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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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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군주 정보
{{다른 사람|고보연 (축구 선수)}}
|이름 = 곡향강상왕 안원왕<br> 鵠香岡上王 安原王
{{왕족 정보
|본명 = [[고보연]](高寶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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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Honamri Sasin Tomb.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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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 정부인(正夫仁)<br/>중부인(中夫仁) 소부인(小)夫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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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향강상왕 안원왕'''(鵠香岡上王 安原王, ~ [[545년]], 재위 : [[531년]] ~ [[545년]])은 [[고구려]]의 제23대 [[군주]]이다.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향강상왕'''(香岡上王), '''안강상왕'''(安岡上王), '''안악상왕'''(安岳上王)이라고도 하며,[[휘]]는 보연(寶延)으로, 위서(魏書)와 양서(梁書)에는 안원왕의 이름이 연(延)으로 되어있다. 아버지는 [[문자명왕]](文咨明王). [[안장왕]](安臧王)의 동생이다. 531년 안장왕이 죽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보연이 왕위에 올랐다. 키가 크고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박왕(狛王), 곡향강상왕 등으로 기술한다.
'''안원왕'''({{한자|安原王}}, ?<ref>형인 안장왕이 498년 1월에 태자가 되었으므로 최소 498년 1월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ref> ~ [[545년]] [[음력 3월]])은 [[고구려]]의 제23대 [[고구려 국왕|국왕]](재위 : [[531년]] [[음력 5월]] ~ [[545년]] [[음력 3월]])이다. [[문자명왕]]의 둘째 아들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안장왕이 아들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향강상왕'''(香岡上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보연'''(寶延)이며, 《[[위서 (역사서)|위서]](魏書)》와 《[[양서 (역사서)|양서]](梁書)》에는 연(延)으로 기록되어 있다.


== 생애 ==
== 생애 ==
[[장수왕]] 이후에 [[중국]]의 남북조에 대해 조공을 계속하였다. [[북위 (북조)|북위]](北魏)에는 [[532년]]에 사지절 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 散騎常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国公 高句麗王)으로 책봉 되었고 [[동위]](東魏) 시대인 [[534년]]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 더해졌다. [[양나라]](梁)에서는 [[안장왕]]대의 작호인 영동장군 도독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寧東将軍 都督営平二州諸軍事 高句麗王)을 그대로 계승했다. 재위 3년인 [[533년]]에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삼았다.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음력 8월에 누리(;우박의 옛말임)의 재해가 있었다. 재위 10년인 [[540년]]에 음력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싸워서 물리쳤다. [[542년]] 음력 3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다. 음력 4월에 우박이 내렸다. 재위 15년인 [[545년]] 음력 3월에 죽었다. 재위 말년에 왕의 정부인(正夫人)에게 아들이 없자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이 서로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는데, 이때 그들을 후원하는 귀족세력이었던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은 전투를 방불케 하는 무력충돌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세군측의 2,000여 명이 죽었다. 안원왕은 추군과 세군의 권력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 가계 ==
=== 즉위 ===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문자명왕]]의 아들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원왕은 키가 7척 5촌(173cm로 추정<ref>당시 척을 23cm 정도로 본다.https://labongbong.tistory.com/737</ref>)이며 도량이 커서 형인 안장왕이 사랑하였으며, 안장왕이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안원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부왕 : [[문자명왕]](文咨明王, ?~519 재위:491~519)

* 모후 : ?
반면에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은 [[안장왕]]에게 [[복귀군]](福貴君)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그 후손들이 코마씨(狛氏)와 오코마노무라치씨(大狛連氏), 노다씨(野田氏) 등의 성을 사용하면서 이 성씨들의 선조가 안장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531년]] 3월에 [[안장왕]]이 시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시해나 정변과 같은 별다른 설명 없이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사망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어 《[[일본서기]]》의 기록과는 대치된다.
** 왕비 : 정부인(正夫人)
{{인용문-테두리|&nbsp;
:25년(531년) 겨울 12월 병신(丙申) 초하루 경자(庚子, 5일) {{font color|gray|(계체천황을)}} 아이노노미사사키(藍野陵)에 장사지냈다.

