녜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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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 ||
정체 | 聶榮臻 | |
간체 | 聂荣臻 | |
한국식 독음 | 섭영진 | |
영문 | Nie Rongzhen | |
자 | 복변(福駢) | |
출생 | ||
사망 | ||
국적 | ||
학력 | 황포군관학교 재학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종교 |
1899년 12월 29일 쓰촨성 장진에서 태어났다. 1919년 장진중학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 1925년 귀국하여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맡았다. 중일전쟁때 팔로군 115군 부사단장을 지낸다. 국공내전때는 화베이 야전군 사령관을 맡았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인 1955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10대 원수로 선정된다. 국무원 부총리,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주임, 국방과학위원회 주임을 맡아 중국군의 무기현대화에 공헌하였다. 특히 양탄일성[1]으로 불리는 중국의 핵무기, 미사일 개발을 주도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 직후 예젠잉 등과 함께 장칭을 위시한 4인방의 체포를 이끌었으며,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을 역임하며 당과 군부의 원로 역할을 맡았다. 이후 천안문 사태까지 경험하고 1992년 5월 14일 베이징에서 93세로 사망한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인 1955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10대 원수로 선정된다. 국무원 부총리,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주임, 국방과학위원회 주임을 맡아 중국군의 무기현대화에 공헌하였다. 특히 양탄일성[1]으로 불리는 중국의 핵무기, 미사일 개발을 주도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 직후 예젠잉 등과 함께 장칭을 위시한 4인방의 체포를 이끌었으며,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을 역임하며 당과 군부의 원로 역할을 맡았다. 이후 천안문 사태까지 경험하고 1992년 5월 14일 베이징에서 93세로 사망한다.
아들은 없고 딸 하나만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딸은 인민해방군 최초의 여자 중장이며 사위는 상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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