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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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904년)에 궁예가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백관을 설치하였으며제정된 관호(官號)는 비록 신라의 제도에 기인하지만 전각(殿閣)의 이름은 다르다.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었는데 광치나(匡治奈)지금[고려]의 시중, 서사(徐事) 지금의 시랑, 외서(外書) 지금의 원외랑였다.《삼국사기》 궁예 열전
태조(太祖)가 태봉(泰封)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광평성(廣評省)을 두어 백관(百官)을 총령(摠領)하게 하였으며, 시중(侍中)·시랑(侍郞)·낭중(郞中)·원외랑(員外郞)이 있었다.《고려사》 백관지 상서성
[1] 비록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자처하긴 했지만 이미 고구려가 멸망해 없어진 지 무려 240여년이 지나서 고구려의 정치제도를 완전히 고증해낼 만큼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거란의 침입 때문에 많은 기록이 유실되어 완전히 남아있진 않지만 일단 남아있는 기록만 살펴봐도 궁예나 고려 초기의 통치제도는 후기 고구려와 공통점이 별로 없다.[2] 실용적인 이유로 자국을 멸망시킨 지배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사만 해도 3성6부제를 도입한거나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때 일본법도 포함해서 참조한것과 같은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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