:【어떤 책에는 '천황이 28년 갑인년(534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nbsp;그러나 여기에서 25년 신해년(531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nbsp;《[[백제본기]]》에
::&nbsp;“'''신해년(531년)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안라(安羅)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nbsp;&nbsp;이 달에 '''고려([[고구려]])가 그 왕 안('''安''', [[안장왕]])을 죽였다'''.
::&nbsp;&nbsp;또한 들으니 일본의 천황과 태자, 황자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라 하였다.
:&nbsp;이러한 이유로 신해년(531년)은 25년이 마땅하다.
:&nbsp;후세에 교감(校勘, {{font color|gray|고서적들을 비교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하는 자는 알 것이다.】
:|《[[일본서기]]》 권17, 男大迹天皇 繼體天皇光仁天皇<br>[[계체천황]] 25년(531년) 12월 5일|align=center}}

=== 치세 ===
재위 기간 동안 [[북위 (북조)|북위]]와 [[양 (남조)|양나라]]에 조공하며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에 조공하였다.<ref name=":0">《[[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제7, 안원왕</ref>

[[533년]](안원왕 3년) 정월, 왕자 [[양원왕|평성]](平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ref name=":0" /><ref>《[[동국통감]]》 권5, 삼국기</ref>

[[535년]](안원왕 5년) 5월에는 남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고 2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12월에는 우레가 치고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이와 더불어 가뭄이 들자 사신을 파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메뚜기|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망치고 굶주림이 계속되자 안원왕은 직접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살피고 위로하였다.<ref name=":0" />

[[540년]](안원왕 10년) 9월, [[백제]]의 [[성왕 (백제)|성왕]]이 [[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자 정예 기병 5,000명을 보내 물리쳤다.<ref name=":0" />

=== 최후 ===
[[545년]](안원왕 15년) 봄 3월, 사망하였다. 시호를 '''안원왕'''(安原王)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안원왕이 545년 12월, 자식들의 왕위 쟁탈전 중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서 (역사서)|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는 안원왕이 548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

* 《[[일본서기]]》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545년 12월 안원왕이 병들자, 안원왕의 후비인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이 각자 자신들이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중부인의 아버지인 추군(麤群)과 소부인의 아버지인 세군(細群)이 싸움을 벌이다가 추군이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기사 마지막줄의 '狛鵠香岡上王薨也.(박국의 향강상왕이 죽었다)'라는 부분의 해석을 두고, 안원왕의 호칭이 달라진다.
*# "狛鵠'''{{Font color|red|/}}'''香岡上王'''{{Font color|red|/}}'''薨也(코마국의'''{{Font color|red|/}}'''향강상왕이'''{{Font color|red|/}}'''죽었다)"<br>고대 일본어에서 鵠과 國의 발음이 '코쿠(こく)'로 동일하며 '나라(國)'라는 동일한 의미로 쓰여져, 박국(狛鵠)은 고구려를 뜻하는 박국(狛國)과 같은 의미가 되므로 '박국(狛鵠, [[고구려]])의 향강상왕(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해석된다. 이 경우 '향강상(香岡上)'이 호칭이 된다. [[가마쿠라 시대]]에 간행된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釈日本紀)》 비훈(秘訓)과 1669년 간행된 《일본서기》는 '향강상왕'이라 칭한다.
*# "狛'''{{Font color|red|/}}'''鵠香岡上王'''{{Font color|red|/}}'''薨也(코마의'''{{Font color|red|/}}'''곡향강상왕이'''{{Font color|red|/}}'''죽었다)"<br>'박(狛)=코마(こま)'로 발음되며 고(구)려(高麗=코마(こま))와 발음이 같다. 이 경우 '코마(狛=高麗)의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해석되며 '곡향강상(鵠香岡上)'이 호칭이 된다.<ref>[[이홍직 (1909년)|이홍직]], 「일본서기소재(日本書紀所載) 고구려관계기사고(高句麗關係記事考)」, 『한국고대사의 연구(韓國古代史의 硏究)』, 1971, pp.159~162</ref>
{{인용문-테두리|&nbsp;
:이 해(545년) 고려([[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에서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nbsp;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고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nbsp;무술(24일)에 박국(狛國, {{font color|gray|고구려의 멸칭}})의 향강상왕(香岡上王, '''안원왕''')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일본서기]]》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br>[[흠명천황]] 6년(545년)|align=center}}

