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France]

유럽 대륙의 서부,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에 위치하며, 유럽에서 3번째로 큰 나라이다. 987년 프랑크 왕국이 멸망하고 카페 왕조 창시로 최초의 국가가 형성되었다. 절대왕정과 제정, 공화정을 반복하다가 1871년 공화정부 수립 이후 오늘에 이른다.

유럽 대륙의 서부, 지중해대서양 사이에 위치하며, 유럽에서 3번째로 큰 나라이다. 987년 프랑크 왕국이 멸망하고 카페 왕조 창시로 최초의 국가가 형성되었다. 절대왕정과 제정, 공화정을 반복하다가 1871년 공화정부 수립 이후 오늘에 이른다. 국기의 구성은 청색, 백색, 적색으로 이루어진 삼색기이며 각각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해 온 국가 중 하나이다. 유럽의 대표적인 농업 생산국이기도 하다.

정식 명칭은 프랑스공화국(la République française)이다. 동쪽은 이탈리아·스위스·독일, 북동쪽은 룩셈부르크·벨기에와 접하고, 북서쪽은 영국해협을 건너 영국과 마주하며, 서쪽은 대서양, 남쪽은 지중해와 에스파냐로 이어진다. 육각형 모양의 본토(métropole) 외에 해외 프랑스령은 해외영토(départements d’outre-mer et régions d’outre-mer, DOM-ROM)와 해외자치지역(collectivités d’outre-mer, COM), 특별자치지역(Collectivité sui generis)으로 구분된다. 해외영토에 속하는 곳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위치한 마르티니크섬(Martinique)와 과들루프섬(Guadeloupe), 아프리카 남동부 인도양의 레위니옹섬, 아프리카 동부 모잠비크 해협의 마요트섬, 남아메리카 북동부의 프랑스령 기아나가 있다. 해외자치지역에 속하는 곳은 생피에르미클롱, 왈리스 퓌튀나 제도(Wallis-et-Futuna), 프랑스령 폴리네시아(Polynésie française), 생바르텔레미(Saint-Barthélemy), 생마르탱(Saint-Martin)이 있으며, 뉴칼레도니아(Nouvelle-Calédonie)는 특별자치지역이다. 중앙아프리카·콩고·가봉·세네갈·차드 등과 프랑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5개의 해외영토를 포함한 주 단위의 18개 레지옹(Regions)과 각 주 아래 101개의 데파트망(Departments), 대도시와 작은 마을들을 일컫는 지방행정단위인 코뮌(commune)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랑스코르시카섬

참조항목

참조항목
파리 프랑스의 수도.
센강 프랑스 북서부를 흐르는 강.
프랑스어 라틴어에서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등과 함께 분화되어 국민어(國民語)로 성장한 로망스제어의 한 갈래.
에펠탑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높은 철탑.
유럽연합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연합기구이다. 2012년 지역공동체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프랑스령폴리네시아 남태평양 중부의 광대한 해역에 분포하는 프랑스의 해외령(海外領).
라마르세예즈 프랑스의 국가(國歌).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
프랑 프랑스 통화의 기준단위였으며, 프랑스 프랑·스위스 프랑·벨기에 프랑을 통합하여 칭하였으나 유로로 통합되면서 주로 스위스 프랑에 쓰이고 있다.
국제연합 전쟁 방지와 평화 유지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 활동은 크게 평화유지활동·군비축소활동·국제협력활동으로 나뉘며, 주요기구와 보조기구·전문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1 . 자연

1) 지질 ·지형

알프스의 여러 봉우리들
알프스의 여러 봉우리들
프랑스 지형

프랑스의 지형은 크게 산지와 평지로 나눌 수 있다. 산지는 이탈리아·스위스 국경지대에 높이 솟아 있는 알프스와, 에스파냐와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의 2대 습곡산맥(알프스 조산운동으로 형성되었음) 이외에도 고생대 석탄기(3억 5,000만년 전)의 헤르시니아 조산운동에 의하여 형성된 아르모리캥산지, 중앙부의 마시프상트랄(중앙 산지), 북동부의 보주·아르덴산맥 등 준평원화한 노년기 산지가 있다.

동부의 쥐라산맥은 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높은 산지이며 알프스 조산운동으로 형성되었다. 중앙산지 북부의 오베르뉴 고지(보주산맥과 중앙산지 사이에 있는 랑그르 고지도 헤르시니아 산계의 잔편()에 속한다. 평지로는 파리분지·아키텐분지와 같은 구조분지, 손강()·론강()이나 라인강() 연안의 알자스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지구성() 평야, 강가에 발달해 있는 곡저()평야, 론강 하구에서 피레네산맥에 걸친 지중해 연안, 플랑드르해안, 코르시카섬의 동해안에 펼쳐진 연안평야가 있다.

알프스산맥은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북쪽으로 휘었다가 활 모양을 이루며 동쪽으로 달리지만, 프랑스알프스는 지중해에 육박하는 해안 알프스로부터 몽블랑 산군()으로 이어져 남북으로 달린다. 이 산맥은 신생대 제3기의 대규모 조산운동으로 생긴 습곡산맥인데 그후의 침식작용에 의하여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프랑스알프스의 평균고도는 1,100m로 스위스알프스의 1,800m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편이다.

그러나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에 솟아 있는 몽블랑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최고봉이다. 이 몽블랑 산군에는 몽블랑을 비롯하여 에귀유베르트(4,122m)·그랑조라스(4,208m) 등의 화강암 침봉군()이 솟아 있을 뿐만 아니라, 보송·메르드글라스·제앙 등의 빙하가 발달되어 있으며 권곡()·U자곡()·현곡() 등의 빙식지형이 도처에 남아 있다. 레만·안시·부르제 등의 빙식호도 산재해 있어 고지대의 초원(alp)과 더불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산풍경이 펼쳐진다.

피레네산맥은 프랑스·에스파냐 국경에 가로놓여 있으며 대서양비스케이만()과 지중해 쪽의 리옹만()을 연결하는 전장 440km의 대산맥이다. 알프스와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으나 정상은 알프스에 비하여 낮다. 중앙의 주능선은 화강암질의 고생층으로 이루어지고 남북의 산록에는 중생층과 고()제3기층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과거의 빙기()에는 넓은 범위에 걸쳐 빙하가 발달되어 있었으나 산악 빙하는 산맥 중앙부의 북사면() 상단 일부에 존재할 뿐 현재는 빙식지형이 적다. 최고봉은 아네토(3,404m)이고 가론강()의 수원()은 여기서 시작된다. 산지의 사면을 흘러내리는 가론강에는 거대한 폭포를 수반하는 급류가 많다.

쥐라산맥은 프랑스 알프스 북서쪽, 스위스·독일·프랑스에 걸쳐 있으며 알프스 조산기에 퇴적층, 특히 석회암으로만 습곡이 이루어진 산맥이다. 이 산맥에서는 많은 하천이 발원하여, 도처에 계곡이 발달되어 있고 석회암 동굴·종혈()·지하하천도 발달해 있다. 최고봉은 크레드라네즈(1,723m)이다.

마시프상트랄은 헤르시니아 조산기의 고생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랑스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대()산괴이다. 북서쪽 루아르강() 유역의 평야와 남서쪽 가론강 유역의 아키텐분지, 동쪽의 론강 하곡 사이에 걸쳐 전개되어 있으며, 면적 약 8만 5000㎢로 국토 총면적의 1/6을 차지하고 프랑스의 주요 하천과 그 지류의 분수계()를 형성한다. 이 산지는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화산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르퓌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모양의 화산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평균고도는 900m 내외이며, 주봉() 몽도르의 한 봉우리인 퓌드상시(1,886m)가 최고봉이다.

중앙산지의 남부 코르스 지방에는 타른강()이 석회암 대지를 침식하여 이루어진 계곡의 절벽이 발달되어 있다. 루아르·알리에·셰르·크뢰즈강() 등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아르모리캥산지도 고()습곡산맥인데, 고생대 말기부터 준평준화·곡동() 등을 거쳐 제3기의 융기작용으로 평균고도 177m의 완만한 구릉지대를 형성하였다.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사이에는 함몰()저지인 렌분지가 펼쳐져 있으며 빌렌강()이 횡곡()을 형성한다.

보주산맥은 라인강을 따라 달리는 남북 125km, 동서 40∼90km의 산지이다. 북부는 사암질()의 구릉, 남부는 결정질() 암석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높은 지형인데 빙식지형이 남아 있다. 최고봉은 발롱드게브빌레르(1,424m)이다. 동쪽은 단층애()를 이루며 라인 지구대로 이어진다. 아르덴산지는 벨기에로부터 뻗어 나오며 평균고도 400∼600m로 북서부는 낮고 남동부로 갈수록 차차 높아진다. 이 지역도 고생대의 산지가 준평원화하였다가 다시 융기한 곳인데 예로부터 전략상의 요지이다.

아르덴고원과 보주산맥으로 대표되는 북동부 지역에는 3개의 낮은 ‘통로’, 즉 프랑스 북부평원·로렌 지방·벨포르 통로가 있어 역사적으로 독일군의 침입로가 되어 왔다. 파리분지는 서쪽으로 아르모리캥산지, 동쪽으로 보주산맥, 남쪽으로 중앙산지, 북쪽으로 아르덴고원, 북서부는 영국해협에 둘러싸여 있는 구조분지인데, 동서 400km, 남북 350km, 면적 18만㎢로 프랑스 전국토의 1/3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중생층·제3기층이 평균 900m의 두께로 퇴적되어 있다. 수도 파리가 있는 프랑스의 심장부이기 때문에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라고 불리며 파리 남동쪽의 가디네는 해발고도가 2,664m에 달한다.

파리분지 동부에서는 제3기의 침식면을 나타내는 판상()의 경암층()이 연층()과 교대로 노출되어 구릉을 이루는 케스타 지형이 나타난다. 이 분지는 안쪽(파리 쪽)으로 완만한 사면을 이루고 동사면은 급경사를 이루며, 센강()의 여러 지류는 파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영국해협으로 흘러든다. 아키텐분지는 북쪽의 아르모리캥산지, 동쪽의 마시프상트랄 남쪽의 피레네산맥에 둘러싸여 3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은 비스케이만에 면하고 있는 충적분지이다. 파리분지와는 푸아투 안부()의 관문으로, 지중해 해안과는 카르카손의 관문으로 통한다. 지질 구조는 파리분지보다 훨씬 단순하여 거의 수평인 제3기층이 면적의 약 3/4을 차지한다.

