워 무선호출 사업에 진출한 뒤 1994년에 황성통운도 인수해 물류업에도 손을 뻗었다. 1995년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합섬을 넘겨받고[2] 1997년에 노사화합 및 새 영문 CI 선포 후 그룹 출범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여 1998년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지정돼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순위 20위 중반대의 반열에 올렸지만, 무리한 차입을 통해 사업 확장에 나섰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988년 새한미디어 충주공장 화재로 시련을 겪었고, 공장 재건 직후인 1991년 이창희 회장이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아내 이영자[1]가 회장을 맡아 이듬해 미국 GMS사를 인수했고, 새한이동통신을 세워 무선호출 사업에 진출한 뒤 1994년에 황성통운도 인수해 물류업에도 손을 뻗었다. 1995년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합섬을 넘겨받고[2] 1997년에 노사화합 및 새 영문 CI 선포 후 그룹 출범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여 1998년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지정돼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순위 20위 중반대의 반열에 올렸지만, 무리한 차입을 통해 사업 확장에 나섰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주력인 비디오테이프와 섬유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상태에서 1997년 외환 위기가 발생한 직후인데도 1조원이 넘는 시설투자를 감행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으며, 경험이 부족한 오너 2세[3][4]의 독단적이고 비상식적인 경영행태, 보신주의에 젖은 일부 전문경영인들도 그룹 몰락에 일조했다. 2000년 계열사 전체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이창희 일가는 경영권을 내놓았고, 계열사들은 채권단 관리 하에 전부 제3자에 매각되었다.
새한그룹의 주된 사업이 비디오테이프, 섬유산업 등등이 사양길에 접어든 상태에서, 그나마 살아남을 길이 비디오테이프, 섬유산업 등등의 비중을 줄이고 당시 있던 계열사들 중 그룹 내에서 그나마 전망이 있던 엔터테인먼트, 반도체 등을 주력으로 바꿨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CJ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 삼성에서 반도체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IMF 위기를 넘겼더라도 친척 기업들과 경쟁을 이어가야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금력이나 인맥 등에서 CJ와 삼성에 비해 열세인 새한이 더 불리하고 친척들끼리 동종업계에서 경쟁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친척들의 지원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새한그룹의 주된 사업이 비디오테이프, 섬유산업 등등이 사양길에 접어든 상태에서, 그나마 살아남을 길이 비디오테이프, 섬유산업 등등의 비중을 줄이고 당시 있던 계열사들 중 그룹 내에서 그나마 전망이 있던 엔터테인먼트, 반도체 등을 주력으로 바꿨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CJ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 삼성에서 반도체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IMF 위기를 넘겼더라도 친척 기업들과 경쟁을 이어가야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금력이나 인맥 등에서 CJ와 삼성에 비해 열세인 새한이 더 불리하고 친척들끼리 동종업계에서 경쟁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친척들의 지원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2010년 이창희의 차남 이재찬이 투신자살하면서 다시 조명을 받기도 했다.# 이건희 당시 회장은 빈소에 조화 하나도 보내지 않을 정도로 범삼성가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5]
2022년 이창희의 장남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이 사망했다.#,# 이때는 유럽 출장 중이던 사촌동생 이재용 부회장이 빈소에 조화를 보내고 사촌형 이재현 CJ그룹 회장, 사돈 손경식 CJ 회장, 외사촌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등 범삼성가에서 모두 조화를 보내왔고 외사촌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직접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다. 이를 통해 범삼성가의 집안 싸움이 종식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2022년 이창희의 장남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이 사망했다.#,# 이때는 유럽 출장 중이던 사촌동생 이재용 부회장이 빈소에 조화를 보내고 사촌형 이재현 CJ그룹 회장, 사돈 손경식 CJ 회장, 외사촌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등 범삼성가에서 모두 조화를 보내왔고 외사촌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직접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다. 이를 통해 범삼성가의 집안 싸움이 종식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 경영이념
창조하는 경영으로 신뢰받는 기업을 이룩한다.
- 새한인의 사원정신
열정과 자부심으로 최고의 프로가 된다.
팀워크를 통해 목표를 성취한다.
솔직하고 투명하게 사고하고 행동한다.
이니셔티브를 갖는 자만이 성공한다.
- 슬로건
Global Initiative 21 / 기술특급 새한
- 사가: <새한의 노래> - 작사는 그룹 임직원들이, 작곡은 김희갑이 맡았다.
새 마음 큰 포부로 내일을 여는 우리 가슴은 온 세상을 품고도 넉넉해 타오르는 젊음으로 큰 뜻을 이루어 우뚝 선 정상에 손 잡고 서리라 지혜와 용기를 뜨거운 가슴에 담아 인류의 행복을 우리 함께 펼쳐가리라 아~ 아~ 새한 새한 새한 그 이름 영원하여라 |
아래 내역은 그룹 출범 당시 광고 및 매경기사에 기재되었던 8개 계열사와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에 적혀있는 옛 계열사들, 그리고 NICE기업정보 및 취업사이트 기업정보, 다트공시 등을 중심으로 근황을 정리한다.
- 새한미디어 아메리카: 약칭 SMA. 미국 현지법인으로 이하 동일함.
- 새한전자: 1979년 (주)미디어에 합병됨.
