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 BACK << -|- >> HOME <<)

도솔산 전투

최근 수정 시각:
4
편집
현재 사용중인 아이피가 ACL그룹 IDC #12915에 있기 때문에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 펼치기 · 접기 ]
6월
7월
8월
9월
10월
10월
11월
12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7월
8월
9·10월
11·12월
1월
3월
7월
9월
3월
5월
6월
7월
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한국군•유엔군의 승리
※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도솔산 전투 전쟁기념관, 한국...
도솔산 전투 기록화

1. 개요2. 전투 전 상황3. 전투 경과
3.1. 6월 4일3.2. 6월 5일3.3. 6월 6일3.4. 6월 7일3.5. 6월 8일3.6. 6월 9일3.7. 6월 10일3.8. 6월 11일3.9. 6월 12일3.10. 6월 14일3.11. 6월 16일3.12. 6월 17일3.13. 6월 18일3.14. 6월 19일
4. 후속 전투, 대우산 전투
4.1. 7월 8일4.2. 7월 9일4.3. 7월 10일4.4. 7월 15~17일4.5. 7월 26일4.6. 7월 29일4.7. 7월 30일
5. 기타

1. 개요[편집]

1951년 6월 4일부터 20일까지 미합중국 해병대 1사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현재는 해병대 제2사단 예속)가 강원도 양구군 해안리 도솔산 일대를 점령중인 조선인민군 육군 제5군단 예하 12사단, 32사단 2개 사단을 격파하고 대암산-도솔산 고지군을 차례대로 확보한 전투.

兜率山의 兜를 두로 읽어 과거에는 두솔산 전투라고도 불렀었다.

2. 전투 전 상황[편집]

도=쫄짠~=~전투
전투의 무대가 된 도솔산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양 옆으로 양구와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로 북상중인 국군의 진격이 지체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북한군의 진지공사와 저항도 빡셌고, 이로 인해 캔자스(KANSAS)선 일대를 장악하려던 미 해병 1사단의 5연대도 많은 손실만 입은 채 6월 3일 사단 예비였던 국군 해병 1연대에게 임무교대를 한 뒤 물러났으며, 이 모습을 본 해병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자신들보다 우월한 신체와 장비를 가진 미군들이 패퇴하는 모습에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임을 느낀다.[1]

3. 전투 경과[편집]

도-쫄짠~=~전투
이미지 출처 및 참고자료1 참고자료2

참고로 위 이미지의 동그라미 및 그 안에 있는 번호들은 점령 목표 번호들이다.

3.1. 6월 4일[편집]

항공과 포격의 지원 하에 1,2대대가 도솔산 기슭으로 각각 전진한다. 1대대는 서남쪽 기슭을 맡아 692고지를, 2중대는 그 동쪽을, 3중대는 611고지를 점령한다. 하지만 북쪽 738고지로 전진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오후 9시 30분 경 692 고지로 후퇴한다.

그리고 2대대는 5중대를 선두로 삼아 적의 주 저항선인 1121고지로 진격해 오후 2시 30분경 중간 능선(목표#8)을 점령하고 1121고지(정확히는 그 뒤쪽 목표#9)로 진격하려 했으나 거센 저항에 공격을 중지해야 했다.

3.2. 6월 5일[편집]

1중대와 임무교대한 1대대 3중대는 계속 북진하며 분전하나 다수의 사상자만 남긴 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한편 2대대는 5중대 옆에 6중대를, 후방 1057 고지엔 7중대를 배치해 방어를 굳힌 뒤 5중대가 1121고지를 향해 돌격하나 저항이 거세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3.3. 6월 6일[편집]

오후 3시 30분 경 1대대 3중대가 738 고지를 점령한다.

뒤이어 2중대도 738 고지 서북쪽의 무명고지(목표#4)를 향해 악착같이 전진하나 수류탄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대는 통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큰 나무나 바위를 끼고 즉석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 위치를 고수하게 된다.

한편 연대 예비대였던 3대대는 919, 886 고지를 점령한 뒤 1175 고지를 향해 공세를 펼치나 일몰로 인해 공격을 중지하고 CP를 886고지로 옮긴다.

3.4. 6월 7일[편집]

오전 5시 1대대 2중대가 급습을 받자 1소대는 중대본부가 있는 738 고지로 후퇴했고, 2,3소대 일부도 철수를 시도하지만 1개 분개가 응사하자 상황이 진정된다. 이후 9시에 공격을 재개하나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3.5. 6월 8일[편집]

화력 지원 속에 3대대가 1175 고지로 돌격해 오전 10시 45분 경 점령에 성공한 뒤 9, 11중대를 전방에 10중대를 후방에 각각 세운다.

3.6. 6월 9일[편집]

오전 7시 3대대 9중대가 기습을 받았으나 격퇴했다.

오후 1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자 2대대 7중대가 1121 고지를 향해 돌격해 오후 6시 반 경 점령에 성공하나, 이 당시 멀쩡한 7중대원이라곤 고작 10명밖에 안 되었으며, 이조차도 고지를 사수하는 과정에서 사상당해 사실상 증발 상태가 되었다.