마시프상트랄에서 서류(西)하는 강과 피레네로부터 북류()하는 강의 대부분은 가론강에서 합류하는데, 가론강은 분지의 중앙을 북서쪽으로 관류하며 하류에서는 지롱드강()이 되어 넓은 하구()를 이루면서 비스케이만으로 유입한다. 비스케이만 연안에는 사구()·석호()·습지가 발달해 있다. 파리분지·중앙고지의 동사면()과 쥐라산맥·알프스산맥 사이에는 남북 방향의 론·손 지구가 있으며, 론강은 지중해로 흘러들면서 넓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특히 마시프상트랄의 남쪽에는 상당한 규모의 해안평야가 전개되어 지중해 연안의 평야지대, 즉 좌안()의 프로방스, 우안의 랑그도크의 좁고 긴 두 해안평야를 이룬다. 그러나 알프스산맥이 지중해에 임하는 지역에는 평야가 아주 적다. 한편 코르시카섬은 산지가 많으며 최고점은 2,710m의 친토산()이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피레네산맥 유럽 남서부, 프랑스와 에스파냐 양국의 국경을 이루는 산맥.
마시프상트랄 프랑스 중남부에 있는 고원 모양의 산악지대.
쥐라산맥 프랑스·스위스·독일에 걸쳐 있는 산맥.
파리분지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하여 원형으로 펼쳐지는 분지.
아키텐분지 프랑스 남서쪽에 있는 분지.
구조분지 단층, 습곡 같은 구조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분지를 말한다. 또한 지질 구조적으로 지층이 중심부로 향하고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분지상(盆地狀)을 띤 지역도 구조분지라고 한다. 단층각분지, 지구분지, 곡강분지 등의 총칭이다. 케스타(cuesta)지형을 가진 파리분지나 런
손강 프랑스 동부를 흐르는 강.
론강 프랑스 남동부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드는 강.
라인강 중부 유럽 최대의 강.
곡저평야 하천이나 빙하에 의해서 골짜기 안에 평탄지가 만들어진 곳이다. 거주지, 교통로로 이용되어 온다.
코르시카섬 지중해 북부 사르데냐섬 북쪽 보니파시오 해협 사이에 있는 프랑스령 섬.
몽블랑산 알프스산맥의 최고봉. 높이 4,807m.
가론강 프랑스 남서부를 흐르는 강.
케스타 한쪽은 급경사, 반대쪽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구릉이다. 무른 암석은 빨리 침식되고, 단단한 암석 부분이 구릉으로 남게 되어 비대칭적인 산등성이를 이루는 것이다. 파리 분지, 런던 분지가 전형적인 예이다.
지롱드강 프랑스 남서부를 흐르는 가론강(江)의 만상(灣狀) 하구(河口)에 대한 명칭.
보주산맥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산맥.
아르모리캥산지 프랑스 서부에 있는 산괴(山塊).
센강 프랑스 북서부를 흐르는 강.
알프스 유럽의 중남부에 있는 큰 산계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걸쳐있다. 최고봉은 높이 4,807m인 몽블랑이다. 피레네산맥과 함께 북쪽의 유럽대평원과 남쪽의 지중해 연안지역을 기후적·문화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2) 기후

생트로페 마을
생트로페 마을

프랑스의 기후는 유럽 기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기후는 보통 해양성·대륙성·지중해성으로 나누어지는데, 프랑스에는 이 세 가지 기후가 모두 나타난다. 이는 산지의 위치·높이와 더불어 기후에 지역차가 나타나는 요인이 된다. 겨울에는 쥐라·알프스·마시프상트랄 등의 산지기압 지역이 되는데, 때에 따라서는 아조르즈 기압, 아시아 대륙 기압과 연속하여 기압의 산맥을 형성한다. 이때 기압 산맥의 양쪽, 즉 영국·지중해기압이 되고 사이클론성()의 바람이 자주 분다.

비스케이만()에서 발생하는 사이클론은 이따금 카르카손 관문을 거쳐 지중해까지 도달하는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영국해협 쪽으로 향한다. 이 사이클론으로 말미암아 겨울에도 비가 오는 경우가 많으며, 미스트랄이라고 불리는 차가운 북풍이 부는 것도 이 사이클론 때문에 발생하였다. 여름이 다가오면 기압은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이 기간 동안 알프스에서는 비가 내린다. 이와 함께 사이클론의 경로도 북쪽으로 옮아간다. 따라서 프랑스의 중부나 동부에 내리는 여름비는 주로 국지적 대류() 현상에 의한 것이다.

겨울과 여름 사이에 지중해안에도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봄은 아주 짧으며 5월에 들어서면 이미 건조한 여름을 맞이하게 된다. 여름에는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의 남서부로 밀려가는 안티아조르즈사이클론의 영향으로 서해안에 약간의 비가 올 뿐 일조량이 가장 커진다. 그러나 비스케이만의 냉수대() 때문에 기온은 그리 많이 올라가지 않는다. 한편 피레네의 서부에서는 가을에 강수량이 가장 많지만 여름에 호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또한 아키텐분지·파리분지의 한복판은 건조하며 주변지역으로 나갈수록 강수량이 많아진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2,000mm인데 강수량이 많은 곳은 피레네 서부, 마시프상트랄·보주·알프스 산맥 등의 높은 지대이다. 기온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특히 리비에라 해안의 겨울 기온이 높으며 북쪽으로 갈수록 기온은 떨어진다. 이밖의 산지에서도 기온은 낮아진다. 연평균기온을 비교하자면 몽블랑산 정상이 -6.5℃로, 이는 샤모니몽블랑보다 23.6℃나 낮은 기온이다. 또한 클레르몽페랑(388m)이 10℃인 데 비해 퓌드돔산(1,468m)은 3℃이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이베리아반도 유럽의 남서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반도.
쥐라산맥 프랑스·스위스·독일에 걸쳐 있는 산맥.
마시프상트랄 프랑스 중남부에 있는 고원 모양의 산악지대.
미스트랄 프랑스 중부에서 지중해 북서안을 향해 부는 한랭건조한 국지풍이다. 델타지대와 리옹만에서 특히 강하다. 유럽 중부에 고기압, 지중해 서부에 저기압에 위치하여 론강의 계곡을 따라 이 바람이 불어 내려오는 것인데, 매우 한랭하여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 최고 풍속으로 초
몽블랑산 알프스산맥의 최고봉. 높이 4,807m.
보주산맥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산맥.
알프스 유럽의 중남부에 있는 큰 산계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걸쳐있다. 최고봉은 높이 4,807m인 몽블랑이다. 피레네산맥과 함께 북쪽의 유럽대평원과 남쪽의 지중해 연안지역을 기후적·문화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3) 식생

오흐틴 소나무 숲
오흐틴 소나무 숲

프랑스의 삼림은 5만 8천 평방마일의 규모를 차지마며, 총 국토면적의 약 20%로 영국의 5%보다 훨씬 많지만, 독일의 27%보다는 적다. 삼림은 동부의 보주산지 일대에 많이 형성되어 있다. 빙기 한랭기의 프랑스는 현재의 스칸디나비아와 마찬가지로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었다. 기후가 온난·습윤해짐에 따라 낙엽활엽수림으로 바뀌어갔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다면 지중해 연안의 특히 건조한 지역, 대서양 연안의 돌출지역, 고지, 석회암지역, 늪을 제외한 프랑스의 전 국토는 낙엽활엽수림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보주·쥐라·알프스·피레네산맥 등에는 지금도 침엽수림이 남아 있다. 이들 고산지역 삼림 한계의 위쪽으로는 초지가 전개된다.

프랑스 남서부의 란덴스(Landes)에 약 3,680 평방마일에 달하는 해양 소나무로 뒤덮인 숲이 있다. 이 숲은 서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이 숲에서 나오는 소나무는 전 유럽으로 수출된다. 휴양지의 편의시설, 오두막 등에 사용된다. 

침엽수로는 소나무가 많고, 낙엽활엽수로는 떡갈나무가 많다. 이밖에 낙엽활엽수로는 물푸레나무·너도밤나무·개암나무·미루나무 등이 많다. 지중해안 저지에는 건조한 여름이 길어서 낙엽활엽수림은 형성되지 않으며, 상록활엽수와 관목이 대신 들어서 있다. 즉 올리브·협죽도·측백나무·주목 등 지중해 식생을 나타낸다. 이중 올리브나무는 지중해 지역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리비에라 해안(Côte d'Azur)은 겨울에도 따뜻하고 바람이 막히는 위치에 있으므로 오렌지가 재배된다. 이밖에 외래종의 야자나무·아카시아·유칼리 등이 많아, 열대 경관을 나타내며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 바르 데파르트망(Bar Department)에서는 코르크나무가 많이 재배된다. 지중해 지역에서는 일단 삼림이 파괴되면 초원이 되지 않고 관목이 자란다.

프랑스의 광범위한 국토의 대부분은 풍부한 영양을 지닌 토양으로 뒤덮여있다. 온화화 기후조건에서 자라는 낙엽성 삼림의 토양은 훌륭한 농업적 가치를 지닌다. 프랑스 북서부의 높은 강우량과 다소 서늘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탄산염과 미네랄 등이 침식되어 다른 지역보다 더 높은 산도를 가진 갈색 토양이 생성된다. 북유럽 토양의 특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알프스 유럽의 중남부에 있는 큰 산계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걸쳐있다. 최고봉은 높이 4,807m인 몽블랑이다. 피레네산맥과 함께 북쪽의 유럽대평원과 남쪽의 지중해 연안지역을 기후적·문화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보주산맥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산맥.
쥐라산맥 프랑스·스위스·독일에 걸쳐 있는 산맥.

4) 서식 동물

프랑스에 서식하는 동물군은 대체로 다른 서유럽 국가와 비슷하다. 몸집이 큰 포유류로는 붉은 사슴, 노루, 그리고 멧돼지가 있으며 이들은 프랑스인들이 즐기는 사냥에서 그 대상이 되곤 한다. 알프스 산맥에는 카모이크(chamoix)와 아이벡스(ibex)가 희귀종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설치류로는 산토끼와 토끼가 있으며, 프랑스의 숲과 들판에서 종종 발견된다. 육식동물에는 여우, 야생 고양이가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 종에는 오소리, 수달, 비버, 거북이, 갈색 곰이 있다. 바다표범은 프랑스 해안에서 거의 사라졌다. 프랑스에 서식하는 조류는 서유럽 국가들과 비슷하며 남부 지역에서는 플라밍고, 이집트 독수리, 벌잡이새 등을 발견할 수 있다.

5) 자원

암염
암염

프랑스의 로렌 일대의 철광은 유럽 최대의 것으로, 프랑스의 선철() 생산량은 오랫동안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를 달린다. 철광은 쥐라기층의 중부와 하부 사이에 있다. 로렌 일대의 철광과 벨기에 국경의 석탄은 넓은 면적에 걸쳐 산재해 있어 집중적 공업지역을 형성하기에는 불편하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소도시 국가가 생겼다. 이와 같은 사실은 큰 지리적 의미를 준다. 즉 프랑스는 소()도시 국가이고 이들 소도시들이 이따금 전통 있는 공업을 이루어 주변 농촌지역의 중심지가 되어 온 것이다. 바로 이 점으로 도시와 농촌인구의 균형이 유지되고 자급자족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벨기에 국경 부근의 노르파드칼레주() 파드칼레·노르 데파르트망(Department) 지역에서는 프랑스 전체 석탄 생산량의 42%, 동쪽의 로렌과 모젤 지역에서는 32%를 생산하며, 그밖에 소규모의 석탄 생산지로는 생테티엔, 루아르, 블랑주, 아키텐, 프로방스, 오베르뉴, 도피네 등이 있다. 석유·천연가스는 피레네 산록의 라크에서 산출, 정제되어 송유관으로 수송된다. 이밖에 보즈의 암염()·칼리염()은 독일에 버금가는 생산량을 보인다. 식용염()의 대부분은 바다에서 얻고 있다. 프로방스에서는 보크사이트가 유명하다. 알프스·피레네·마시프상트랄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은 발전수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 일대는 프랑스의 주요 전원()지대이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알프스 유럽의 중남부에 있는 큰 산계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걸쳐있다. 최고봉은 높이 4,807m인 몽블랑이다. 피레네산맥과 함께 북쪽의 유럽대평원과 남쪽의 지중해 연안지역을 기후적·문화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2 . 주민

1) 인종

유럽에서도 프랑스는 일찍부터 인간이 정착한 곳으로, 네안데르탈인()보다도 10만 년을 앞선다. 구석기시대인()은 주로 수렵생활을 하였으며, 구릉의 주변과 마시프상트랄·피레네의 석회암지대 동굴 속에서 생활하였다. 도르도뉴는 현재 빈민지역이 되어 있지만 당시 인간의 유물·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 동굴에 남아 있는 벽화는 짐승과 수렵에 관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삼림이 늘어나고, 자유로운 수렵장인 초원이 줄어듦에 따라 인간의 생활도 ‘수렵’에서 ‘채집’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후 농업과 상업이 시작되어 지중해 서부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인간이 프랑스로 이주해오게 되었다. 이들은 지중해인()이라고 불리는데 작은 키, 마른 몸에 두상이 긴 편이고 머리털과 눈은 검다.

