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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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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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중앙에 있는 술레 파고 | |||||
국가 | |||||
주 | |||||
면적 | 598.75 km² | ||||
시간대 | UTC+06:30 | ||||
인구 | 8,203,832명[1] | ||||
인구밀도 | 9,286명/km² | ||||
링크 | |||||
미얀마 양곤 관구의 주도이면서, 미얀마 최대도시이자 옛 수도. 인구는 약 820만 명. 도시 이름인 양곤은 '전쟁의 끝' 또는 '평화'라는 의미이다.
2005년 11월 6일, 미얀마 정부가 행정 수도를 핀마나(네피도)로 옮겼다. 그리고 2006년에 공식적으로 수도 지위는 네피도로 넘어 갔다. 미얀마 군부의 주도로 수도가 옮겨졌기에 민주화된 이후 다시 수도를 양곤으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민주정부가 쿠데타로 붕괴되면서 사실상 천도가 불가능한 형편인지라 현재까지도 네피도가 계속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미얀마의 관문이자 최대의 도시는 양곤이다.
미얀마에서는 번화한 도시이지만, 사실 도시 기반 시설 측면에선 동남아시아의 다른 주요 도시들에 비해선 아직 개발이 덜 된 편이다. 그래도 급하게 천도한 네피도에 비하면 낫긴 하다. 한때 영국의 식민도시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양곤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서양식 식민지 시대의 건물이 있어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호치민)과 비슷하고, 고유 양식의 건물이 많은 방콕과 대비된다.
'양곤'이라고 발음하지만, 실제 미얀마어 발음은 양공 /jàɰ̃.ɡòʊɰ̃/에 더 가깝긴 하다.
한때는 영어 표기 'Rangoon'을 따라 랑군이라고 쓰기도 했으나, 현재는 거의 사장된 표기이다. 1983년 아웅산 테러 참사 당시 정부와 방송에서 '랭군 폭탄테러 암살 만행'이라고 표현한 것과, 8888 항쟁을 다룬 1995년 영화 '비욘드 랭군'의 제목이 그 흔적.
한때는 영어 표기 'Rangoon'을 따라 랑군이라고 쓰기도 했으나, 현재는 거의 사장된 표기이다. 1983년 아웅산 테러 참사 당시 정부와 방송에서 '랭군 폭탄테러 암살 만행'이라고 표현한 것과, 8888 항쟁을 다룬 1995년 영화 '비욘드 랭군'의 제목이 그 흔적.
원래 작은 어촌으로, 1855년 영국-버마 전쟁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면서 기존 수도였던 내륙의 만달레이 대신 바다에 가까워 영국인들이 오가기 편한 양곤으로 수도가 옮겨졌다. 옆 나라 태국의 수도 방콕과 달리 서구열강의 식민지배를 거쳤기 때문에, 도시가 전체적으로 영국 식민시대의 풍경이 진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대영제국이 처음에 양곤을 개발했을 당시 도시 인구의 상당수는 인도인이였다. 랑군에 들어온 인도인들은 인도에서 가족 대대로 배운 장사 노하우를 바탕으로 랑군 시에서 중산층으로 성장해나갔던 반면, 장사에 대한 경험은커녕 농업 기술조차 후진적이었던 미얀마 현지인들은 도시의 하류층을 구성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화교들이 현지인들을 누르고 경제권을 장악해나가던 과정과 비슷했다.
하지만 여타 동남아 국가의 화교들과 미얀마의 인도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었다. 미얀마에 들어온 인도인 힌두교도들 상당수는 인도 동부 지역의 브라흐민, 크샤트리야 등의 상층 카스트였는데 이들은 자기보다 가난하고 못 사는 버마 현지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곤 했다.
