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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3세가 프러시아에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은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던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충격이었다. 황제가 프랑스의 위신을 크게 떨어트렸다고 생각한 의회는 9월 4일 제정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제정 치하에서 반정부 운동을 했던 급진파 강베타는 시청에서 임시 국방 정부를 구성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830년과 1848년 혁명에서 큰 공을 세운 정치 원로 티에르는 군중이 주도한다는 이유로 국방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파리 코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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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정부의 첫 임무는 이미 프랑스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는 독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독일은 강화를 제의했지만 국방 정부는 거절하고 항전을 결의했다. 그러자 독일은 1870년부터 다음해 1871년까지 파리를 포위했다. 강베타는 기구를 타고 파리를 탈출해 투르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저항세력을 결집하였다.

프랑스 의회

공화당파의 당수 티에르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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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된 파리의 겨울은 극도로 비참하였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 개나 쥐, 동물원의 짐승까지 잡아먹었다. 그 와중에 1871년 1월 18일 프러시아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다. 파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1월 28일 쥘르 파브르와 비스마르크 사이에 휴전조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강베타는 휴전에 반대해 즉시 사임했다.

1871년 2월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는데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선거가 독일군의 점령 하에 조급하게 치러짐으로써 왕당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파리 민중들은 실망했다. '왕당파 의회'는 파리가 아니라 보르도에 자리 잡았다. 의회가 구성되고 나서 티에르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가 들어섰다. 그것 역시 티에르를 좋아하지 않았던 파리 민중을 실망시켰다.

임시 정부의 수반으로서 티에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2월 26일 그와 비스마르크 사이에 알자스와 로렌의 할양,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조건으로 하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결과는 휴전조약에도 결사반대했던 파리 민중들을 분노케 하였다. 강화조약에 따라 3월 18일 독일군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 행진을 하였지만 파리 시민들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굴욕적인 강화조약에 대한 파리 민중들의 불만이 점점 더해갔다. 임시 정부는 그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지난 겨울 파리가 독일에 포위되었을 때 국민방위군에게 나누어 주었던 대포를 회수하려 하였다. 파리 민중들은 3월 13일 파리 코뮌을 만들어 정부에 저항하였다. 코뮌의 중앙위원회는 각 섹션의 장과 국민방위군, 블랑키주의자, 자코뱅파들로 구성되었다.

파리 민중의 저항에 직면해 티에르는 베르사유로 후퇴하여 총공격을 준비했다. 그는 파리 정규군의 사상을 의심해 그들에 의지하지 않고 지방에서 6만 명의 군인을 징집해 베르사유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비스마르크와 협상하여 독일에 포로로 억류된 40만 명의 병력을 추가시켜 파리 탈환을 준비하였다.

티에르는 4월 2일 최초로 파리의 서북부를 공격하였다. 파리에 대한 국부적인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티에르는 파리 코뮌이 항복하길 기대했다. 파리의 총공격이 가져올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 코뮌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1789년의 대혁명과 1730년, 1848년 혁명 경험과 승리의 기억들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

티에르는 5월 21일 파리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22일 새벽 정부군 7만 명이 파리에 진입했다. 정부군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파리 시가지를 차례로 점령해갔다. 티에르는 그것을 "정의와 질서, 휴머니티, 문명이 승리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코뮌의 진압 과정에서 질서는 있었지만 정의와 휴머니티,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부군은 몽마르트 시가전에서 여성과 어린이들도 잔인하게 학살했다.

잔인함은 잔인함을 부르는 법이다. 코뮌군도 잔혹하였다. 그들은 저항에 방해되는 모든 건물들을 불살랐다. 24일 파리는 불바다가 되었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감옥을 습격해 인질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파리 대주교도 이때 살해되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사크레쾨르 성당은 그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코뮌군이 파리 동쪽까지 후퇴하자 독일군이 그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 동쪽 외곽 지역에 1만 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 도망갈 길이 막혀 버린 코뮌군과 코뮌 가담자들은 최후까지 저항하였다. 27일 가장 처참한 전투가 있었고, 28일 코뮌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코뮌의 최후의 희생자들이 숨진 '혁명 투사의 벽(Mur des fédérés)'은 지금까지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총격전이 개시된 5월 21일부터 28일, '피의 주간' 동안 2만에서 2만 5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처형되고 4만 명이 투옥되었다.

혁명 투사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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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희생자를 낸 파리 코뮌은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후 좌파는 그것을 계급투쟁의 신화로 숭배하게 되었고, 우파는 그것을 계기로 급진파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우파들에게 오랫동안 파리는 급진파들의 도시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파리를 '붉은 혁명가들과 무정부주의자, 미친 여자들의 전당'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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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자 집필자 소개

서양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저술 활동 중이다. 현재는 전근대 사회의 샤리바리와 군주의 입성식을 비롯해 19세기 정치적 축제(기념제) 등을 연구중이며 고려대, 순천향대, 충북대 등에서 서양..펼쳐보기

출처

이야기 프랑스사
이야기 프랑스사 | 저자윤선자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프랑스의 역사를 살펴본다. 프랑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면서, 어느 한 분야에 치중하지 않고 역사의 다양한 모습..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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