또한 서(西)아시아로부터 서진(西)하여 뢰스(황토) 지대를 따라 농업을 영위했던 사람들이 알프스인()인데, 이들은 짧은 두상이 특징이다. 알자스·파리 분지 등에서 살다가 알프스 산지로 거주지가 확대됨에 따라 알프스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마시프상트랄·피레네·아르모리카 등에도 널리 퍼졌다. 북방인()이라고 불리는 인종은 러시아의 스텝 지대에 살고 있던 수렵민으로 뢰스 지대 서쪽에서 주로 수렵에 종사하였다. 켈트인()도 이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시대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프랑스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키가 크고 머리털이 블론드이며 푸른 눈에 두상이 길다. 이들 각 인종이 프랑스에서 혼합되었으며, 특히 파리분지는 인종 혼합의 중심지였다.

인종의 혼합은 고대·중세를 통하여 계속되었다. 로마시대 및 그 이후에도 많은 침입자가 있었으며, 인종 혼합을 거듭하여 현재의 프랑스인()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인종적 특성이 농도 짙게 남아 있는 지역도 있다. 피레네 서부 지방의 바스크인()은 에스파냐 바스크인의 일부이며 바스크어()를 사용한다. 노르망디인()은 브리튼어()를 사용하는 켈트계() 주민이다. 이들은 프랑스의 소수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2) 언어

프랑스의 국가 공식언어는 프랑스어이다. 프랑스어는 프랑스인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방언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진다. 푸아티에·리모지·리옹을 잇는 선의 남부에서 사용되고 있는 오크어는 비교적 라틴의 모어에 가까우나, 말로만 사용되었을 뿐이고 글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드프랑스의 제후들이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북부의 오일어 중에서도 파리에서 사용되는 ‘프랑시앵(francien)’이 문장어()의 표준이 되었고, 마침내 프랑스 전체에서 쓰이게 되어 이른바 ‘고대 프랑스어’가 이루어졌다.

프랑스어는 여러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양한 언어에 노출되며 자신들의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프랑스의 동부와 북부 지방에서는 게르만어족인 알사티아어(Alsatian)와 플랑드르어(Flemish)의 영향을, 남부 지방에서는 오키타어(Occitan), 코르시카어Corsican), 카탈로니아어(Catalan) 등 라틴어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특별히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고 인접국가의 언어로 변화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15세기 이후 프랑스 글은 모두 프랑시앵으로 쓰였으며 파리는 문화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프랑스어는 국제어로서 견고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이미 독립한 프랑스 식민지에서도 프랑스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국제연합(UN) 등의 국제회의 등에서도 영어와 나란히 공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유럽연합의 탄생부터 프랑스어가 공식언어로서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 정부는 브렉시트 이후 영어를 제외하고 각종 회의 및 문서에서 프랑스어 사용도를 높이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3) 인구

17세기 종교적 박해로 인해 프랑스에서 40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하였으며 이들은 캐나다 동부의 퀘백 지역과 루이지아나 등에 정착하였다. 오늘날 퀘백지역이 북미대륙의 작은 프랑스라고 불리는 이유다. 또 프랑스의 식민지 영토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에도 정착하였다. 탈식민지화 이후 약 40%의 프랑스인들이 프랑스로 회귀하였다. 1830년 이후로 프랑스로 이민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20세기 초 정치적 난민을 포함한 노동, 교육을 위해 이주하는 이민자들에게 가장 관대한 국가로 인식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약 430만명의 유럽인들이 프랑스로 입국해 왔으며, 당시 인구의 6%에 달하였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스위스등과 같은 이웃국가 출신이며 빠르게 프랑스인들에 동화되었다. 2018년 기준 프랑스로의 이민은 유럽연합국 출신이 20.8%로 가장 많다. 유럽연합은 회원국 내 거주 및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이민 절차가 까다롭지 않다. 이와 같은 이유로 2004년 신규 회원국이 된 중동부 유럽국가들과 남유럽 국가에서 프랑스를 찾고 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20.2%, 아시아에서 14.1%, 나머지는 유럽과 기타 국가들이 차지한다.

프랑스의 인구는 1801년의 2734만 명에서 1911년에는 3960만, 1975년에는 5226만, 1981년에는 5409만, 1989년에는 5563만, 2002년에는 5940만, 2006년에는 6087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현저한 인구의 감소를 경험하였다. 20세기 초엽에 들어와 인구 증가율이 정체되고 노령화 현상을 보였으나, 그후 경제발전과 더불어 증가율은 회복되었다. 2020년 기준 프랑스 인구는 67,848,156명이며,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는 약 222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파리를 포함한 수도권에는 약 1208만명이 거주한다. 프랑스의 인구 밀도는 2018년 기준 제곱킬로미터당 122명으로 세계 97위에 해당한다.

인구의 도시집중도 뚜렷한데, 파리의 인구는 감소하고 주변 수도권 지역이 급증하고 있다. 원래 파리에는 브르타뉴 지방으로부터 유입하는 인구가 많았으나 지금은 전국 곳곳에서 몰려들고 있다. 대도시는 리옹·마르세유· 등이다. 도시 이외에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곳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 부슈뒤론현()인데 론강 하구의 소택지()가 간척되어 새로운 정착자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마시프상트랄 서·남부의 여러 현()이나 브르타뉴와 같이 인구가 전출하여 감소 경향을 보이는 산촌도 있다.

4) 종교

1905년 정교분리법이 공포되었으며 1958년 제정된 헌법에서 프랑스는 비종교적 공화국임을 천명하였다. 1978년에 개인의 종교는 사생활 관련 정보로서 수집이 금지됨에 따라 공식적인 통계는 집계되지 않는다.다만 추정치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체 인구의 63-66% 정도의 인구가 로마가톨릭 신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약 10%만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가한다. 프랑스 북서부의 브리타니-벤데(Brittany-Vendée)와 동쪽의 그랑테스트, 보주(Vosges), 쥐라(Jura), 리옹, 알프스 북부 지역은 타지역보다 로마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높다. 이슬람교 신자는 7~9%로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 지역에 거주하던 이민자들이 프랑스 본토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이외 불교 0.5~0.75%, 유대교 0.5~0.75%, 기타 0.5~1.0%, 무교는 23~28%에 달하였다.

3 . 역사

1) 선사시대

카르나크 열석 지대
카르나크 열석 지대

프랑스 국토에 인류가 정주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에서도 이른 편에 속한다. 구석기시대의 여러 문화의 명칭(무스티에·오리냐크·마들렌 등)은 모두 프랑스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아키텐주() 도르도뉴현()의 크로마뇽에서는 현생인류()의 인골()이 발견되었고, 이들 크로마뇽인()이 남긴 동굴과 벽화는 남서부(특히 베제르 하곡의 라스코 동굴) 지방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는 다른 인종이 북부 프랑스에 들어왔는데, 브르타뉴 지방에 남아 있는 거석기념물() 즉 카르나크의 열석(), 바욘의 돌멘·멘힐·크롬레크(스톤서클) 등이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BC 1800년경에는 그들의 자손으로 추정되는 남서부 지방의 이베리아인, 알프스를 넘어 침입한 리구리아인(), 북동부 지방에 이주해온 벨기에인() 등이 청동기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 뒤에 도나우강() 방면으로부터 켈트인()이 북프랑스로 이동해 들어왔다. 철기시대에 이르면 프랑스 중부는 거의 켈트계() 갈리아인()에 의해 점령당하게 된다. 또한 지중해안에는 페니키아인()이 무역을 하러 나타났다. BC 600년경에는 그리스인()이 마실리아(마르세유)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리스 문화 전파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BC 2세기부터는 로마의 세력도 침투해 왔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유사 이전부터 인종의 집합소였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라스코 동굴 구석기 후기의 벽화가 있는 석회암 동굴유적.
크로마뇽인 1868년 프랑스 남서부 레제지(Les Eyzies)의 크로마뇽(Cro-Magnon) 동굴에서 맨처음 발견된 화석 인류로 슬기사람(Homo sapiens)으로 분류된다. 1만~4만 5천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에 살았으며 뛰어난 수준의 동굴 벽화 등을 남겼다.
리구리아인 선사시대부터 에스파냐 ·이탈리아 북서부에 걸쳐 거주한 토착 민족.

2) 역사의 시작

BC 58년부터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BC 52년 갈리아의 족장 베르생제토릭스(Vercingetorix)의 반란에도 갈리아는 로마화되어 갈로로망 문화이 탄생했다. 150년경부터는 남부에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고 리옹에서는 박해도 있었다. 3세기 중엽, 게르만인의 부족 중 하나인 프랑크족이 갈리아 지방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5세기가 되자 반달(Vandale·)수에비(Suebi)·알란(Alan) 등 여러 종족이 이주해 왔고 서고트족툴루즈에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부르군트족도 알자스로부터 론강·손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427년 프랑크족의 살리 지족이 북동부에 침입하여 로마의 동맹군으로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로마와 게르만의 연합군은 451년 훈족의 왕인 아틸라의 침략을 격퇴하였으나(카탈라우눔의 싸움), 서로마는 얼마 안가 멸망하였다. 481년 살리 지족의 클로비스(Clovis)는 메로빙거 왕조프랑크 왕국을 건설하고, 로마 정권 최후의 갈리아 지방 통치자였던 시아그리우스(Siagryus)를 격파, 로마의 지배를 벗어난 후 정통파로 인정된 그리스도교인 아타나시우스교(Athanasius)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분할상속제 때문에 왕국이 분열되고, 7세기 말부터는 무능한 왕들이 속출하여 실권은 궁재(Major Domus, 서양 중세 최고의 궁정직)의 손으로 넘어갔다.

