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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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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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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령 식민지 Crown Colony는 1982년 법령 개정에 따라 영국 속령 British Dependent Territory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2002년 다시 명칭을 영국 해외 영토 British Overseas Territories로 개정하여 현재에 이른다.
* 네팔 왕국1923년까지 영국령 인도 제국 정부에게 외교권을 통제당하여 외무는 오로지 영국 통감(British resident)에 의해 행사되었지만, 다른 토후국들과는 달리 내부 행정에 대해서는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였던 보호국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독립한 1923년 이전까지는 간혹 인도 제국의 토후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Imperial Gazetteer of India(1909)
* 로디지아는 일방적으로 식민지 남로디지아가 자치령을 선포한 것으로,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 소련과의 페르시아 침공 협공으로 점령되어, 영소군 각각이 각 점령지에 주둔하였고 또한 각각의 점령지를 통치하는 분할 통치가 이뤄졌다.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British Mandate for Palestine
영국 국기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문장
국기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기
상선기
문장
external/upload.... △ 영국법상 영역
1920년 4월 25일 ~ 1948년 5월 14일
성립 이전
해체 이후
면적
25,585km2
위치
치소
(治所)
예루살렘하이파(직할구)
텔아비브예루살렘텔아비브(이슈브)
살트암만(트란스요르단)
정치체제
군주
언어
통화
이집트 파운드 (1920년~1927년)
팔레스타인 파운드 (1927년~1948년)

1. 개요2. 역사
2.1. 위임통치 지정까지2.2. 영국의 통치2.3. 분리독립2.4. 아민 알후세이니삽질
3. 참고 문헌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20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이 요르단강 유역을 위임통치한 시대를 말한다. 요르단강의 동쪽 지역은 트란스요르단(이슬람교도 자치정부)의 영역이었고, 요르단강의 서쪽 지역은 1920년 4월의 산레모 결의에 바탕한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의 영역으로서 영국의 직할구였다. 이슈브의 영역을 영국의 직할구로 삼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들을 지나가는 수송망과 통신망을 건설하는 한편으로, 반유대주의를 고려하여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영국법상의 안전장치였다.

실제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인(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대영제국 신민)으로 행세했으며, 이슈브가 다스리는 서부 방면이나 트란스요르단이 다스리는 동부 방면이나 유니언 잭의 깃발 아래 유대인 공동체들과 아랍인 공동체들이 공존했다. 화폐정책의 방면에서는 영국돈과 등가교환이 가능한 팔레스타인 파운드를 발행하는 팔레스타인 통화이사회가 이슈브의 유대인 공동체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앵글로팔레스타인은행 및 트란스요르단의 아랍인 공동체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아랍은행의 요구불예금과 저축성예금을 느슨하게 통제했다.

2. 역사[편집]

Aliyah Bet
1940년대 팔레스타인에 유입되는 유대 난민들. '독일인들이 우리 가정과 집을 파괴했다. 우리의 희망을 파괴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2.1. 위임통치 지정까지[편집]

제1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17년 10월 ~ 1918년 10월 사이의 전투로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을 점령하였다. 영국은 일단 '점령된 적지 행정부(Occupied Enemy Territory Administration, OETA)'를 개청하고, 즉각 군정 체제로 전환했다. 1919년 영국은 프랑스, 미국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를 개최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 분할에 대해 논의하였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승전국들은 국제평화와 협력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1919년 1월 15일 국제연맹 창설을 승인하였다.

국제연맹의 창설은 영국이 군정 체제로 다스리는 요르단강 유역을 포함해 식민통치를 겪고 있는 모든 식민지 주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식민지 백성들의 권리를 대변하지 못했다. 1920년 4월 25일, 국제연맹은 요르단강 유역을 영국이 다스리는 위임통치령으로 설정했으니,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세계 지도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 규정에서는 영국이 시온주의자들과 약속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1917년)'을 포함했는데, 이것은 아랍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알리 빈 후세인 (샤리프 후세인의 아들)과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Sir Vincent Arthur Henry McMahon)이 1915년 1월 ~ 1916년 3월 동안 교환한 '후세인-맥마흔 서한(McMahon–Hussein Correspondence)'[1]에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시온주의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따라, 벨푸어 선언이 반영된 위임통치규정이 그대로 강행되었다. 1920년 7월 1일, 영국은 시온주의자 유대인 헐버트 사무엘(Herbert Louis Samuel, 1st Viscount Samuel)을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하고, 군정 체제를 민정 체제로 전환했다.