한편 해병 1연대 지휘부는 이런 지지부진한 성과에 미 해병 1사단으로부터 공격 독촉 갈굼을 받았다.

3.7. 6월 10일[편집]

이 날 열린 한미 해병 긴급작전 회의에서 해병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야음을 틈타 공격할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미 해병 1사단장은 야간공격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며 반대했으나, 김대식 대령의 집요한 건의에 마지못해 승낙한다.

3.8. 6월 11일[편집]

새벽 2시 연대의 한방 병력들이 기도비닉을 위해 조명탄, 화력지원 없는 암흑 속을 더듬어가며 적의 주 저항선 진지들을 향해 각자 기어올랐고, 수적 우세에 힘입어 1대대 1중대가 891고지 앞마당(목표#4)을 점령하고, 2중대는 패주중인 적들을 추격해 6시경엔 1143고지까지 점령한다.[2]

그리고 2대대 역시 5중대로부터 인원 보충을 한 7중대가 1121고지 일대로 진격해 5시 30분경 점령에 성공했고, 이에 2대대는 나머지 중대들을 일대로 올려보내 알박기를 시전하며 1121고지 서북쪽 능선까지 점령한다.

3.9. 6월 12일[편집]

화력지원 속에 3대대 9중대가 1218고지를 향해 돌격, 오전 11시경 점령에 성공한다. 그리고 오후 2시에 그 북쪽의 목표#14(능선)를 점령한 뒤 미 해병 5연대가 점령한 대암산(목표#15)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패주병과 조우해 이를 격퇴한다.

한편 당초 목표였던 캔자스(KANSAS)선 일대를 장악한 미 해병 1사단은 뒤이어 뱃저(BADGER, 오소리) 선 일대를 점령하기 위한 후속 작전에 돌입한다.

3.10. 6월 14일[편집]

2대대는 892고지를 경유, 432고지에서 서쪽 미 해병 7연대와의 전선 연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막은동에 적 1개 중대가 있음을 발견한다.

3대대는 1개 소대를 소룡포 부근으로 정찰보냈고, 이 과정에서 1개 대대급 적들과의 교전이 일어났으나 별 피해없이 복귀에 성공한다.

한편 미 해병 1사단장은 해병 1연대에게 도솔산까지 점령해 그 북쪽의 해안분지(펀치볼)를 남쪽에서 감제할 수 있게 하라며 요구했다.

3.11. 6월 16일[편집]

목표#14 지점에 자리잡은 2대대가 북쪽 고지군을 점령하기 위해 6중대 소대 하나를 정찰보낸다. 그리고 또 소대 하나를 1304 고지로 정찰보냈는데, 서쪽(목표#20)으로 이동중인 적 소대군을 발견하고, 포격 요청을 넣은 뒤 1304 고지 우측 일대로 산개한다. 그 뒤 오후 2시 55분 경 본대를 보내 오후 4시 45분 점령에 성공한 뒤 뒤따라온 5중대를 합류시킨 뒤 경계를 강화하면서 북쪽 목표#18을 무혈 점령한다.

한편 미 해병 5연대는 목표#18을 경유해 그 위쪽 1018고지(목표#19) 능선 일대를 향한 공격을 준비한다.

3.12. 6월 17일[편집]

오전 8시 30분경 2대대 7중대가 1018고지를 무혈점령했고, 미 해병 5연대는 오전 11시 30분 경 1018고지 우측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한편 3대대도 목표#20 능선 진지들을 향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자마자 9,10중대가 공격을 개시했고, 이에 북한군들이 박격포탄을 마구잡이로 퍼부으며 저항하자 교통호를 파가며 전진해 오후 12시 30분경 점령에 성공한다.

3.13. 6월 18일[편집]

오전에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된 뒤 3대대 10,11중대가 목표#21 능선을 향해 돌격, 오전 11시 30분경에 점령에 성공한다.

한편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도솔산(목표#22) 공격을 준비중인 3대대장에게 야간공격 지시 및 일련의 작전들을 '도솔산 작전'이라고 명명해 격려한다.

3.14. 6월 19일[편집]

자정 무렵 3대대 11중대는 북쪽 958고지로 우회해 치기 위해 움직였고, 오전 3시 30분 경 10중대도 정면 공격을 위해 움직여 오전 5시 30분경 도솔산 점령도 성공하고 장기간의 전투에 식량, 탄약, 사기 등 모든게 떨어진 적들은 도솔산 서쪽 능선을 따라 872 고지 쪽으로 패주한다.

뒤이어 1대대도 오전 8시부터 도솔산 서쪽 능선(목표#23)을 공격해 9시 30분경 점령에 성공했고, 872고지도 미 해병 7연대가 점령한 뒤 3중대에게 인계함으로서 해당 전투는 마무리된다.