궁재직은 피핀(Pipin)가문의 독점물이 되어 있었으며, 칼 마르텔(Carl Martell)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으로부터 침입한 이슬람교도의 군대를 투르·푸아티에 싸움(Tours-Poitier,732)에서 격파함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략을 저지하였다. 그의 아들 피핀 3세(Pippin III)는 751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름으로써 카롤링거 왕조를 창건하였다. 카롤링거 왕조는 고대 상업에 의존하고 있던 메로빙거 왕가와는 달리, 토지 및 농업경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중세의 폐쇄적 자연경제 사회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피핀의 아들인 샤를마뉴는 대제국을 구축하고, 로마 교황과 제휴하는 한편 문화를 크게 신장시켜, 그의 시대는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불렸다. 843년 샤를마뉴의 세 손자가 국토를 3국으로 나뉘는 베르됭 조약을 체결하고, 루트비히왕(Ludwig)은 나중에 독일이 된 동프랑크 왕국을, 카를 2세는 론강, 손강을 포함하는 서프랑크 왕국을 차지했다. 로타르는 제국의 중앙 부분을 갖게된다. 이 조약으로 인해 카를대제의 대제국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와 같은 세 지역의 구분은 현재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중 샤를 2세가 차지한 서프랑크(Frank Occidentalis)가 현재 프랑스의 모체이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클로비스 프랑크왕국의 초대 국왕(재위 481∼510)으로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이다. 전 프랑크족을 통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수립하였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황과의 우호관계를 보증하게 되었다.
프랑크족 게르만민족 중에서 서(西)게르만에 속하는 한 파(派).
카탈라우눔전투 451년 파리 북동방 평원에서 있었던 훈족과 서로마군과의 결전.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왕국 전반기의 왕조(481∼751).
시아그리우스 고대 로마 최후 갈리아 총독. 로마의 장군 아에기디우스의 아들로 뒤를 이어 갈리아 총독이 되었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게르만 부족국가 사이에 끼어 독립국가를 이룩하였다.
피핀 프랑크왕국 카롤링거왕조의 초대왕(재위 751∼768).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받아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왕조를 개막하였다. 주교 보니파티우스를 원조하여 라인 동쪽 지방의 그리스도교 포교를 촉진하는 한편, 교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였고 교황령을 공인하였다.
카롤루스 대머리왕 루도비쿠스 경건왕의 막내 아들로 서프랑크 왕국의 왕(재위 843∼877)이자 서로마 황제(재위 875∼877)였다. 870년 둘째형인 동프랑크의 국왕 독일왕 루도비쿠스와 메르센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분할해 나누어 가졌다. 877년 병으로 사망하자 큰 아들인 루도비쿠스 말더듬이 왕이 그의 왕국을 계승했다.
카롤링거 왕조 메로빙거왕조를 이어 프랑크왕국의 후반을 지배한 왕조.
프랑크 왕국 고(古)게르만인 중에서 서(西)게르만계의 프랑크족이 세운 왕국(481~843).
샤를마뉴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재위 768~814). 몇 차례의 원정으로 영토 정복의 업적을 이루고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했다.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면서 지방봉건제도를 활용했고 로마 교황권과 결탁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고 카롤링거 전성기를 이룩했다.

3) 프랑스의 탄생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9세기부터는 노르만인()의 침략이 활발해졌으며, 한때 파리가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지방 호족에 의한 봉건적 분권주의가 점차 진전되어 카롤링거왕조는 쇠퇴하였으며, 카를 3세(滿) 대신 파리백() 외드(재위 888∼898)가 왕위에 올라 로베르왕조(외드의 아버지인 로베르 르 폴의 이름에서 유래)가 성립되었다. 이후 10세기 말에 이를 때까지 로베르와 카롤링거 왕조는 북()프랑스의 지배를 둘러싸고 분쟁을 계속하였다. 외드의 동생의 손자인 위그 카페는 마침내 987년 카페왕조를 창시하고 프랑스 왕이 되었다. 여기서 프랑크 왕국이 멸망하고 프랑스의 역사가 시작된다.

카페왕조 초기의 왕들이 실제로 지배한 곳은 아직 파리 주변부뿐이었다. 각지에서는 귀족들이 세력을 다투었으며, 왕권에도 대항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봉건사회가 성립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클뤼니에서 시작된 수도원개혁운동(10∼11세기)은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클레르몽 종교회의(1095)를 계기로 십자군이 결성되었고, 로마네스크에 이어 고딕 양식의 교회가 장중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주로 프랑스제후·기사가 중심이 된 제1차 십자군(1096∼99)은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제2차 십자군(1147∼49)에 루이 7세, 제3차(1189∼92)에는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가 참가하였다. 필리프 2세는 또한 영국의 플랜태저넷가()와 싸움을 벌여 실지왕() 존으로부터 노르망디·멘·앙주·푸아투를 회복하였다.

필리프 2세의 손자 루이 9세는 성왕(:Saint Louis, 재위 1226∼70)으로 불렸는데, 그의 정책은 ‘법에 의한 평화’를 기본으로 ‘봉건제도하의 왕권’을 완성시키고 파리조약, 아미앵의 중재로 해묵은 영국·프랑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한편 법조행정과 문화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파리를 서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제7차(1248∼54), 제8차(1270) 십자군을 조직하였으나 원정 도중 튀니지의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카페왕조의 전성기는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 때이다. 그는 로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 분쟁을 일으켜 교황을 굴복시키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 자신의 지배 아래 두었다. 이것이 이른바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77)인데, 그 당시 필리프 4세는 신하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승려·귀족·평민의 대표를 소집하여 ‘삼부회()’를 개최하였다. 1328년 샤를 4세가 사망함에 따라 직계 카페왕조는 단절되고 필리프 4세의 조카 발루아백() 필리프 6세가 발루아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와 에드워드 2세의 아들)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백년전쟁(1337∼1453)이 시작되었다.

백년전쟁(백년전쟁)_690.JPG와트 타일러의 난자크리의 난브르타뉴브르고뉴공국프로방스교황령앙주노르망디플랑드르아쟁쿠르전투크레시 전투신성 로마 제국 푸아티에전투 백년전쟁 잔 다르크 나바라왕국 아라곤왕국

초기에는 프랑스가 열세에 몰렸다. 1346년의 크레시 싸움과 이듬해의 푸아티에 회전에서 패배하여 장 2세가 포로가 되었으며, 흑사병과 심한 기근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악화()가 주조되어 경제도 혼란에 빠졌다. 이 때문에 에티엔 마르셀의 난(亂)과 자크리(Jaquerie)라고 불리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왕세자에 의해 진압되고 샤를 5세(:재위 1364∼80)가 즉위한 뒤 한때 안정을 회복하는 듯하였으나 1407년 이후 국내의 귀족은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오를레앙파)로 완전히 분열되어 내전으로 발전하였으며, 부르고뉴파는 영국과 결탁하였다.

이 때 아르마냐크파를 구원한 사람이 잔 다르크로, 부르제에 후퇴해 있던 샤를 7세는 1429년 잔 다르크의 힘으로 오를레앙을 공략,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그녀가 죽은 뒤 영국군은 프랑스 영토에서 추방되었다. 백년전쟁으로 제후세력이 쇠퇴되고 상비군이 창설되었으며, 왕실 재정의 확립이 이루어져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국가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로마네스크 로망(roman)에서 파생한 말로서, 본래는 소설적 ·공상적 ·정열적인 것 또는 사람의 뜻.
자크리의 난 백년전쟁 중 북프랑스에 있었던 농민폭동.
카페 왕조 프랑스의 왕조.
삼부회 프랑스의 구제도(舊制度) 아래에서의 신분제(身分制) 의회.
루이 7세 프랑스 카페왕조의 왕(재위 1137~1180). 루이 6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일드프랑스 지방의 평정을 이룩하고 샹파뉴백작과 싸워 제압하였다. 제2회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십자군전쟁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루이 9세 프랑스 카페왕조의 왕(재위 1226~1270). 정의에 입각한 평화, 덕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한 왕으로 프랑스 집권적 왕정을 완성하였다. 영국과의 싸움을 종결시켰고 여러 국왕과 제후 사이의 평화수립에 노력하였다.
발루아 왕조 카페 왕조의 뒤를 이어 프랑스를 다스린 왕조(1328∼1589). 필리프 6세에서 시작된 이 왕조는 이후 직계 여부에 따라 '직계 발루아가', '발루아 오를레앙가', '발루아 앙굴렘가' 세 가문으로 나뉘었다. 총 13명의 프랑스 왕을 비롯하여 20명이 넘는 공작 및 백작을 배출하였다.
카를 3세 동프랑크 국왕(재위 876~887). 서프랑크 국왕 카를만이 후계자 없이 요절하여 동서로 갈라진 프랑크 왕국을 다시 통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르만인의 침입으로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 폐위당하였다.
백년전쟁 중세 말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
필리프 6세 프랑스 발루아왕조 초대의 왕(재위 1328∼1350). 카페왕조의 최근친자(最近親者)로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역시 왕위계승권을 주장한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와의 분쟁이 격화되어 이른바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에클뤼즈 하구(河口)의 싸움과 크레시의 싸움에 패배하였다.
필리프 2세 프랑스 카페왕조의 제7대 왕(재위 1180∼1223). 약화된 프랑스 왕권의 위신을 높였으며 영국의 왕제(王弟) 존과 결탁하여 영국왕 리처드1세를 패사(敗死)시켰으나 존이 왕이되자 그 역시 적대하였다. 존이 플랑드르백(伯) 및 신성로마황제 오토 4세와 동맹하여 반격을 가해 오자, 부빈의 싸움에서 격파함으로써 프랑스왕의 권위를 부동의 것으로 확립하였다.
필리프 4세 프랑스 카페왕조의 제11대 왕(재위 1285∼1314). 프랑스 통일의 체제를 처음으로 갖추고 측근의 법조정치가들이 추진한 정책을 과감히 수행했으며, 왕권신장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국내 교회령 과세문제로 로마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을 일으켰으며, 군주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 주장에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하고 아나니로 교황을 급습하여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4) 절대주의 왕권의 성립

샹보르성관
샹보르성관

샤를 7세()는 국토를 확보한 후 관료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개혁하는 한편 상비군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 다음의 루이 11세(재위 1461∼83) 시대에는 최강의 귀족 부르고뉴 공가()가 멸망한 데 이어 아르투아 백령()·프랑슈콩테·앙주·멘·프로방스도 왕령에 병합되어 절대왕권의 기초가 다져졌다. 그의 아들 샤를 8세는 브르타뉴를 합병하고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루이 12세(발루아오를레앙, 재위 1498∼1515) 와 프랑수아 1세(발루아-앙굴렘, 재위 1515∼47) 때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었다. 또 당시 신대륙과의 무역이 이루어져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어 프랑수아 1세(1515∼47)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놓고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다투어 패하였으며, 합스부르크가()와의 항쟁도 격화하였다.

한편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1520년경부터 프랑스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장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칼뱅주의가 형성되었다. 칼뱅은 파리에서 추방되어 제네바로 피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신구 양파의 분쟁이 심해졌다. 16세기 후반에는 8차례나 종교전쟁(위그노전쟁:1562∼98)이 일어났다. 종교적 분열은 마침내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과 같은 대참사까지 야기시켰다. 1589년에는 앙리 3세가 암살되었고 성왕() 루이 9세의 후예 부르봉가()의 앙리 드 나바르(앙리 4세:재위 1589∼1601)가 왕위를 계승, 발루아왕조가 종식되고 부르봉왕조가 창시되었다.

앙리 4세는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낭트칙령’(1598)을 반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내란을 수습하였다. 그는 쉴리를 등용하여 프랑스의 재건에 힘썼으며,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벡을 개척하고 부르봉왕조의 기초를 세웠으나 열광적인 구교도에게 암살되었다(1610). 그의 아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내에서는 귀족 신교도를 억압하고 밖으로는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여 30년전쟁에 참가하는 등 절대왕권을 공고히 하였다. 이어서 루이 14세(재위 1643∼1715) 시대에는 유년기에 ‘프롱드의 난()’(1648∼53)이 일어났으나 섭정모후(:안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이 교묘하게 평정하고, 대외적으로는 피레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에스파냐에 대하여 우세한 위치를 유지하였다.