미얀마에 들어온 인도인 무슬림들은 힌두교도처럼 버마인들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버마 현지인 불교도 여자들을 첩[2]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이게 더 심각한 모욕 아닌가 오히려 버마 민족주의자들은 인도계 무슬림들이 우월한 재력을 바탕으로 버마인 불교도 여자들을 첩으로 삼는 걸 보고 위기의식을 느꼈다. 버마의 민족주의는 이렇게 양곤에서 인도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2차 대전과 버마의 독립, 쿠데타 이후 양곤에 살던 인도인 인구 상당수는 인도로 피난가고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인도계 무슬림 남성과 버마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 상당수는 아직 양곤을 비롯한 미얀마 각지에 남아있다. 양곤에 거주했던 인도인들이 버마인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양곤 시의 주 산업을 유지시키던 것도 이들이었다. 이러한 인도인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양곤 시의 산업은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3]
대영제국이 처음에 양곤을 개발했을 당시 도시 인구의 상당수는 인도인이였다. 랑군에 들어온 인도인들은 인도에서 가족 대대로 배운 장사 노하우를 바탕으로 랑군 시에서 중산층으로 성장해나갔던 반면, 장사에 대한 경험은커녕 농업 기술조차 후진적이었던 미얀마 현지인들은 도시의 하류층을 구성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화교들이 현지인들을 누르고 경제권을 장악해나가던 과정과 비슷했다.
하지만 여타 동남아 국가의 화교들과 미얀마의 인도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었다. 미얀마에 들어온 인도인 힌두교도들 상당수는 인도 동부 지역의 브라흐민, 크샤트리야 등의 상층 카스트였는데 이들은 자기보다 가난하고 못 사는 버마 현지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곤 했다.
미얀마에 들어온 인도인 무슬림들은 힌두교도처럼 버마인들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버마 현지인 불교도 여자들을 첩[2]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2차 대전과 버마의 독립, 쿠데타 이후 양곤에 살던 인도인 인구 상당수는 인도로 피난가고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인도계 무슬림 남성과 버마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 상당수는 아직 양곤을 비롯한 미얀마 각지에 남아있다. 양곤에 거주했던 인도인들이 버마인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양곤 시의 주 산업을 유지시키던 것도 이들이었다. 이러한 인도인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양곤 시의 산업은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3]
인야 호수 인근에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양곤 대학'이 소재해 있다. 이 대학은 영국 식민 시기에 설립된 대학으로, 15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땐 동남아시아 지역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인접 국가에서 많은 유학생이 모여들었던 대학이기도 했다.
허나 미얀마 군부 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었다보니, 군부의 탄압으로 학교가 많이 쇠락했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는데, 1988년 8월 8일 있었던 일명 8888항쟁이 이 대학에서 시작되자, 군부정권은 이것을 빌미로 대학을 장악해(...) 변칙 운영하였다. 교수들은 대학 내 관사에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감금되었고, 강의는 학생들이 모여드는 것을 막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이뤄졌다.
2010년대까지도 출입구에 군인이 지키고 서서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재정적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학 시설이 거의 폐허로 변할 정도로 낡은 상태로 방치됐었다. 민주 정권으로 이양된 2010년대 들어선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롭고, 시설 투자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지만, 2021년 쿠데타 이후로는 또 불확실한 상태다.
허나 미얀마 군부 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었다보니, 군부의 탄압으로 학교가 많이 쇠락했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는데, 1988년 8월 8일 있었던 일명 8888항쟁이 이 대학에서 시작되자, 군부정권은 이것을 빌미로 대학을 장악해(...) 변칙 운영하였다. 교수들은 대학 내 관사에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감금되었고, 강의는 학생들이 모여드는 것을 막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이뤄졌다.
2010년대까지도 출입구에 군인이 지키고 서서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재정적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학 시설이 거의 폐허로 변할 정도로 낡은 상태로 방치됐었다. 민주 정권으로 이양된 2010년대 들어선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롭고, 시설 투자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지만, 2021년 쿠데타 이후로는 또 불확실한 상태다.
테러리스트들이 이곳에 주둔지로 삼고 있어서 미 공군이 침투하여 타격한다.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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