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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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는 본래 선승(禪僧)이 아닌, 31세까지 10여 년간 동학사에서 화엄 교학을 강의하던 스님이었다. 그러다 경허의 어린 시절 은사인 계허(桂虛) 스님을 만나러 서울로 가는 길에 충청남도 천안의 한 마을에서 맞닥뜨리게 된 역병으로, 멀쩡한 사람이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모습을 본 경허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경전의 수많은 교리들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스승을 만나러 가는 일과 강사 생활을 포기한다.
이후 경허는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와버렸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가지고, 동학사 골방에서 정진한다. 그러다 어떤 사미승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곳이 없다(到牛無鼻孔處).'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는 그의 오도송(깨달음을 읊은 노래)이다.
이후 경허는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와버렸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가지고, 동학사 골방에서 정진한다. 그러다 어떤 사미승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곳이 없다(到牛無鼻孔處).'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는 그의 오도송(깨달음을 읊은 노래)이다.
忽聞人語無鼻孔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에
頓覺三千是吾家 돌연 우주가 내 집인 줄 깨달았네
六月燕岩山下路 유월에 연암산 내려오는데
野人無事泰平歌 거지는 일 없어 태평가를 읊느니
경허가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사람들과 섞여 지내거나 한가로이 정자에 누워 풍월을 읊으며 지냈다고 전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는 경허가 깨달은 이후의 20여 년간의 행적에 대해서 은둔의 세월이라거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실망하며 울분의 세월을 보냈으리라 본다.
이후 충남 서산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던 경허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준 것은, 1899년 해인사에 초청받음이었다. 51세에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경허는 이로부터 1904년까지 5년간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
그러나 다시 1904년, 경허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승복을 벗고 일반인과 같은 모습으로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으로 경허는 함경도 지역을 떠돌며 서당 훈장 노릇도 하고, 시장 거리에서 술잔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1912년 4월 25일 함경남도 갑산 웅이방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제자인 혜월과 만공은 스승 경허의 열반 소식을 듣고 함경도로 가서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아래는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남긴 글이다.
이후 충남 서산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던 경허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준 것은, 1899년 해인사에 초청받음이었다. 51세에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경허는 이로부터 1904년까지 5년간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
그러나 다시 1904년, 경허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승복을 벗고 일반인과 같은 모습으로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으로 경허는 함경도 지역을 떠돌며 서당 훈장 노릇도 하고, 시장 거리에서 술잔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1912년 4월 25일 함경남도 갑산 웅이방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제자인 혜월과 만공은 스승 경허의 열반 소식을 듣고 함경도로 가서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아래는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남긴 글이다.
心月孤圓 마음 달 홀로 둥근데
光吞萬象 빛은 모든 것을 삼키네
光境俱亡 빛과 경계는 함께 사라지니
復是何物 또 이것은 무슨 물건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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