1661년 국왕의 친정()이 시작된 뒤 재정총감() 콜베르는 중상주의()정책을 시행하여 부국강병과 해외식민에 노력하였다. 한편, 이 당시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궁정문화가 개화되고, 고전주의문학이 확립되었으며 파리에는 문학 살롱이 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고 불렸으며,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문화국이 되었다. 이로써 17세기는 ‘루이 14세의 세기’라 불리게 되었으며, 부르봉 왕권은 국내외에서 이른바 ‘빛나는 군림()의 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왕권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외전쟁(플랑드르전쟁·네덜란드침략전쟁·팔츠전쟁·에스파냐계승전쟁)과 낭트칙령의 폐기에 따른 신교도·상공업자의 망명 등으로 재정은 점차 악화되었다. 루이 14세의 증손인 루이 15세(재위 1715∼74)의 치세는 초기의 섭정(오를레앙 필리프) 시대부터 파란을 안고 있었다. 존 로에 의한 경제개혁의 실패, 궁정의 재정낭비, 7년전쟁(아메리카·인도에서 일어난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 1756∼63)에 패배한 결과 식민지를 상실하는 등 국위가 실추되었다. 국내에서도 계몽사상이 침투, 신흥 부르주아지의 성장이 이루어져 ‘구()제도(Ancien Regime)’를 타파하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의 손자 루이 16세(재위 1774∼92)는 우둔하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지나친 낭비로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튀르고·네케르 등을 등용, 재정 위기를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헛되이 끝나고 1789년 5월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곧 이어 제3신분 의원에 의해 ‘국민의회()’의 성립이 선언되었으며, 7월 14일에는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에 의해 탈취됨으로써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였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발루아 왕조 카페 왕조의 뒤를 이어 프랑스를 다스린 왕조(1328∼1589). 필리프 6세에서 시작된 이 왕조는 이후 직계 여부에 따라 '직계 발루아가', '발루아 오를레앙가', '발루아 앙굴렘가' 세 가문으로 나뉘었다. 총 13명의 프랑스 왕을 비롯하여 20명이 넘는 공작 및 백작을 배출하였다.
샤를 7세 프랑스의 왕(재위 1422~1461). 잔다르크의 도움으로 대관식을 올렸으며 백년전쟁을 끝내고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루이 11세 프랑스 발루아왕조의 왕(재위 1461~1483). 샤를 7세의 아들로 부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부왕의 측근을 일소하고 제후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정책을 취하였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루이 12세 프랑스 발루아왕조의 왕(1498~1515). 상비군제도의 정비, 도로 건설, 농민 보호 등에 힘을 썼으며 많은 외국 학자와 문인들을 불러들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길을 열었다.
프랑수아 1세 프랑스의 국왕(재위 1515∼1547).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즉위하자마자 이탈리아에 원정, 승리를 거두어 밀라노를 손에 넣었다. 이탈리아를 통하여 고대의 학문과 예술에 심취, ‘휴머니즘(인문주의)’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위그노 전쟁 16C 프랑스에서 구교와 신교간의 갈등으로 전개된 전쟁(1562-1598).
앙리 4세 프랑스의 왕(재위 1589∼1610)이자 나바라의 왕(재위 1572~1589)으로 부르봉왕조의 시조이다. 가톨릭 세력과 화해하고 낭트칙령을 발하여 30년간의 종교내란을 끝냈으며 베르뱅조약으로 에스파냐와도 화의하였다. 재정 ·농업 ·목축 ·교통의 재건에 힘쓰고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벡을 개척하였다.
낭트칙령 1598년 4월 13일 프랑스의 왕 앙리 4세가 낭트에서 공포한 칙령.
프롱드의 난 1648∼1653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내란.
루이 15세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715∼1774). 엄격한 의식이나 정치를 싫어하여 정사를 A.H.플뢰리에게 맡겼으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재정 궁핍이 심각해졌다. 왕은 특권자에게도 과세하려다 고등법원과 충돌하였고 재상 르네 드 모푸는 새로운 재판소를 만들어 재정적자를 메우려 하였다.
7년전쟁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대국들이 둘로 갈라져 싸운 전쟁(1756~1763).
스페인계승전쟁 1701∼1714년 스페인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프랑스·스페인와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사이에 벌어진 국제전쟁.
루이 16세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774~1792).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고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정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하였으나 제3신분의 대의원들이 절대왕정에 대신하는 입헌군주제 수립을 추진하던 중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민중의 감시하에 생활하다 처형되었다.
바스티유 1370~1382년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명령으로 파리의 생탕트완 교외에 건설된 요새.
장 칼뱅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하고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저서에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 《로마서 주해》 등이 있다.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
베르사유 궁전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에 있는 바로크양식의 궁전.
루이 13세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610~1643). 수년간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와의 대립관계로 국내의 혼란이 있었다. 모후를 중심으로 한 대귀족을의 음모가 있자 이를 엄벌하고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루이 14세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643~1715). 절대왕정의 대표적인 전제군주이다.

5) 혁명시대

1789년 여러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고 ‘인권선언’이 발표되었다. 파리로 연행된 국왕 일가는 외국으로의 도피를 기도하였으나 실패(바렌 도피사건)함으로써 더욱 국민의 신임을 잃었다. 헌법제정의회는 1791년 9월 헌법을 공포하였고,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792년 지롱드 내각의 성립과 동시에 혁명에 반대하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8월 10일 튈르리 궁전 습격사건이 일어났으며 국왕 일가는 탕플 감옥에 유폐되었다. 국민공회()는 ‘1791년 헌법’과 왕권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의회에서는 지롱드당()과 자코뱅당()이 대립하였으나 혁명군은 각지에서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1793년 국왕은 반혁명을 기도하였다는 죄목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의회에서는 지롱드당이 추방되었으며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가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공포정치의 시작으로, 왕비를 비롯한 당통·에베르 등의 반대파가 잇달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1794년 7월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자코뱅 클럽은 폐쇄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유산층과 토지를 가진 농민들을 기반으로 하는 총재정부(:Directoire)가 성립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승리(1796∼97)로 명성을 올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총재정부에 위기가 닥치자 돌연 이집트 원정에서 귀국하여, 1799년 11월 ‘브뤼메르(Brumaire:)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정부(:또는 , Consulat, 1799.11∼1804.5)를 조직하였다.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공화력() 8년의 헌법을 제정하고 재정·행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나폴레옹은 1802년에 종신통령이 된 데 이어 1804년 3월에는 ‘나폴레옹 법전’을 공포하고 5월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제1제정(1804∼14)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제국을 구축하였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1805)에서 패배함으로써 영국 본토 침입이 좌절되었으나, 울름·아우슈테를리츠·예나·아우에르시테프 싸움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을 누르고 라인 연방(1806∼13)을 결성(신성로마 제국의 멸망)하여 친족들을 각지의 왕으로 앉혔다. 영국·오스트리아는 이에 대항하여 7차례나 대()프랑스 대동맹()을 결성하였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1806)으로 이에 맞섰으나 에스파냐의 반()프랑스 전쟁(:1808∼14), 러시아 원정의 패배(1812)와 독일해방전쟁(1813)에서 열세에 놓이게 된 데다 1814년에는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은 루이 18세가 복위한 후 1815년 2월 엘바섬을 탈출, ‘100일 천하’를 이루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추방되었다. 유럽 제국은 빈 회의를 열고 메테르니히의 보수주의를 확립하였으며, 프랑스는 탈레랑이 주장하는 정통주의를 기초로 부르봉왕조가 부활하여 루이 16세의 아우인 루이 18세(재위 14∼24)와 샤를 10세(재위 24∼30)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왕정복고시대(:15∼30) 초기에는 극단적인 왕당파()가 구()제도의 부활을 기도하였으나 이미 확립된 부르주아지 체제를 뒤엎을 수는 없었으며, 리슐리외·드카즈 등 온건 왕당파(doctorinaire:일명 )를 중심으로 입헌왕정()이 진척되었다. 그러나 과격 왕당파의 리더인 아르투아백()이 샤를 10세로서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망명귀족에 대한 재산 배상 등 반()혁명입법이 성안됨에 따라 시민들의 불만·항의가 고조되었다.

1830년 언론통제를 기도하는 ‘7월칙령’을 계기로 ‘7월혁명’이 일어났다. 7월 27∼29일은 ‘영광의 3일간’이라고 불리며, 국왕은 영국으로 달아났고 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였다. 혁명의 영향은 대단히 컸으며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주의·국민주의의 기풍이 널리 파급되었다. 왕정복고()와 마찬가지로 7월왕정(1830∼48)은 ‘제한선거왕정()’이었다. 당시는 산업혁명의 진전기()에 해당하여 상업·금융 부르주아 세력이 커졌다. 예술 분야에서는 낭만주의의 전성기를 맞았고 사상계()에는 공상적 사회주의가 나타났다.

정치적으로는 은행가와 주주() 부르주아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이에 대항하는 시민 계층은 보통선거와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848년 기조 내각이 물러서고 2월혁명이 발발하였다. 그 결과 루이 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제2공화정이 성립하여 빈 체제는 붕괴되었다. 이로써 시인() 라마르틴과 사회주의 이론가인 루이 블랑을 포함한 임시정부에 이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농민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장 블랑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사상가로 보통선거제를 주장하고 노동조합을 결성, 영세업자와 노동자의 빈곤을 없애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저서에《프랑스혁명사》 등이 있다.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1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Waterloo)에서 벌인 전투로, 프랑스군이 패배하여 나폴레옹 1세의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공포정치 정권을 유지 획득하기 위하여 대중에게 공포감을 주는 정치.
자코뱅당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급진적으로 이끌었던 정치 분파로서 1793년 6월부터 1794년 7월까지 혁명정부를 주도했다. 공포정치로 국내외의 반혁명 기도에 맞섰으나,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몰락했다.
라인동맹 1806년 7월 12일에 나폴레옹의 후원으로 조직된 남서 독일 16개국의 동맹.
루이 18세 프랑스의 왕(재위 1814~1815.3.20 / 1815.7.8~1824).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추방되자 왕위에 올라 입법권과 사법권의 독립, 신성불가침적 세습왕권과 함께 법 앞의 평등, 기본적 인권 등을 규정한 헌법을 제정하였다.
샤를 10세 프랑스의 왕(재위 1824~1830). 방데지방의 반 혁명군에 있었으나 패해 영국으로 도망갔다. 나폴레옹 몰락 후 귀국, 극우당과 왕정복고운동을 지도했다. 입헌주의를 반대했고 즉위 후 언론 탄압, 망명 귀족의 재산 보상, 보호관세정책 등을 폈으나 7월혁명으로 퇴위했다.
7월혁명 1830년 7월 파리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
베를린칙령 나폴레옹 1세가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시키기 위하여 내린 칙령.
지롱드당 프랑스혁명 때의 입법의회와 국민공회의 당파.
나폴레옹 1세 프랑스의 군인 ·제1통령·황제.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 제1제정을 건설했다. 제1통령으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팽창했다. 그러나 러시아원정 실패로 엘바섬에, 워털루전투 패배로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었다.
나폴레옹법전 1804년 나폴레옹 1세 때 제정·공포된 프랑스 민법전의 별칭.
왕정복고 혁명이나 기타의 사정으로 일단 폐지되었던 왕정(王政: 왕이 다스리는 정치)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
국민공회 프랑스혁명의 최종 단계에서 구성된 의회.
2월혁명 1848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

6) 제국주의 시대

슈농소성
슈농소성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파를 추방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3세(재위 1852∼70)라 칭하였다. 이 제2제정기()는 해외발전의 시대에 해당하는데, 크림전쟁(1853∼56)으로 러시아를 압도하고, 중국(당시는 ) 원정(1857∼60), 수에즈 운하의 건설(1859∼69), 니스·사부아(사보이)의 병합(1860)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파리시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공업 생산은 금속공업에 중점을 두었으며 산업혁명은 완성기에 들어갔다. 철도망은 널리 보급되었고 만국박람회(1855∼67)를 개최하였다. 초기의 전제제정기(:1852∼67)는 황제의 실질적인 독재시기로, 반대파의 활동은 가혹하게 억압되었다.