- 홍은상사: 새한미디어의 카세트테이프 판매자회사로, 1982년 새한미디어에 합병됨.
- 새한: 구 제일합섬. 2000년 워크아웃 후 2008년 웅진그룹에 매각돼 '웅진케미칼'이 됐고, 2011년 일본 도레이로 매각돼 '도레이케미칼'이 됐다가 2019년 도레이첨단소재에 합병됨.
- 성형사업부: 2003년 새한프라텍으로 양수됨.
- 홈비디오사업부: 'DMV' 브랜드로 알려져 있으며, 2000년 디지탈임팩트로 매각됨.
- 음반사업부: 'DMR' 브랜드로 알려졌으며, 2000년 KM컬쳐로 매각됨.
- 이차전지부문: 2001년 새한에서 분리되어 '새한에너테크'로 출범했고, 2002년 미국 이머징파워를 인수하고 다시 사명을 '에너테크인터내셔널'로 바꿨다가, 2008년 미국 에너원에 매각되었다. 이차 전지 패키지, 리튬이온 셀, 전극 제조 등을 생산한다. 2014년 390억의 매출에 90억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2년 연속 적자에 부채비율도 매우 높은 등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듯.
- 대경인더스트리: 1998년 청원공장 운영권 등을 (주)새한으로 넘긴 후 이듬해 지분매각했고, 2001년 폐업됨.
- 도레이새한(현 도레이첨단소재): 1999년 10월 (주)새한과 일본의 도레이가 4:6 비율로 합작 설립했는데, 2000년 워크아웃 후 새한 측 지분은 채권단이 들고 있다가 2008년 합작선인 도레이가 이를 전량 인수하여 완전한 일본계 기업이 되었다. 필름, 부직포, 원사, CHIP, IT 등을 생산한다. 상술했듯 새한의 주력사업 부문을 인수한 웅진케미칼을 다시 인수하여 종속회사로 뒀고,도레이케미칼까지 포함하여 2014년 매출액 2조 2천억원, 영업이익 1,300억원을 기록했다. 2019년 도레이케미칼을 합병했다.
- 새한정밀: 1996년 새한전자에 합병됨.
- 새한로직스: 구 황성통운. 물류/운송업체이며 2008년 웅진그룹에 매각된 후 '웅진로지스틱스'가 됐다가 2010년 북센에 합병됨.
- 디지탈미디어: 1994년에 이창희 창업주의 차남 이재찬 주도로 설립한 홈비디오/음반 공급업체로, '디지탈미디어비디오(DMV)' 브랜드로 알려져 있으나 1998년에 관련 사업을 (주)새한으로 넘기고 이듬해 청산됨.
- 새한건설: 구 새한종합개발. 1999년 (주)새한에 합병됨.
- 새한정보시스템(현 TAK정보시스템): 1997년 제일합섬 및 새한미디어 전산실을 통합해 세운 전산업체로, 약칭은 SIS였다. 그룹 부도 후 2008년부터 1년 간 웅진그룹 계열이었으나 2010년 GS그룹을 거쳐 이듬해 일본 도레이로 매각됨.
- 신영인더스트리: 조경업체. 그룹 워크아웃 후 이창희 창업주의 외동딸 이혜진이 경영권을 장악해 2008년 '래딕스플래닝'으로 바꿨으나, 2017년 폐업됨.
[1] 일본계 한국인으로 본명은 나카네 히로미.[2] 그러나 인수 당시 2대 주주였던 일본 도레이가 삼성그룹 계열 분리를 반대했고, 삼성석유화학도 넘겨받을 뻔했으나 2대 주주인 미국 아모코 사가 저지했다.[3] 원래 이런 경우는 1세가 50~60대의 나이로 요절하고 20대 후반 ~ 30대 초중반의 2세들이 물려받을 때 회사를 말아먹는 경향이 크다. 대표적으로 쌍용그룹의 김석원(기업 승계 당시 만 29세). 하지만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처럼 예외 사례도 있다.[4] 추가적으로 경영을 자문하고 조언을 해주는 멘토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 사촌인 CJ그룹의 이재현 회장은 외삼촌이자 후견인, 멘토인 손경식 회장이 있었고, 그 덕분에 CJ그룹은 성공적으로 성장했다.[5] 다만 이는 오해일 가능성도 있는게, 이건희가 큰형 이맹희와 CJ쪽과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이창희와는 말년에 화해했고 이창희의 사망 당시 운구도 맡아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사이가 나빴다기보단 아예 무관심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오십보백보 실제 이재관, 이재찬 형제는 새한그룹 해체 이후 집안 모임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삼성코닝 사장 역임 후 새한미디어 부회장으로 1991년 12월에 영입됐다.[7] 2002년 공적자금 비리 특별수사본부에 의해 이재관, 한형수, 김성재 3명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바 있다.[8] 현 대림C&S[9] 대기업인 새한정보에 특허절반(공동특허)이 넘어간 후 빈털털이가 된 디지탈캐스트는 남은 특허절반을 미국회사에 넘겨 자금을 얻고 창렬한 엠피맨 판매량과는 다른 초히트작인 MP3플레이어를 출시했다.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MP3플레이어 종주국을 미국으로 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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