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동명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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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完
1577년(선조 10) ~ 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1], 자는 자구(子具), 시호는 양무(襄武).
김완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라 간혹 혼동되기도 하지만, 이 인물은 주로 광해군, 인조 때 활약한 인물이다. 한산도 대첩 때 전사한 김극희의 조카이기도 하다.
1577년 전라도 영암군 곤이종면 몽해리(현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에서 이성 현감(利城縣監:종6품)을 지낸 아버지 김극조(金克祧)와 어머니 천안 전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제수되기 전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이에 정규군에는 합류하지 못하고 의병장 조경남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그 뒤 정규군에 편입된 후에도 공을 세웠으며, 1624년 이괄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우고 그 공으로 진무 3등 공신(振武三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흔히 김완 장군 영정이라 하면 검색되는 그림의 주인공은 이 인물이다.
과거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한겨례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하였다.기자생활중 국가정보원 비선 민간여론조작 조직에 대한 기사로 49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하였다. 장자연 사건에 대하여 단독기사를 작성해 세상의 이목을 중심시키기도 했다.#. N번방 사건을 처음 제보받은 기자이기도 핬고 # 그 이후에는 윤석열 대선후보에 대한 검증성 기사를 많이 작성했다. # 2022년 윤석열 대선후보와 삼부토건의 유착 의혹에 대한 녹취록을 확보하여 기사를 작성하였지만 작성한 기사가 데스크에서 거부되자 사표를 제출하였다.
[1] 사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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