1860년부터는 자유주의적 개혁운동이 강해졌고, 자유제정기(:1867∼70)에는 의회제도를 비롯한 자유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자유무역제도가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반대세력의 정치활동과 노동운동도 부활되고 현실주의·자유주의 문학이 문단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부르주아 체제의 퇴폐적 현상도 심화되었다. 1867년의 경제공황으로 혼란이 가중되자, 기회를 노리던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에스파냐 왕위계승문제를 계기로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을 유발시켰다. 이미 전열을 정비한 프로이센군()은 몰트케의 신속한 작전으로 곧 프랑스를 침공, 나폴레옹 3세는 세당에서 포로가 되었고 패보()를 들은 파리 시민들은 혁명을 일으켜 공화제를 선언하였다(제3공화정).

그 결과 임시 국방정부가 조직되어 파리를 포위한 프로이센군에게 4개월 동안 저항하였으나 마침내 굴복하고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1871). 그 동안 국방정부의 파리 국민군 무장해제 시도를 계기로 ‘파리코뮌’의 혁명정권이 성립되었으나, 프로이센과 정부군의 공격으로 2개월 만에 붕괴되고, 1871년 8월에는 급진 공화파의 레온 강베타와 타협이 이루어져 티에르(1871∼73)가 대통령이 되었다. 1873년 마크마옹(1873∼79)이 제2대 대통령이 된 뒤에는 왕정복고의 조짐이 보였다. 공화파와 왕당파 간의 대립 속에서 1875년까지 과도정권이 이어지다가, 1875년 대통령제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프랑스는 100년에 걸친 혁명 끝에 공화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제3공화정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독일 비스마르크(Bismarck)의 허락 하에 기존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베트남, 마다가스카르, 북서아프리카 등에서 식민지 팽창 정책을 추진하면서 영국과 충돌을 일으켰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후퇴하면서 진정되었다. 1890년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실각 된 이후 독일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1894년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이어서 영국·프랑스 협상(1904), 3국협상(:1907)을 체결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동맹(:82)에 대항하였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파나마사건 19세기 말 프랑스의 의옥사건(疑獄事件).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 크림전쟁에 출정하여 원수(元帥)가 되었다. 1873년 티에르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후에 공화파(共和派)에 밀려 1879년 정계(政界)를 떠났다.
쥘 그레비 프랑스의 정치가. 제3공화정의 제3대 대통령(재임 1879~1887).
러시아-프랑스동맹 1891∼1894년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정치 ·군사협정의 총칭.
삼국협상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의 동맹관계.
드레퓌스 사건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대인 사관(士官)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사건.
크림 전쟁 1853∼1856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영국·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파리코뮌 1871년 3월 28일부터 5월 28일 사이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

7) 세계대전과 프랑스

프랑스 연합군 버펄로부대
프랑스 연합군 버펄로부대

20세기에 들어오자 프랑스에서는 독일을 적대시하는 과격한 민족주의(쇼비니즘)가 더욱 강해졌으며, 2차례에 걸친 모로코 사건(1905. 11)이 발생하였다. ‘애국자’ 대통령 푸앵카레(재직 1913∼1920)는 사회당을 포함한 거국일치 내각()을 조직하였고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돌입하였다. 마른전투(장군 조프르 지휘, 1914년 9월), 베르전투(장군 페탱 지휘, 1916년 2∼6월) 등 초기에는 고전하며 독일군이 파리 근교까지 진격하였으나, 러시아군이 독일 동부로 파고들 때 프랑스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1915년 독일 해군은 해전을 주도한 영국에 밀려 해상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잠수함을 무기화하여 ‘무제한 잠수함전(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을 전개해 연합군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프랑스가 대독 연합군의 주축이 되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포슈(Foc) 연합국 총사령관이 독일과의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승전국이 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정적 손실이 있었다. 1930년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극우파 쿠데타 기도와(1934년), 좌파 연합의 인민 전선 정부의 수립(1936년), 1938년 공산당 탈퇴에 따른 붕괴 등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는 가운데 나치 독일은 전쟁을 위한 재무장을 하였다. 

1939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폴란드에 침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소련과 비밀협정을 맺은 독일이 1940년 5월, 중립국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를 공격하여 방어선이 무너지고 6월 10일 이탈리아가 참전하자 폴 레노(Paul Raynaud) 총리가 사퇴하며 6월 22일 휴전을 선포한다.

프랑스 본토를 점령한 나치의 괴뢰정권인 비시정부가 원수 페텡(Pétain)의 지휘로 수립되었다. 런던으로 망명하였던 드골 장군이 라디오를 통해 ‘자유 프랑스’의 결성과 항전을 역설하며 국내에서도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드골이 수립한 망명정부가 연합국의 협력으로 인해 승인되고 프랑스 식민지와 본토의 레지스탕스를 규합하면서 파리가 1944년 8월 해방되었다. 종전 후 프랑스는 전승국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실제로 제3공화국은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비시정부의 수립으로 인해 1940년에 막을 내렸으나, 제3공화국의 헌법은 1945년 10월까지 존속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마른전투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 6~12일에 프랑스 파리의 북동쪽 마른강(江)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파리의 공방(攻防)을 놓고 벌인 전투.
모로코사건 1905~1906, 1911년 두 차례 모로코의 분할을 둘러싸고 일어난 국제분쟁.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클레망소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이며 의사. 상원의원과 총리 겸 내무장관을 지냈으며 육군장관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프랑스 전권대표로 참석하였고 베르사유조약을 강행하였다.
푸앵카레 프랑스 제9대 대통령을 역임한 프랑스의 정치가·변호사. 대독강경정책을 취하였고, 평가절하된 '푸앵카레 프랑'을 정하여 통화의 최종적 안정을 실현시켰다.
로카르노조약 중부 유럽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유럽 국가들이 1925년 10월 16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발의해 12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체결한 국지적(局地的) 안전보장조약.
샤를 드골 프랑스의 군인·정치가. 알제리민족자결정책, 알제리 독립 가결로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했다. 드골 체제를 일단 완성시킨 후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를 부흥하기 위하여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마셜 플랜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에 행한 대외원조계획이다.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지만,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마셜(G. C. Marshall)이 처음으로 공식 제안하였기에 ‘마셜 플랜’이라고 한다.
유럽경제공동체 유럽의 지역적 경제통합기구.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의 제5공화국 2대 대통령.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재임했다. 1944년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1962년 총리에 취임, 1968년까지 연속 4차례나 총리를 지냈으며, 1969년 드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의 정치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 드골에 의해 재무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사임, 그 후 대통령 퐁피두 밑에서 다시 재무장관에 취임하여 프랑화의 절하(切下)를 단행하였다. 퐁피두의 사망으로 ‘점진적 개혁’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F.미테랑에게 승리하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의 정치가. 1981년 사회당 출신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파 정당의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좌우동거체제’를 만들어냈다. 유럽연방구상, 독·프 통합군 창설 구상을 발표했다. 1993년 유럽연합 발족을 성사시켰다.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정치가.
미셸 로카르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스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다. 1974년 F. 미테랑의 사회당(PS)으로 복귀하고 계획·지역개발 장관, 농림 장관 등을 지냈다. 미테랑의 정책에는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이었으나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의 재출마를 지지하여 그해 5월 총리에 임명, 취임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과 군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체결한 북대서양조약의 수행기구.
제2차 세계대전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이다.
페탱 프랑스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에 대령으로 참전했고 아르투아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고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전후 프랑스군의 요직을 역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후 총리로 히틀러와 강화했다.
알제리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부, 지중해에 면한 아랍계 나라이다. 183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이 시작되었고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8년간 프랑스와 격렬한 알제리전쟁을 벌인 끝에 1962년 독립을 이루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정치가. 1995년 5월 L.조스팽과 E.발라뒤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르펜을 누르고 당선되어 두번째로 재선에 성공하여 2007년 퇴임시까지, 12년 간 대통령을 지냈다.
비시정부 1940년 6월 나치스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뒤 오베르뉴의 온천도시 비시에 주재한 프랑스의 친(親)독일정부.

8) 제4공화국

1945년 10월 국민투표로 제3공화국의 헌법이 폐지되고 1946년 10월 새 헌법이 채택되면서 의원내각제 형태의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쟁 후 재건 사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요와 물자의 절대량의 부족은 계속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국민의 파업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 부흥계획이라 일컫는 미국의 원조인 마셜 플랜으로 경제 부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호적인 세계경제 질서에 힘입어 프랑스는 사회 안정을 달성하고 30년간 고성장을 지속하였다. 1945년부터 1975년까지 이 기간을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 으로 통칭한다. 또한 프랑스는 1948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부흥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혼란이 지속되었다. 서로 이질적인 정당의 연립으로 구성된 정부가 붕괴를 거듭하였다. 제4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뱅상 오리올에 이어 르네 코티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알제리전쟁, 인도차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군소 정당이 분립되며 정국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1958년 5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협상하려는 정부에 반발하는 알제리 주둔 군부의 쿠데타 조짐으로 프랑스가 위기에 처하자, 코티 대통령은 드골 장군에게 사태 수습을 요청하였고, 드골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하며 재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제4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9) 제5공화국

1958년 9월 28일 국민투표를 통하여 제5공화국의 헌법이 채택되고 샤를 드골은 19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른바 ‘드골 헌법’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권한을 가진 드골 대통령은 1962년 알제리에 독립을 부여하며 알제리 문제를 해결하였다.

드골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되찾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대통령상을 구현하고, 독자적인 핵 계획을 추진하였다. 1966년, 독립 방어 체제의 추구를 목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탈퇴하며 군사적으로 독자노선을 걸었다. 프랑스와 독일 간 관계 개선을 필두로 하여 유럽 국가 간 협력을 추진하였으며, 현재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를 조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구 식민지국들과 새로운 우호관계를 구축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대외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또한 국가주도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프랑의 국제 화폐화 및 상품시장 관세화, 유럽공동시장 가입 등 대외개방 조치를 단행하였다. 드골은 1965년 12월 재선되었지만 1968년 대대적인 총파업과 학생 시위로 인해 난국을 맞았다. 1969년 4월 지방행정 개혁과 상원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1969년 4월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드골 정부 하에서 총리를 역임하였던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드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기본적으로는 드골 정책을 견지하였지만 더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호응하고자 노력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유럽경제공동체에 영국이 가입하게끔 많은 도움을 주었고, 유럽 공동의 로켓발사 계획을 주도할 프랑스 기업을 출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언론통제 완화 등의 정책은 드골주의를 표방하는 우파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퐁피두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1974년 4월, 갑작스러운 퐁피두 대통령의 사망으로 후임을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우파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재임 중에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강화해 유럽연합으로 발전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국가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G7 창설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81년 5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스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이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 최초의 좌파 정권이 성립되었다. 취임 후 미테랑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여 원내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였다. 1986년 3월 선거에서 우파연합이 과반수를 차지하자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좌파 대통령과 우파 총리라는 ‘좌우동거체제’를 2년간 만들어냈다. 미테랑은 1988년 5월 재선되었으며 독일 통일의 격변과 탈냉전시기 변화 속에서 유럽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유럽 연합을 설립하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1991년 12월 타결되고 1992년 9월 프랑스는 국민투표를 거쳐 조약이 비준되어 1993년 유럽연합 발족을 성사시켰다. 1995년 5월 신드골주의자인 파리 시장 자크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14년간 계속된 좌파 대통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국영기업 사유화, 조세감면, 지방분권화 등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며 국민들의 민심을 사로 잡는 듯하였으나, 계속되는 경제적 어려움과 실업률 증가, 그리고 2003년 폭염 피해 등으로 인해 국민들이 반발하였고, 대통령과 총리의 지지도는 하락하였다.