* 《[[일본서기]]》는 안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양원왕]]이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이며 즉위 당시 8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533년]](안원왕 3년) 정월 양원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모순된다.
*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모순된 기록과 관련하여, 한국 사학계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1사료로 인식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 또한 중요시하며 교차 검증하고 있다.<ref>남무희, 「안원왕·양원왕대 정치변동과 고구려 불교계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45, 2007</ref> 《일본서기》의 기록을 토대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안원왕 말년의 내분과 정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ref>박기환,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5, 1992).</ref>
{{인용문-테두리|&nbsp;
:이 해(545년) 고려([[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고(구)려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nbsp;박왕(狛王, 고구려왕)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nbsp;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麤群)이었다.
::&nbsp;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nbsp;박왕('''안원왕''')이 병들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소부인과 중부인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nbsp;이로인해 세군측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
:라고 하였다.|《[[일본서기]]》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br>[[흠명천황]] 7년(546년)|align=center}}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문자명왕]](文咨明王, ?~519) - 제21대 국왕
* '''어머니''' : 미상
** '''왕비''' : 정부인(正夫人)
** 후비 : 중부인(中夫人)
** 후비 : 중부인(中夫人)
*** 아들 : [[고평성]](高平成, ? ~559 재위:545~559) - 제 24대 국왕 양원왕이 된다.
*** 아들 : [[양원왕]](陽原王, ? ~559) - 제24대 국왕
** 후비 : 소부인(小夫人)
** 후비 : 소부인(小夫人)
*** 아들 : 미상
*** 아들 : [[횡성 고씨]](橫城 高氏) 이름이 기록이 되지 않음.


== 기년, 연호 ==
== 기년 ==

* [[대한민국의 국보 (제101호 ~ 제200호)|국보 제119호]]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에 새겨진 '연가 7년(延嘉七年) [[기미|기미년]]'을 539년으로 비정하고 '[[연가 (연호)|연가]](延嘉)'를 안원왕의 연호로 추정하기도 한다.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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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531년]]||[[532년]]||[[533년]]||[[534년]]||[[535년]]||[[536년]]||[[537년]]||[[538년]]||[[539년]]||[[540년]]||[[542년]]||[[542년]]||[[543년]]||[[544년]]||[[5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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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2864년||2865년||2866년||2867년||2868년||2869년||2870년||2871년||2872년||2873년||2874년||2875년||2876년||2877년||2878년
|-
|-
|[[간지]]||[[신해]]||[[임자]]||[[계축]]||[[갑인]]||[[을묘]]||[[병진 (간지)|병진]]||[[정사 (간지)|정사]]||[[무오]]||[[기미]]||[[경신]]||[[신유]]||[[임술]]||[[계해]]||[[갑자]]||[[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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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

== 기타 ==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에 침투한 백제계 첩자들이 전한 정보가 일부 수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정부인에게는 자식이 없고, 중부인과 소부인에게 자식이 있었는데, 둘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서술되어 있다. 《백제본기》가 서술한 고구려의 사정에 대한 것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용문|[是歲, 高麗大亂被誅殺者衆.【百濟本記云 『十二月甲午(廿), 高麗國細群與麤群戰于宮門, 伐鼓戰鬪, 細群敗, 不解兵三日, 盡捕誅細群子孫. 戊戌(廿四), 狛鵠香岡上王薨也.】]<br>이 해(545)에 고려(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주살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에서 말하기를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과 추군이 궁문에서 북을 치며 싸웠는데,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병사를 해산하지 않고 세군의 자손을 잡아 죽였다. 무술(24일)에 박(狛)의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이 훙하였다.』고 하였다.】<ref>《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6년(545)조</ref>}}
{{인용문|[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百濟本記云 『高麗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麤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麤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二千餘人也.】]<br>이 해에 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웠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 명을 헤아렸다.【백제본기에서 말하기를 『고(구)려는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고 중부인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 구씨(舅氏, 사돈)가 추군이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구씨(舅氏)는 세군이었다. 박왕이 병들자 세군과 추군은 각자 그쪽 부인의 아들을 세우고자 했다. 때문에 세군측 죽은 자가 2천 명을 헤아렸다.』고 하였다.<ref>《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7년(546)조</ref>}}