한편 도솔산을 내준 북한군은 도솔산 북서쪽, 해안분지(펀치볼) 서쪽에 위치한 대우산에 27사단 32연대를 배치한 뒤 포격과 야간공격으로 해병대 진지들을 괴롭혔고, 더군다나 대우산은 도솔산보다 높은 1179의 고지였기에 이를 점령해 도솔산의 안전을 도모할 필요가 생겼다.

4. 후속 전투, 대우산 전투[편집]

4.1. 7월 8일[편집]

해병 1연대 2대대 5,7중대, 그리고 예비대로 배속된 10중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대우산 앞 1001 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하지만 길목마다 매설된 지뢰와 저항, 기습공격으로 인해 각자 목적한 위치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일몰을 맞는다.

4.2. 7월 9일[편집]

10중대가 공격을 시도하나 이조차도 돈좌되자 2대대 공격대는 1대대 1,2중대와 임무교대했고, 1대대 공격대는 돌격을 감행해 오후 5시 15분 경 1001 고지를 점령한다.

4.3. 7월 10일[편집]

새벽 2시 30분 경 872 고지 일대가 야간기습을 받았으나 3중대가 격퇴한다. 이후 3중대는 임무교대하러 온 2대대에게 고지를 인계한 뒤 1001 고지의 대대 병력들과 합류하기 위해 움직인다.

한편 1대대 공격대는 대우산으로 가는 길목에 지뢰와 부비트랩들이 지독하리만치 많자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도솔산 일대를 사수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다.

4.4. 7월 15~17일[편집]

적들의 기습 견제를 막아내던 국군 해병 1연대는 미 2사단 예하 38, 23연대, 네덜란드 대대 등과 임무교대 후 재보충을 위해 후방인 홍천으로 이동한다.

4.5. 7월 26일[편집]

일대 상황을 파악한 네덜란드 대대가 대우산 방면으로 선제공격을 가한다. 하지만 이미 지뢰들과 강화된 진지들로 우주방어를 하는 통에 물러나야 했다.

4.6. 7월 29일[편집]

저녁 무렵 대우산 정상부에 포탄 115톤을 퍼부은 뒤 미 38연대가 네덜란드 대대의 엄호 속에 대우산을 공격하였으나 이조차도 우주방어에 가로막혔다.

4.7. 7월 30일[편집]

미 38연대와 네덜란드 대대가 포위 공격을 한 끝에 대우산 점령에 성공한다.

또한 대우산을 향해 퍼부어진 무자비한 포격과 점령 과정에서 북한 27사단 주력이 괴멸되었다.

5. 기타[편집]

  • 전투 도중 북한군이 무전기를 노획하여 전술이나 아군 위치가 유출되자 해병 1연대 장병 상당수를 차지하던 제주 출신들[3]에게 무전 통신 맡겨서 대처했다. 이는 사이판 전투 때의 나바호족들처럼 육지의 한국어와 제주어가 어휘에서 다른 점이 많아 감청 당해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일대에 총포탄이 날아다니고 곳곳에 지뢰, 부비트랩이 산재해 있었기에 각 진지들마다 식량, 탄약을 실어날랐던 한국인 노무자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 이 전투의 승리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無敵海兵(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했다. 이는 지금도 통영 상륙작전에서 유래한 "귀신잡는 해병대"와 함께, 해병대를 상징하는 구호로 쓰이고 있다.
  • 경북 포항의 해병대 1사단 대강당 명칭인 '도솔관'도 이 전투에서 유래했다.
  • 이후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은 국회 감사문을, 참모장 김성은 대령,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미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또한 1대대장 공정식 소령, 2대대장 윤영준 소령, 3대대장 김윤근 소령, 통신대장 이판개 대위는 미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 또한 1121고지(목표#9) 공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익태 소위, 오정근 소위, 이근식 소위를 포함한 공훈자들에게도 미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으며, 1951년 6월 26일 부대표창도 수여됐다.
  • 2013년 유해발굴 당시 도솔산 전적지 일대에서 28구가 발굴되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2013년무렵까지 전국 각지의 전적지에서 총 8417구[4]가 발굴되었으나 세부적인 신원을 확인할 방도가 없어 관계자가 친인척들의 DNA 기증을 호소할 정도였다.#
  • 2020년 6월 22일 해병대는 도솔산 지구 전투 전승기념 행사를 거행했다.

[1] 또한 한국 해병 장병들도 전투의 피로가 싹 가시지 않은 상태라 또다시 전방으로 보내진다는 소식에 실망어린 표정으로 차량에 올랐다고 한다.[2] 참고로 후일 포로가 밝히길 이 당시 북한 12사단은 해병들이 야간공격을 하리라 예상하지 못하고 고지에 초병 몇명만 남긴 채 후방으로 내려가 취침하고 있었다고 하니 적절한 판단이었다.[3] 이들의 상당수는 4.3사건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제주도에 훈련소를 설치한 해병대에 입대한 것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비극을 보여주는 일면.[4] 7100여구는 국군, 13구는 유엔군, 1008구는 북한 및 중공군 유해로 판명.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  
  •  
  •  
  •  
  •  
  •  
  •  
  •  
  •  
  •  
  •  
  •  
  •  
  •  
  •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