2007년 5월 취임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의 정체성 회복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외치며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펼쳤다. 장관 15명 중 7명을 여성으로 영입하고 세네갈, 모로코 등 출신 정치인을 기용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집권 초 사르코지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35시간 탄력 근무제, 조세감면, 연금 개혁, 헌법 개정, 치안 강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강력한 개혁 정책에 기인한다. 그러나 2007년 시작된 세계금융위기에 대응한 개혁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으로 2008년 말부터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다. 2010년 사르코지 정부는 프랑스에 살고있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출신 집시와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고 집시촌을 철거하는 등 강경한 이민정책을 추진하여 국민의 민심을 사로 잡기도 했으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업률 상승과 경제위기 지속으로 인해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됐다. 

‘무너진 경제살리기’를 표방한 올랑드 대통령은 높은 실업률과 계속되는 낮은 경제성장률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경제 회복 및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으나 노동자 계층, 경제발전에서 소외된 동부 지역 등이 극우 지지로 돌아서는 현상이 발생하며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임기 말에도 실업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파리, 니스 등지의 테러로 인해 국가 정세가 불안해졌다. 이민자들의 국적을 박탈하는 헌법을 개정하는 것을 추진하면서 좌파 지지층의 불만도 높아졌고 10% 미만의 지지율을 보였다. 

올랑드 대통령 시절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역임하며 사회당 정부의 중도우파적 정책들을 펼쳤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연합 잔류와 자유무역, 개방경제와 문화적 다원주의 등을 내세웠다. 당선 이후부터 노동법 개정을 시작으로 세제개혁, 국영철도공사 개혁, 연금개혁 등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전통적인 시장경제주의자인 마크롱은 행정 현대화, 공무원 감축을 통해 재정 적자를 축소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마크롱 대통령 취임 이후 프랑스의 실업률은 금융위기 이후 10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하였으며 실업률 또한 큰 폭으로 하락하였다. 과감한 노동개혁을 통해 프랑스 강성 노조를 무너뜨렸고 실업급여 개혁까지 추진하였다. 또 출범 직후 부유세를 폐지하여 ‘자산에 대한 연대세(ISF)’를 없앴다. 이는 부유세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자산가와 기업가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방침이었다.

4 . 정치

프랑스 의사당
프랑스 의사당

프랑스의 정체()는 공화제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와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958년 5월 13일의 알제리 반란사건 이후 장군 드골에게 정권이 위임되었으며, 9월에는 제5공화국 헌법이 성립되었다. 신헌법에 따라 프랑스 연합은 ‘프랑스 공동체’로 변경되었다. 공화국(본국·해외 및 영토)을 희망하는 국가들로 평등·연대의 원칙을 기초로 공동체를 구성하여 외교·국방·통화·전략물자 등을 제외하고 대폭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9월의 국민투표에서 해외 현들은 반대투표로 독립국이 되든지, 찬성투표로 공동체에 가입하든지 선택이 허락되었으나, 서(西)아프리카의 기니가 독립을 단행한 외에는 모두 공동체의 구성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후 이들 국가의 독립 요구가 강해졌기 때문에, 프랑스는 ‘국제주권()’의 이름으로 완전 독립을 인정하여 각국이 공동체를 이탈하지 않고 독립할 수 있도록 1960년 5월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공동체 구성국들은 모두 완전 독립을 달성하였으며 각각 프랑스와 외교·방위 등에 관한 쌍무협정()을 체결하였다. 한편 코트디부아르 등 협상회의 4개국과 말리, 완전 독립한 기니 등도 1963년 5월 공동체의 테두리 밖에서 프랑스와 협력협정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제5공화국 헌법의 공동체에 관한 규정은 완화된 규정으로 바뀌었다. 즉 공동체의 정기적인 행정회의나 의회 등 상설 중앙기관은 프랑스 대통령이 사회를 맡는 수장()회의, 각국 각료대표·전문가로 구성되는 위원회, 의원 대표의 자문의회 등으로 분리, 격하되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공화제 복수의 주권자가 통치하는 정치체제.
프랑스공동체 프랑스와 옛 프랑스 식민지였던 여러 나라들과의 특수한 국가결합.

1) 헌법

프랑스 법무성
프랑스 법무성

1958년의 프랑스 헌법은 제3·4공화정의 공통적 현상인 평균수명 6개월의 약체내각()을 강화하였다. 대통령 중심의 행정부에 강대한 권한을 부여한 반면, 국민의회의 권한을 축소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전문()에서 1789년 대혁명 이래의 국민주권()을 준수하는 취지가 선언되어 있다고는 하나, 대통령은 예전과 다르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인 동시에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총리 및 각료를 임면()하고 의회 성립 1년 후에는 의회의 해산권을 보유한다. 또한 모든 법률안에 대하여 국회에 재심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중요한 안건()을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 있다. 그밖에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국군의 최고 사령관을 겸하며 비상사태 때에는 ‘필요한 여러 조치를 취하는’ 특별권한이 부여되는 등 미국 대통령과 비교하여 그 권한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재선이 허용되며 선출방법은 처음에는 의회의원을 포함한 약 7만 50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1962년 가을의 개헌 국민투표에 따라 국민에 의한 직접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국회의 권한은 한층 더 축소되었다. 2000년 9월에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임기가 5년으로 바뀌었고 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02년 말부터 시행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내각은 우선 ‘의회에 책임을 진다’고 되어 있으나, 대통령은 각료회의를 주재하고 정책 전반의 결정을 지도하는 외에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의 통과는 의원 정수의 과반수를 넘는 경우에 한하고, 기권·결석은 정부 지지로 간주되며 또 1회기 동안에 2회 이상 불신임안을 제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과 더불어 정부가 의회의 동향에 좌우되는 경우가 적으며, 게다가 정부는 법률의 효과를 가진 정령()을 발하는 권한도 보유한다.

반면 양원제() 의회의 회기는 연() 120일을 넘지 못하고, 그 주요 기능은 인권()에 관한 법률제정에 한정되어 있다. 또한 각료는 국회의원 기타의 공직()을 겸하지 못하며 당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는 등 모든 면에서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의회주의는 엄격한 제약을 받고 있다. 요약하면 강력하고 안정된 정부의 존재가 보장된 반면,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가 독재화할 위험도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1958년 헌법의 2차적 특색은 옛 식민지를 ‘공동체’로 재편성한 점인데 이와 같은 헌법의 성립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알제리 문제를 둘러싼 내전의 위기 등을 타개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권한 확대가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2000년의 개정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총리, 상·하원 의장과 협의 후 의회(하원)를 해산할 수 있으며 의회해산 후 20~40일 사이에 총선을 실시한다. 그러나 총선 후 1년 이내에는 의회해산을 할 수 없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양원제 의회가 2개의 합의체로써 구성되고, 원칙적으로 각 합의체가 각각 독립하여 결정한 의사가 일치하는 경우에 그것을 의회의 의사로 간주하는 의회제도.

2) 내각

프랑스국회의사당
프랑스국회의사당

내각은 내무부, 법무부, 유럽외교부, 국방부, 국토통합부, 재정경제부, 환경연대부, 보건연대부, 문화부, 체육부, 노동부, 교육부, 농림식품부, 공공회계집행부, 고등교육연구혁신부, 해외영토부 등 16개 부처 장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각은 하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총리는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국가예산을 비롯한 법안에 발언권을 가진다. 또 정부가 법안의 긴급성을 선언한 경우에는 양원의 제1독회()가 끝난 뒤 양원협의회의 심의를 요구하는 등 의회의사()에 개입할 수 있다. 총리는 국방에도 책임을 지며 법률의 시행을 보장하고 대통령 임명직 이외의 문·무관을 임명한다. 내각은 하원 총의석의 1/10 이상의 서명으로 상정된 불신임동의가 총의석의 과반수로 채택된 경우 물러나야 하며, 대통령에게 총사직원을 제출해야 한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정치가.
샤를 드골 프랑스의 군인·정치가. 알제리민족자결정책, 알제리 독립 가결로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했다. 드골 체제를 일단 완성시킨 후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를 부흥하기 위하여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의 제5공화국 2대 대통령.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재임했다. 1944년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1962년 총리에 취임, 1968년까지 연속 4차례나 총리를 지냈으며, 1969년 드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자크 샤방델마스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스국민연합·신 공화국연합 결성에 참가했으며 최초의 총리로 여당 각파의 균형을 꾀한 인선으로 내각을 조직했고 소련 서기장 L.I.브레즈네프의 프랑스 방문 때 신경제협력협정에 조인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의 정치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 드골에 의해 재무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사임, 그 후 대통령 퐁피두 밑에서 다시 재무장관에 취임하여 프랑화의 절하(切下)를 단행하였다. 퐁피두의 사망으로 ‘점진적 개혁’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F.미테랑에게 승리하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의 정치가. 1981년 사회당 출신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파 정당의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좌우동거체제’를 만들어냈다. 유럽연방구상, 독·프 통합군 창설 구상을 발표했다. 1993년 유럽연합 발족을 성사시켰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정치가. 1995년 5월 L.조스팽과 E.발라뒤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르펜을 누르고 당선되어 두번째로 재선에 성공하여 2007년 퇴임시까지, 12년 간 대통령을 지냈다.
미셸 로카르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스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다. 1974년 F. 미테랑의 사회당(PS)으로 복귀하고 계획·지역개발 장관, 농림 장관 등을 지냈다. 미테랑의 정책에는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이었으나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의 재출마를 지지하여 그해 5월 총리에 임명, 취임하였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의 정치가. 헝가리 이민 2세로서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고 법학을 전공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22세에 파리 근교의 시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예산장관과 내무장관, 경제장관을 거쳤다. 2007년 5월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후보로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을 누르고 제2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 지방행정

프랑스의 지방 행정 단위는 광역 행정구역인 레지옹(région), 중역 행정구역인 데파르트망(Département), 기초 행정구역인 코뮌(commune)으로 구분된다. 파리는 유일하게 코뮌이자 데파르트망이며, 파리와 같은 대도시로부터 인구수가 50∼300명인 작은 마을까지 일률적으로 코뮌이라 한다. 파리와 리옹, 마르세유 세 개의 도시는 하위 단위인 아롱디스망(Arrondissement)으로 구성된다. 파리는 20개의 아롱디스망, 리옹과 마르세유는 각각 9개와 16개의 아롱디스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코뮌은 사회적 현실과 공업화의 요청에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으나, 역사가 오래된 주민의 자발적 공동체이므로 합병·연합 등의 재편에 대한 저항이 강하다. 지방조직은 일면에서는 자치권을 가진 지방단체이지만 그보다도 국가의 행정단위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는 나폴레옹법전 이래 유지되어 왔으나 제5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상당한 변혁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지방자치 확대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지역경제의 발전에 따른 행정의 근대화라는 측면이 중시되고 있다.

