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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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헨슨 Matthew Hens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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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매튜 알렉산더 헨슨 Matthew Alexander Henson |
출생 | 1866년 6월 8일 |
사망 | 1955년 3월 9일 (향년 88세) |
국적 | |
직업 | 탐험가 |
배우자 | 에바 플린트 (1891년 ~ 1897년) 루시 로스 (1907년 결혼) |
첩 | 아카팅와 |
자녀 | 아들 (1906~1987; 아카팅와 슬하) |
미국의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와 함께 북극점 탐험에 나서 북극점에 가장 근접한 곳을 미국인으로서 처음 밟은 사람이다[1]. 그러나 피어리가 정복의 공을 오로지 자신에게 돌리고 헨슨을 철저하게 무시한 탓에 뒤늦게 조명받았다.
"아프리카인들은 한파에 약하다."는 편견을 깬 인물이기도 한데, 사실, 아프리카도 밤에는 춥다는 걸 생각하면 이 편견이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사하라 사막은 낮에는 그리도 덥지만 밤에는 사람이 천막없이 밖에서 자다간 얼어죽을 정도로 춥다.
예를 들어 남부 캘리포니아의 경우, 한국에 비하면 남부 캘리포니아의 겨울은 겨울이라고 불러주기도 애매할 정도로 정말 시원하다. 열이 좀 많은 체질이라면 겨울에도 반팔+반바지도 가능하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유럽인들, 아프리카인들, 히스패닉들은 적당히 두껍게 입는 정도거나 심지어 몇몇은 반팔이나 반바지 차림을 하고 다니기도 하지만 아시아인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다닌다. 그런데, 한국인을 비롯한 북부 아시아도 그런다면 이해되지만, 사실상 무지하다는 뜻일 것이다. 아시아 인구가 어디에 제일 많은지가 알면, 그딴 헛소리는 못 한다. 더욱이 흑인의 경우에는 노예제로 끌려가면서 건강이 안 좋은 부류는 대서양에서 죽고, 노예주들의 인위적인 정신나간 교배로 우월 유전자만 남았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거기에 미국의 4계절을 항시 받을테니, 겨울도 지낼 내성이 쌓일 일이 백년을 넘어 2백년도 눈앞에 보이는 형국에 인종차별이 얼마나 자연 만만히 보는 막장 시대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으면서, 아시아에 식견부터가 현대에 속하는 이들의 무식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인들은 한파에 약하다."는 편견을 깬 인물이기도 한데, 사실, 아프리카도 밤에는 춥다는 걸 생각하면 이 편견이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사하라 사막은 낮에는 그리도 덥지만 밤에는 사람이 천막없이 밖에서 자다간 얼어죽을 정도로 춥다.
예를 들어 남부 캘리포니아의 경우, 한국에 비하면 남부 캘리포니아의 겨울은 겨울이라고 불러주기도 애매할 정도로 정말 시원하다. 열이 좀 많은 체질이라면 겨울에도 반팔+반바지도 가능하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유럽인들, 아프리카인들, 히스패닉들은 적당히 두껍게 입는 정도거나 심지어 몇몇은 반팔이나 반바지 차림을 하고 다니기도 하지만 아시아인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다닌다. 그런데, 한국인을 비롯한 북부 아시아도 그런다면 이해되지만, 사실상 무지하다는 뜻일 것이다. 아시아 인구가 어디에 제일 많은지가 알면, 그딴 헛소리는 못 한다. 더욱이 흑인의 경우에는 노예제로 끌려가면서 건강이 안 좋은 부류는 대서양에서 죽고, 노예주들의 인위적인 정신나간 교배로 우월 유전자만 남았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거기에 미국의 4계절을 항시 받을테니, 겨울도 지낼 내성이 쌓일 일이 백년을 넘어 2백년도 눈앞에 보이는 형국에 인종차별이 얼마나 자연 만만히 보는 막장 시대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으면서, 아시아에 식견부터가 현대에 속하는 이들의 무식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1909년 흑인 사회의 만찬에서 존경을 얻었다. 1912년 회고록인 북극의 흑인 탐험가(A Negro Explorer at the North Pole)를 출판했다.
그는 193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주목을 받았다. 1937년에 뉴욕의 익스플로러 클럽의 회원으로 인정받고 1948년에 명예회원이 되었다. 미 의회에서는 1944년에 그와 피어리의 보좌관 5명에게 피어리 극지탐험 은메달을 수여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헨슨은 빈민가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았고, 1955년에 사망했다. 향년 89세.
아내 루시는 1968년까지 살다가 사망해 사후 합장되었다.
그는 193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주목을 받았다. 1937년에 뉴욕의 익스플로러 클럽의 회원으로 인정받고 1948년에 명예회원이 되었다. 미 의회에서는 1944년에 그와 피어리의 보좌관 5명에게 피어리 극지탐험 은메달을 수여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헨슨은 빈민가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았고, 1955년에 사망했다. 향년 89세.
아내 루시는 1968년까지 살다가 사망해 사후 합장되었다.
대중매체에서 지몬 슈바르츠의 작품 빙벽이 매튜 핸슨의 생애를 다루었다.
2023년 수능완성 영어 교재에 매튜 핸슨의 일화가 실렸다. 실전 모의고사 2회 43~45번에 장문독해로 출제되었다.
그러나, 로버트 피어리처럼 극지방 여인을 첩으로 받아들인 점 때문에 이 점으로도 그도 같이 욕먹어 사생활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래도, 피어리처럼 남의 공로를 빼앗아버리는 쓰레기짓을 하지 않았기에 공적인 면에선 영웅시된다. 하지만 위에 한 짓 때문에 피어리보단 낫지 그래도 그렇게까지 좋은 인물은 아니다란 평가를 받고 있다.
2023년 수능완성 영어 교재에 매튜 핸슨의 일화가 실렸다. 실전 모의고사 2회 43~45번에 장문독해로 출제되었다.
그러나, 로버트 피어리처럼 극지방 여인을 첩으로 받아들인 점 때문에 이 점으로도 그도 같이 욕먹어 사생활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래도, 피어리처럼 남의 공로를 빼앗아버리는 쓰레기짓을 하지 않았기에 공적인 면에선 영웅시된다. 하지만 위에 한 짓 때문에 피어리보단 낫지 그래도 그렇게까지 좋은 인물은 아니다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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