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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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朝鮮貴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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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준(金思濬, 1855~1917)은 조선 말의 문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남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작위를 박탈당하고 옥사했다.
김제남[1]의 10대손이며, 딸 김수덕(병합 이후 이강공비)이 1893년 의친왕과 결혼하여 그의 장인이 되었다.
1879년 음서로써 하위 관료에 천거되었으며 1881년 진사에 올랐고, 이후 현감과 군수 등의 지방관 벼슬을 역임했다. 1901년 중추원 의관이 되었으며, 법부 사리국장, 내장원경,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과 규장각 지후관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2만 5천원을 수령하였다. 그리고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과 그해 12월 7일 종5위의 서위를 받은 데 이어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작위를 박탈당했고,[2] 1917년 3월 사망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작위를 받은 사실 때문에 포함되었으나,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작위 박탈 사실을 인정받아 명단에서 빠졌다.
1879년 음서로써 하위 관료에 천거되었으며 1881년 진사에 올랐고, 이후 현감과 군수 등의 지방관 벼슬을 역임했다. 1901년 중추원 의관이 되었으며, 법부 사리국장, 내장원경,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과 규장각 지후관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2만 5천원을 수령하였다. 그리고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과 그해 12월 7일 종5위의 서위를 받은 데 이어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작위를 박탈당했고,[2] 1917년 3월 사망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작위를 받은 사실 때문에 포함되었으나,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작위 박탈 사실을 인정받아 명단에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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