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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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十月, 攻䧟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392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다.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392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빼앗았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首攻取 寧八城, ... 閣彌城, ... ▨▨▨▨▨其國城.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은 영팔성, ... 각미성, ... 등을 공취하고, 그 도성에 다다랐다.
원래는 백제의 북방을 지키던 천혜의 요새[3]로, 사면이 가파른 절벽에다 바다에 둘러싸인 구조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 1년(391) 겨울 10월에 광개토대왕이 직접 백제를 침공하여 수곡성 등 백제 북방의 성들을 함락시켰을 때 관미성 역시 공격하였고, 일곱 방향에서 20일 동안 밤낮으로 성을 공략한 끝에 결국에는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관미성이 빼앗긴 것은 백제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이는 백제 북방의 주요 방어거점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서해로 빠져나가는 해상기지를 잃은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 당연히 백제에서는 이후 진사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이 393년 8월에 군사 1만과 진무를 보내어 관미성을 탈환하게 하였으나 관미성의 압도적인 방어력과 고구려군의 보급로 차단으로 인하여 성을 탈환하는데 실패했고, 이후로도 백제는 고구려에 대하여 공격을 시도하나 매번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4년 뒤 396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공략할 때 수군의 전진기지로 관미성을 이용하여 지상군은 위례성 북쪽의 아차산성, 수군은 한강을 통하여 위례성을 압박하였고, 결국 아신왕을 항복시키고 58성 700촌[4]을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로도 관미성은 고구려의 수군기지로서 작동하여 고구려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남방을 압박하게 된다.
관미성이 빼앗긴 것은 백제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이는 백제 북방의 주요 방어거점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서해로 빠져나가는 해상기지를 잃은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 당연히 백제에서는 이후 진사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이 393년 8월에 군사 1만과 진무를 보내어 관미성을 탈환하게 하였으나 관미성의 압도적인 방어력과 고구려군의 보급로 차단으로 인하여 성을 탈환하는데 실패했고, 이후로도 백제는 고구려에 대하여 공격을 시도하나 매번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4년 뒤 396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공략할 때 수군의 전진기지로 관미성을 이용하여 지상군은 위례성 북쪽의 아차산성, 수군은 한강을 통하여 위례성을 압박하였고, 결국 아신왕을 항복시키고 58성 700촌[4]을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로도 관미성은 고구려의 수군기지로서 작동하여 고구려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남방을 압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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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미성 위치와 관련된 지도. #)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크게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오두산성이라는 설(김정호, 윤일녕 등)과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의 화개산성이라는 설(이병도)이 유력하며, 소수학설로 강화도에 있었다는 학설이 있다. 북 학계에서는 개성시 개풍구역 림한리에 위치한 관산반도로 추정한다.
한편,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은 관미성이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으며 환서대백제의 증거라 주장하기도 한다.
한수가 안성천이고 위례성의 위치가 천안직산의 위례산이라는 직산위례성설에 의하면,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에 있는 영인산성[5]이 관미성이 될 수 있다. 다만 직산위례성설은 비주류 학설이기 때문에 오두산성설, 교동도설, 강화도설 등에 비하면 크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광개토대왕 시기를 그린 대중 매체에서 관미성은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1]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의 표기로 흔히 잘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2] 광개토대왕릉비에서의 표기.[3]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조에서는 요해처(要害處)라 표현되어 있다.[4] 아신왕 때 밀려난 영토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이다. 이는 아신왕 이후 개로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대 기록에 잃어버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강유역에 대한 기사가 버젓이 그것도 빈번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령왕 때는 황해도 수곡성을 공격했다는 기사까지 있을 정도이다. 현재 학계에서 개로왕~웅진시기 백제의 영역은 떠오르는 논점 중 하나다.[5] 위치와 표현이 영인산성과 일치하며 영인산성은 성둘레만 1000m에 달하며 영인산이 있는 아산은 무려 20여개가 넘는 크고작은 산성들이 산재해 있다.특히 배방성은 개로왕때의 설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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