2.2. 영국의 통치[편집]

영국이 시온주의자인 헐버트 사무엘을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헐버트의 임명은 자신들의 희망에 반하는 시온주의자 정권의 수립을 예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헐버트의 정책은 유대인 중심적이었다.

1922년 7월 24일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The Palestine Mandate, 1923년 9월 29일 발효)을 승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은 1922년 당시 다수였던 팔레스타인 무슬림과 유대인 인구와 비슷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권리를 무시했다. 위임통치안은 오직 이주민인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의 권리만을 보장하였다. 이후에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정부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무슬림이든 기독교도든)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36년 4월 19일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의 대반란[2]이 발발하고, 하지 아민 알후세이니(Hajj Amin al-Husseini)의 주도 하에 아랍고등위원회(the Arab Higher Committee, AHC)가 창설된다. AHC는 총파업, 유대이민 금지, 납세거부 운동을 주도하며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영국은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1937년 9월 AHC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그 지도자들은 체포, 추방하였다. 또한 영국군은 유대 무장조직 '하가나(ההגנה, Haganah)'[3]와 함께 아랍인 대반란을 진압하였다.이 사건 이후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은 매우 약화되었으며, 반대로 시오니즘 운동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이 해체, 유엔 총회로 계승되면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문제는 유엔이 관할하게 되었다. 1947년 유엔 총회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나 아랍인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가 양쪽 모두 부정적으로 반응했으니, 자연스럽게 유명무실화되었다.

1946년 3월 트란스요르단요르단 왕국으로 분리독립하면서 영국법에 바탕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요르단강의 서쪽으로 축소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4]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들를 대표하여 텔 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선언을 발표하고,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를 개조하여 12명의 각료로 구성한 이스라엘 임시정부를 출범했다. 1948년 5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미국,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파나마,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우루과이, 남아프리카 연방,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프랑스, 쿠바, 스위스,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이스라엘의 주권을 승인했다. 곧이어 이스라엘 임시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과 체코-이스라엘 공수동맹을 체결했으니, 이스라엘 건국전쟁의 승리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군의 철수와 동시에 시작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해체는 영국 본토의 팔레스타인 통화이사회(Palestine Currency Board)가 런던과 텔아비브 및 카이로와 암만에서 동시에 진행한 팔레스타인 파운드의 금융청산 관련으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매우 오래 걸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1948년 8월 18일부터 1948년 10월 1일까지 팔레스타인 파운드를 이스라엘 파운드로 등가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약590억 파운드를 약2700만 파운드로 교환했으니, 이스라엘 본토의 도매물가 인하를 촉진하면서 요르단이집트레바논시리아의 도매물가 폭등을 도모했다. 이에 맞서 요르단 정부는 1950년 7월 1일부터 1950년 9월 30일까지 팔레스타인 파운드를 요르단 디나르로 등가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48년 9월 22일에는 유대인 대학살을 열렬하게 지지한 전범 아민 알후세이니를 추종하는 아랍인들이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정부(?)의 창립을 선언했지만,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접한 유엔 총회그런 거 없다고 매우 차갑게 응대했다. 요르단 왕국이집트 왕국은 그들의 조직망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곧이어 압둘라 1세(요르단 국왕)는 요르단 국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들(60명)의 절반을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특별히 할당했고, 나세르(이집트 대통령)는 아랍 연합 공화국을 출범하면서 가자 지구에 지방의회를 신설했다.

3. 참고 문헌[편집]

  • 홍미정,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와 시온주의프로젝트", 2015

4. 관련 문서[편집]

[1] 영국이 통일 아랍 국가 수립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서한.[2] 반란은 1939년 9월경까지 지속됨.[3] 1920년 창설, 영국의 묵인아래 영국군과 공조하였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이스라엘 방위군으로 전환된다.[4] 하임 바이츠만해외에서 요양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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