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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황후 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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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三國
삼국 황후
[ 조위(曹魏) ]
정식 재위
문제 후
명제 후
전폐제 후
전폐제 후
후폐제 후
원제 후
추존 재위
고제 후
태제 후
무제 후
문제 후
[ 촉한(蜀漢) ]
정식 재위
소열제 후
회제 후
추존 재위
소열제 후
[ 손오(孫吳) ]
정식 재위
대제 후
폐제 후
경제 후
말제 후
추존 재위
무열제 후
대제 후
문제 후

촉한의 황후
穆皇后 | 목황후
목황후(穆皇后)
오씨(吳氏)
출생
불명
사망
재위
후한의 한중왕비
촉한의 황후
촉한의 황태후
부군
유모(劉瑁)
소열제(昭烈帝)
가족
오빠 오의(吳懿)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기타5. 미디어 믹스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촉한 선주 소열제 유비의 황후로 유장 휘하인 오의의 여동생이다. 본적은 연주 진류군.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목황후의 부친이 유언과 막역한 사이었기에 유언에게 의지했다. 일찍이 한 관상쟁이가 목황후를 보고 고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목황후의 상이 귀인의 상이었기 때문에 유언이 자신의 아들 유모와 혼인시켰다. 유모가 광증으로 사망하자 과부로 혼자 기거했다.

유비익주를 제패하였으나 부인들이 모두 사망하거나 부재 중[1]인 상태였기 때문에 신하들은 목황후와 혼인하기를 권했다. 유비가 목황후의 전 남편인 유모와 동족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으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법정이 진언하여 말했다.
만일 관계의 친함과 소원함을 논한다면, 어찌 춘추시대 진문공과 자어에 비교하겠습니까?[2][3]
그래서 오씨를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오씨도 한중왕비에 책봉되었고, 221년에 유비가 황제를 칭하자 오씨도 황후가 되었다. 223년 5월에는 유선의 즉위에 따라 황태후가 되었다.

<유염전>에 따르면 234년 정월에 유염의 처 호씨(胡氏)가 태후 오씨에게 하례하러 갔고 태후가 특별히 명을 내려 호씨를 한 달 넘게 머무르게 했다.[4]

245년에 태후가 세상을 떠났고, 유비의 혜릉에 합장되었으며 시호는 목황후(穆皇后)라고 올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모와 결혼까지는 아니고 약혼만 했던 사이로 나온다.[5] 목황후가 유비와 혼인하는 시기도 익주 평정 직후에서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을 때로 바뀌었다.

연의에서는 유비와의 사이에서 유영유리를 낳았다. 참고로 정사에서는 유영과 유리의 친모가 목황후라는 언급이 없으며 유영과 유리는 이복형제이다.

4. 기타[편집]

목황후의 이름은 정사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오씨 족보에서는 목황후의 이름이 오현(吳莧)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족보는 신빙성이 낮은 사료이기 때문에 확정할 수는 없다.

어찌보면 예언으로 인해 황후가 되긴 하는데 정작 본인 말고 그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김칫국만 마셨다는 점에선 선대 고황후 박씨와도 닮았다.

5. 미디어 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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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삼국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오의의 열전에서만 언급이 되고 본인은 등장하지 않다가 100만인의 삼국지에서 직접 등장했다. 미부인이나 손부인에게도 없는 유비와의 투샷이 있다. 성능은 평범하다.

삼국지: 한말패업에서 오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삼국지톡 오현
삼국지톡에서는 삼국지 39화에서 위의 혼인식 사진으로 처음 등장. 첫 등장 화에서는 본인 옆에 이름을 명시하는 말풍선이 붙지는 않았으나, 컷 하단의 정사, 연의 내용을 설명하는 각주에서 '오현'으로 지칭했고 유장이 '오현 시동생, 어설픈 유장'으로 등장하는 컷이 있기에 여기서도 이름이 오현이라는 것은 확정이다. 유비와 상당히 닮은 인상에[6] 연한 초록색의 머리가 특징. 유장을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게 된 재혼이지만, 그래도 손상향에 비하면 유비와의 사이는 아주 원만해서 정중하게 혼인식을 올렸다.[7] 둘의 혼인은 역사대로 법정이 주관했다고.