== 참고 ==
== 같이 보기 ==
* [[백제]]
* [[백제]]
** [[백제 성왕|성왕]] ([[523년]]~[[554년]])
** [[백제 성왕|성왕]] ([[523년]]~[[554년]])
66번째 줄: 119번째 줄:
** [[신라 진흥왕|진흥왕]] ([[540년]]~[[576년]])
** [[신라 진흥왕|진흥왕]] ([[540년]]~[[576년]])
* [[금관가야|가야]]
* [[금관가야|가야]]
** [[구형왕]] ([[521년]]~[[532]]또는[[562년]]
** [[구형왕]] ([[521년]]~[[532]] 또는 [[562년]]
* [[왜나라|왜]]
* [[왜나라|왜]]
** [[게이타이 천황]] ([[507년]]~[[531년]])
** [[게이타이 천황]] ([[507년]]~[[531년]])
72번째 줄: 125번째 줄:
** [[센카 천황]] ([[536년]]~[[539년]])
** [[센카 천황]] ([[536년]]~[[539년]])
** [[긴메이 천황]] ([[539년]]~[[571년]])
** [[긴메이 천황]] ([[539년]]~[[571년]])
* [[북위]]
* [[북위 (북조)|북위]]
** [[원후|북위 숙종 효명제]] ([[515년]]~[[528년]])
** [[북위 효명제|북위 숙종 효명제]] ([[515년]]~[[528년]])
** [[원자유|북위 경종 효장제]] ([[528년]]~[[530년]])
** [[북위 효장제|북위 경종 효장제]] ([[528년]]~[[530년]])
**북위 장광왕 ([[530년]]~[[531년]])
**북위 장광왕 ([[530년]]~[[531년]])
** [[원공|북위 절민제]] ([[531년]]~[[532년]])
** [[북위 절민제]] ([[531년]]~[[532년]])
**북위 폐제 안정순문왕 ([[532년]])
**북위 폐제 안정순문왕 ([[532년]])
** [[원수|북위 효무제]] ([[532년]]~[[534년]])
** [[북위 효무제]] ([[532년]]~[[534년]])
* [[후량|양]]
* [[양 (남조)|양]]
** [[소연|양 고조 무제]] ([[502년]]~[[549년]])
** [[양 무제|양 고조 무제]] ([[502년]]~[[549년]])
* [[동위]]
* [[동위]]
** [[원선견|동위 효정제]] ([[534년]]~[[550년]])
** [[원선견|동위 효정제]] ([[534년]]~[[550년]])
* [[서위]]
* [[서위]]
**서위 양조 경문제 ([[535년]]~[[551년]])
** [[서위 문제]] ([[535년]]~[[551년]])


== 참조 ==
== 각주 ==
<references />
<refer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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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고구려의 역대 국왕}}


[[분류:545년 죽음|안원왕]]
[[분류:생년 미상]]
[[분류:고구려의 군주|안원왕]]
[[분류:5세기 출생]]
[[분류:횡성 고씨| ]]
[[분류:545년 사망]]
[[분류:안원왕]]
[[분류:고구려 국왕]]
[[분류:6세기 한국의 군주]]
[[분류:한국의 불교 군주]]
[[분류:고구려의 불교도]]

2024년 5월 19일 (일) 23:34 기준 최신판

안원왕
安原王
호남리 사신총 벽화
호남리 사신총 벽화
제23대 고구려 국왕
재위 531년 5월 ~ 545년 3월 (음력)
전임 안장왕
후임 양원왕
이름
보연(寶延) · 연(延)
별호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1]
향강상왕(香岡上王)[1]
시호 안원(安原)
연호 연가(延嘉)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498년 1월 전후)
사망일 545년 3월 (음력)
부친 문자명왕
모친 미상
배우자 정부인 · 중부인 · 소부인[1]
자녀 양원왕
종교 불교
능묘 호남리 사신총 (추정)

안원왕(한국 한자: 安原王, ?[2] ~ 545년 음력 3월)은 고구려의 제23대 국왕(재위 : 531년 음력 5월 ~ 545년 음력 3월)이다. 문자명왕의 둘째 아들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안장왕이 아들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향강상왕(香岡上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보연(寶延)이며, 《위서(魏書)》와 《양서(梁書)》에는 연(延)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애[편집]

즉위[편집]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문자명왕의 아들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원왕은 키가 7척 5촌(173cm로 추정[3])이며 도량이 커서 형인 안장왕이 사랑하였으며, 안장왕이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안원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은 안장왕에게 복귀군(福貴君)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그 후손들이 코마씨(狛氏)와 오코마노무라치씨(大狛連氏), 노다씨(野田氏) 등의 성을 사용하면서 이 성씨들의 선조가 안장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531년 3월에 안장왕이 시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시해나 정변과 같은 별다른 설명 없이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사망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어 《일본서기》의 기록과는 대치된다.

