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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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ملك الظاهر سيف الدين برقوق بن انس بن عبد الله الشركسي | ||
알 말리크 앗 자히르 사이프 앗 딘 바르쿠크 빈 아나스 빈 압둘라 앗 셰르케시 | ||
생몰년도 | 1340~1399년 6월 20일 | |
재위 | 1차 | 1382년 11월 26일~1389년 6월 1일 |
2차 | 1390년 1월 21일~1399년 6월 20일 |
카이로의 대표적인 중세 건물군 중 하나인 바르쿠크 복합단지(마드라사-모스크) |
맘루크 왕조의 28, 30대 술탄. 1382년과 1389년 두 차례의 정변을 일으켜 130년 역사의 바흐리 정권을 무너뜨리고 체르케스계 위주의 부르지 맘루크 정권을 세웠다. 그의 치세에 수도 카이로에는 여러 대규모 건축물이 세워지는 등 맘루크 조는 경제력을 과시하였다. 내정에서 바르쿠크는 친족들을 중용하여 중앙집권화에 나섰다. 한편 외정에선 주변국들과 대 티무르 동맹을 맺어 그를 견제하였다. 하지만 사후 티무르는 시리아를 침공해 황폐화시키고, 이로써 맘루크 조는 일시적인 쇠퇴를 겪게 된다. 여담으로 바르쿠크는 아랍어로 자두라는 뜻이다.
앗 나시르 하산을 암살한 권신 얄부가 알 우마리의 맘루크로, 1377년 마지막으로 실권을 행사한 바흐리 술탄 샤바안 2세가 사망한 후 실세가 되었다. 1382년 샤바안 2세의 어린 아들 앗 살리흐 하지를 폐한 바르쿠크는 스스로 술탄위에 올랐다. 친족들을 요직에 임명한 그는 1384-86년 카이로에 거대한 마드라사-모스크 단지를 건설하여 정당성을 세우려 하였다. 한편 그의 아미르 자하르카스 알 칼릴 역시 유명한 '칸 엘 칼릴'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389년 바흐리계 맘루크인 말라티야 총독 민타쉬와 알레포 총독 얄부가 앗 나시리가 봉기하여 시리아를 장악하고 카이로로 진군하였다. 바르쿠크는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전통적인 유배지인 케라크로 보내졌고 새 정권은 앗 살리흐 하지를 복위시켰다. (알 만수르 하지)
하지만 1389년 말엽 바르쿠크는 시리아 일대의 체르케스 맘루크들을 결집시켜 봉기하였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후 카이로로 진군하였다. 내분을 벌이던 바흐리 맘루크들은 손쉽게 분쇄되었고, 1390년 초엽 바르쿠크는 카이로에 입성해 술탄으로 복위하였다. 이후 친족들을 시리아 각지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권력을 공고히 한 그는 이라크의 잘라이르 왕조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여 급성장하는 티무르를 견제하였다. 1399년 알레포에 당도한 티무르의 사신을 참수하며 확고한 의지를 보인 바르쿠크는 같은해 여름 사망하였고, 아들 앗 나시르 파라즈가 계승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티무르는 시리아를 침공하여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서 대학살로 응답하였다. 그외에 바르쿠크는 콥트 정교회의 신년 축일인 나이루즈의 공휴일 지위를 박탈하였다.
하지만 1389년 말엽 바르쿠크는 시리아 일대의 체르케스 맘루크들을 결집시켜 봉기하였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후 카이로로 진군하였다. 내분을 벌이던 바흐리 맘루크들은 손쉽게 분쇄되었고, 1390년 초엽 바르쿠크는 카이로에 입성해 술탄으로 복위하였다. 이후 친족들을 시리아 각지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권력을 공고히 한 그는 이라크의 잘라이르 왕조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여 급성장하는 티무르를 견제하였다. 1399년 알레포에 당도한 티무르의 사신을 참수하며 확고한 의지를 보인 바르쿠크는 같은해 여름 사망하였고, 아들 앗 나시르 파라즈가 계승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티무르는 시리아를 침공하여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서 대학살로 응답하였다. 그외에 바르쿠크는 콥트 정교회의 신년 축일인 나이루즈의 공휴일 지위를 박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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