이릉대전에서 간만에 얼굴을 비췄다. 즉위식 날 늦잠을 잔 유비에게 큰 소리로 전화하는 장비에 놀라서 깼으며, 동생들을 잃는 악몽을 꾼 유비에게 그런 꿈은 일어나지 않는다며 달래준다. 눈은 머리색과 같은 색이며, 각주엔 오현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이릉대전에선 오제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6. 둘러보기[편집]

[ 펼치기 · 접기 ]
1권 「유이목전(劉二牧傳)」
2권 「선주전(先主傳)」
3권 「후주전(後主傳)」
4권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5권 「제갈량전(諸葛亮傳)」
6권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7권 「방통법정전(龐統法正傳)」
8권 「허미손간이진전(許糜孫簡伊秦傳)」
9권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10권 「유팽요이유위양전(劉彭廖李劉魏楊傳)」
11권 「곽왕상장양비전(霍王向張楊費傳)」
12권 「두주두허맹래윤이초극전(杜周杜許孟來尹李譙郤傳)」
13권 「황이여마왕장전(黃李呂馬王張傳)」
14권 「장완비의강유전(蔣琬費禕姜維傳)」
15권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

관련 틀:


[1] 정실인 손부인이 유비가 입촉한 후 오나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2] 자어는 중이의 동생 이오(진혜공)의 아들로, 태자였던 자어를 진(秦)에 인질로 보냈는데 원래 중이와 이오의 누나가 진(秦)목공에게 시집을 가 있어서 목공은 자어에게 자신의 딸 회영을 시집보냈다. 하지만 자어는 진(晉)의 왕위 쟁탈을 위해 본국으로 몰래 도망치면서 자어의 아내인 회영은 버림받게 되었다. 이때 중이가 제, 초나라등을 거쳐 진(秦)으로 망명해오자 진목공은 딸 회영을 부인으로 맞아들일 것을 권했고, 중이는 자어와 관계때문에 꺼렸지만 주변의 권유와 진목공이 강력한 배경이 될거란 생각에 회영과 결혼한다. 이 후 중이는 진목공의 도움으로 본국에 돌아가 진문공이 되었다. 즉, 결론적으로 목황후의 전 남편인 유모가 유비와 동족이라고 해도 부인의 전남편이 자신의 조카였던 진문공의 사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3] 중이의 동생 이오는 인면수심인 자라 진목공이 자신의 즉위를 도왔는데도 그 댓가로 성 5개를 주기로 한 약조를 씹었고 거기다 다음해에는 진(晉)나라에 흉년이 들자 진목공에게 도움을 받기까지 했으나 다다음해에 반대로 진(秦)에 흉년이 들고 진목공이 도움을 구하자 오히려 진(秦)나라를 쳐들어갔다가 패배해서 과거 약속했던 5성을 넘겨받고 장남을 인질로 잡히게 된 것이다. 진목공이 중이를 도운 것도 반은 이오와 그 자식들에게 학을 떼서 믿을 만한 군자인 중이를 응원한 것이다.[4] 헌데 호씨의 남편 유염은 아내가 황제와 간통을 했다고 의심하여, 호씨가 귀가하자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얼굴을 구타한 후 쫓아내 버렸다. 이에 호씨가 남편을 고소했고, 유염은 구금되었다가 사형에 처해졌다.[5] 이는 삼국지 시대와 달리 나관중이 살았던 시대엔 과부의 재혼을 안 좋게 봤기 때문에 고친 것이다.출처 게다가 앞서 조범조운과 의형제를 맺은 뒤 형수인 번씨를 조운에게 재혼시키려 했다가 '우리는 의형제를 맺었으니 네 형수면 나의 형수이기도 한데 어떻게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할 수 있느냐'라고 꾸중을 들은 일이 있는데, 동일하게 적용할 경우 유비 역시 유장과 형님동생 하는 사이라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6] 전 부인 감소혜가 젊은 시절의 유비와 닮은 인상이었다면 이쪽은 중년 유비를 닮아 보인다.[7] 참고로 이때 들고 있는 부케의 꽃이 은방울꽃인데 꽃말의 뜻은 '다시 찾아온 행복'이다. 유비가 동족인 점에서 꺼린 부분은 언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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