 
25년(531년) 겨울 12월 병신(丙申) 초하루 경자(庚子, 5일) (계체천황을) 아이노노미사사키(藍野陵)에 장사지냈다.
【어떤 책에는 '천황이 28년 갑인년(534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25년 신해년(531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백제본기》에
 “신해년(531년)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안라(安羅)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이 달에 고려(고구려)가 그 왕 안(, 안장왕)을 죽였다.
  또한 들으니 일본의 천황과 태자, 황자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신해년(531년)은 25년이 마땅하다.
 후세에 교감(校勘, 고서적들을 비교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하는 자는 알 것이다.】

— 《일본서기》 권17, 男大迹天皇 繼體天皇光仁天皇
계체천황 25년(531년) 12월 5일

치세[편집]

재위 기간 동안 북위양나라에 조공하며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북위가 동위서위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에 조공하였다.[4]

533년(안원왕 3년) 정월,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4][5]

535년(안원왕 5년) 5월에는 남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고 2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12월에는 우레가 치고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이와 더불어 가뭄이 들자 사신을 파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망치고 굶주림이 계속되자 안원왕은 직접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살피고 위로하였다.[4]

540년(안원왕 10년) 9월, 백제성왕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자 정예 기병 5,000명을 보내 물리쳤다.[4]

최후[편집]

545년(안원왕 15년) 봄 3월, 사망하였다. 시호를 안원왕(安原王)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안원왕이 545년 12월, 자식들의 왕위 쟁탈전 중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는 안원왕이 548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편집]

  • 일본서기》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545년 12월 안원왕이 병들자, 안원왕의 후비인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이 각자 자신들이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중부인의 아버지인 추군(麤群)과 소부인의 아버지인 세군(細群)이 싸움을 벌이다가 추군이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기사 마지막줄의 '狛鵠香岡上王薨也.(박국의 향강상왕이 죽었다)'라는 부분의 해석을 두고, 안원왕의 호칭이 달라진다.
    1. "狛鵠/香岡上王/薨也(코마국의/향강상왕이/죽었다)"
      고대 일본어에서 鵠과 國의 발음이 '코쿠(こく)'로 동일하며 '나라(國)'라는 동일한 의미로 쓰여져, 박국(狛鵠)은 고구려를 뜻하는 박국(狛國)과 같은 의미가 되므로 '박국(狛鵠, 고구려)의 향강상왕(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해석된다. 이 경우 '향강상(香岡上)'이 호칭이 된다. 가마쿠라 시대에 간행된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釈日本紀)》 비훈(秘訓)과 1669년 간행된 《일본서기》는 '향강상왕'이라 칭한다.
    2. "狛/鵠香岡上王/薨也(코마의/곡향강상왕이/죽었다)"
      '박(狛)=코마(こま)'로 발음되며 고(구)려(高麗=코마(こま))와 발음이 같다. 이 경우 '코마(狛=高麗)의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해석되며 '곡향강상(鵠香岡上)'이 호칭이 된다.[6]
 
이 해(545년) 고려(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에서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고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24일)에 박국(狛國, 고구려의 멸칭)의 향강상왕(香岡上王, 안원왕)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 《일본서기》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
흠명천황 6년(545년)
  • 일본서기》는 안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양원왕이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이며 즉위 당시 8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533년(안원왕 3년) 정월 양원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모순된다.
  •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모순된 기록과 관련하여, 한국 사학계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1사료로 인식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 또한 중요시하며 교차 검증하고 있다.[7] 《일본서기》의 기록을 토대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안원왕 말년의 내분과 정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8]
 
이 해(545년) 고려(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고(구)려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박왕(狛王, 고구려왕)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麤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안원왕)이 병들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소부인과 중부인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이로인해 세군측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
라고 하였다.
— 《일본서기》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
흠명천황 7년(546년)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문자명왕(文咨明王, ?~519) - 제21대 국왕
  • 어머니 : 미상
    • 왕비 : 정부인(正夫人)
    • 후비 : 중부인(中夫人)
      • 아들 : 양원왕(陽原王, ? ~559) - 제24대 국왕
    • 후비 : 소부인(小夫人)
      • 아들 : 미상

기년[편집]

안원왕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서력 531년 532년 533년 534년 535년 536년 537년 538년 539년 540년 542년 542년 543년 544년 545년
간지 신해 임자 계축 갑인 을묘 병진 정사 무오 기미 경신 신유 임술 계해 갑자 을축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일본서기
  2. 형인 안장왕이 498년 1월에 태자가 되었으므로 최소 498년 1월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3. 당시 척을 23cm 정도로 본다.https://labongbong.tistory.com/737
  4.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제7, 안원왕
  5. 동국통감》 권5, 삼국기
  6. 이홍직, 「일본서기소재(日本書紀所載) 고구려관계기사고(高句麗關係記事考)」, 『한국고대사의 연구(韓國古代史의 硏究)』, 1971, pp.159~162
  7. 남무희, 「안원왕·양원왕대 정치변동과 고구려 불교계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45, 2007
  8. 박기환,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5, 1992).
전 대
안장왕
제23대 고구려 국왕
531년 - 545년
후 대
양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