1982년 프랑스 정부는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였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고수해왔는데, 이 제도의 수립을 시작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이 지방자치단체로 분산되었다. 지방행정에 있어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자치분권(Décentralisation)의 원칙’과 국가의 지방 행정에 있어서는 ‘지방분산(Déconcentration)의 원칙’이 적용된다. 프랑스의 지방자치단체는 1982년 자치제도의 시행으로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는 지방자체지의 행정에 대한 단순한 적법성 심사와 예산 통제를 실시한다. 이외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코뮌, 데파르트망, 레지옹 간 주종관계나 상하관계가 없다. 각 자치단체는 자신의 영역 내에서 자율권을 가진다.

동시에 정부는 지방분산을 위해 각 지방에 프레펙튀르(Préfecture)를 두고 프레펙튀르의 수장 역할을 하는 프레페(préfe)를 임명한다. 임명된 프레페는 국가에서 권리를 위임받아 국정의 큰 틀에 맞춰 지방행정을 본다. 프랑스는 2020년 기준 102개의 데파르트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데파르트망의 프레펙튀르를 지정한다. 프레펙튀르는 각 3~4개씩 하부 행정단위인 수프레펙튀르(Sous-préfecture)를 둔다. 수프레펙튀르의 수장은 수프레페(Sous-préfe)이며 이 또한 국가에서 임명한다. 대통령령으로 임명된 프레페는 국가 사무의 지방 행정 책임자이다. 자신이 맡은 지역의 선거, 사회질서 유지, 지방자치단체의 조력자이자 심판 역할을 한다.

코뮌은 법인격을 갖춘 최소 행정단위이다.  코뮌의회의원(Conseiller Municipal)은 주민들의 직선투표로 선출된다. 의원들은 의결기구인 코뮌의회(Conseil Municipal)를 운영하며 의회의 의장은 코뮌의 시장(Maire)으로서 집행기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코뮌 프랑스 중세의 주민자치체.
파리 프랑스의 수도.

4) 의회와 선거

몽펠리에 국회의사당
몽펠리에 국회의사당

프랑스의 의회 형태는 상원(Sénat)과 하원(Assemblée nationale)으로 구성된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의회는 법률안을 발의하고 의결할 권한을 가지며, 전쟁선포 승인권, 대정부 통제권 등을 가진다. 대정부 통제권이란, 하원이 대정부 불신임 결의를 가결할 경우 내각이 총사퇴하는 것이다. 18세 이상 남녀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하원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

상원의원은 각 선거구 내 하원의원·데파르트망 의원·코뮌의원 대표로 구성되는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선출되고, 지방자치단체의 이익과 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 국민의 이익을 대표한다. 24세 이상이 되어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이며, 3년마다 의석의 1/3을 개선()한다.

의회 의원의 겸직이 금지되는 직무는 각 부()의 직위, 헌법회의 평의원, 그리고 원칙적으로 선거에 의하지 않는 공직이나 국가의 감독 아래 있는 민간기업의 중요 직위 등이다. 정부 각료와 의회 의원의 겸직 금지는 제5공화국 헌법에 새로 규정되었다. 현직 각료가 상원의원에 당선되는 경우 1개월 이내에 각료직과 상원의원직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하며, 하원의원이 상원의원에 당선되는 경우 하원의원직은 그의 입후보 시 지정된 대리 후보가 승계하게 된다. 의회는 헌법에 정해진 범위, 즉 시민의 권리 및 국가의 조직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법률안을 표결한다. 법률의 발의권은 총리 및 국회의원 양쪽에 있고, 국민의회와 상원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정부는 국민의회에 최종판결을 요구할 수 있다.

국회는 장관에게 문서 또는 구두로 질문하는 외에 불신임 결의에 의하여 정부를 감독할 수 있지만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입법부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다. 정부는 심의를 요구하는 사항을 양원의 의사 일정에 포함하는 권한,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수정안에 반대할 수 있는 권한, 또는 국민투표나 새로운 선거로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등의 수단에 의하여 국회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데파르트망에서의 선거는 소선거구제와 2차 결선제로 진행된다. 인구 9만을 단위로 선거구를 나누고 선거구 1명을 선출한다. 1차 투표에서 유효투표수의 과반수를 얻은 후보자가 당선된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은 후보자가 없는 경우에는 1차 투표에서 유권자 수의 10% 이상을 얻은 후보자 사이에 2차 투표를 하여 득표수가 가장 많은 사람이 당선된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프랑스공화국연합 프랑스의 드골파 정치집단.
양원제 의회가 2개의 합의체로써 구성되고, 원칙적으로 각 합의체가 각각 독립하여 결정한 의사가 일치하는 경우에 그것을 의회의 의사로 간주하는 의회제도.

5) 정당

프랑스는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다. 2016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하기 전 진보와 개혁을 표방한 ‘앙 마르슈(En Marche)’를 창당하였다. 대통령직에 당선된 후 ‘전진하는 공화국(LREM, La Republique En Marche)’을 당명으로 하여 정식으로 정당을 등록하였고, 중도 이념을 표방한다. 민주운동당(MoDem, Mouvement démocrate)은 1978년 중도 및 중도 우파 계열 정치인들이 연합하여 창당한 프랑스민주동맹(UDF, Union pour la démocratie française)을 전신으로 한다.

샤를 드골 대통령과 드골의 정책을 지지하는 정당들이 우파 이념을 표방하며 계보를 이어온 공화당(LR, Les Republicains)이 있으며,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크롱과 경합을 벌였던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이끄는 국민연합(RN, Rassemblement National)은 극우 성향의 정당이다. 1972년 창당된 국민전선(FN, Front National)을 전신으로 한다.

좌파 이념을 표방하는 사회당(PS, Parti Socialiste)은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가 대통령직에 당선되면서 우파로부터 정권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2017년 대선에서 마크롱에 패배하고, 같은 해 총선에서는 2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외 극좌 성향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FI, France Insoumise)’당과 공산당(PCF, Parti Commuiste Français), 사회당 소속이었던 장-뤽 멜랑숑(Jean-Luc Mélenchon)이 창당한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당이 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프랑스공화국연합 프랑스의 드골파 정치집단.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의 정치가. 1981년 사회당 출신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파 정당의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좌우동거체제’를 만들어냈다. 유럽연방구상, 독·프 통합군 창설 구상을 발표했다. 1993년 유럽연합 발족을 성사시켰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정치가. 1995년 5월 L.조스팽과 E.발라뒤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르펜을 누르고 당선되어 두번째로 재선에 성공하여 2007년 퇴임시까지, 12년 간 대통령을 지냈다.

6) 사법

파리 최고재판소
파리 최고재판소

프랑스의 사법권은 공화정의 전통에 따라 다른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사법고등회의의 보좌를 받고 사법권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법제도는 1804년의 나폴레옹 통치 시대에 제정되어 근대 시민법전()의 선구로 인정되는 ‘나폴레옹 법전()’의 원칙이 유지되어오고 있으나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 따라서 제5공화국 발족과 동시에 광범위한 사법개혁이 진행되었다. 그중 중요한 것의 하나가, 옛 지방행정 단위인 캉통(canton:)마다 설치되어 있던 2,918개의 치안재판소()가 폐지되고 각급 법원 제도가 간소화되었다는 것이다.

민사법원()은 간이법원 454개소, 지방법원 175개소가 있는데, 간이법원은 판사 1명이 있는 법원으로, 개인 또는 동산에 관한 소송을 맡으며 최종심()으로는 150프랑까지의 사건을 취급한다. 지방법원은 합의제() 법원인데 간이법원의 상급심이다. 형사법원으로는 경범죄를 취급하는 경찰법원과 보통법원 외에 살인 등 중죄를 심판하는 중죄법원이 있다. 형사법원은 사법관 3명과 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선출된 9명의 배심원단으로 이루어지고 유죄 결정에 필요한 표수는 8명이다. 또 이것은 상설이 아니고 원칙적으로 3개월에 1번씩 각 현에서 열린다.

그밖에 고용관계 및 농지임차()의 분쟁을 재정()하는 각종 행정법원이 있다. 항소원()은 전국에 27개소가 있으며 각각 여러 개의 현을 관할에 두고 있고, 간이·지방 또는 특수 법원의 판결에 대해 제기된 상소()를 재정한다. 최고재판소는 파리에 있으며 배심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사건의 상고를 취급하지만 독자적 판결은 내리지 못하고, 항소원의 원판결()을 위법으로 파기하는 경우에는 다른 항소원에 되돌려 보내 새로 재판한다. 따라서 대법원은 법원 판례()를 통일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파기원()이라고도 한다. 한편 1981년 9월, 국민의회에서 사형폐지법이 통과되었고 또 국가반역죄를 취급하는 국가공안법원(:1963년 설치)은 1981년 7월에 폐지되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나폴레옹법전 1804년 나폴레옹 1세 때 제정·공포된 프랑스 민법전의 별칭.

7) 국방

육군 박물관
육군 박물관

프랑스의 대통령은 군()의 최고통치자로, 유일하게 핵무기의 사용 결정권을 보유하며 국방·군사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지도하는 국방위원회를 주재하는 등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그 밑의 총리는 국방의 책임자, 국방장관은 군사정책의 실무책임자이다. 육·해·공 3군 참모총장은 정부의 군사고문으로 작전상의 결정에 참여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57년부터 징병제가 시행되었고 1965년 이래 지원병제를 병용하였다. 복무기간은 처음의 18개월에서 10개월로 단축되었다. 1995년 9월부터 1996년 1월까지 핵병기의 신뢰성과 안전성 유지를 위하여 6회의 핵실험을 실시하였고, 그 신뢰성과 안전성이 확인됨에 따라 1996년 1월 핵실험 종료를 선언하였다. 이와 함께 2월에는 2001년부터 징병제도를 폐지하고 직업군인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18세에서 25세 사이의 남녀는 자원하여 군 복무를 이행할 수 있으며, 복무기간은 1년이다. 여성들은 비전투 직무에 배치된다.

프랑스의 기본적인 군사정책은, 첫째 독자적인 핵 억지력의 유지·강화, 둘째 북대서양조약기구에는 머무르나 통합 군사기구에는 복귀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95년 12월 북대서양조약기구 내 입지 강화를 목표로 일부 군사기구에 일부 복귀를 선언했다.

일찍이 ‘대국()으로서의 위신을 보지()하고, 핵공격에 굴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핵 보복력()을 보유한다.’는 드골정책에 의해 1960년 최초의 원폭실험(), 1968년의 수폭실험()을 거쳐 5번째의 수폭보유국이 되었다. 1980년 6월에는 중성자탄() 실험에 성공했으며, 1982년 6월 대통령 미테랑이 중성자폭탄의 개발촉진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91년 6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할 것을 결정했다.

2019년 추산에 따르면 프랑스는 GDP의 1.84%에 해당하는 금액을 군비로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기준 프랑스의 병력은 육군 120,560명, 해군 38,296명, 공군 46,239명, 통합군 60,363명으로 총 265,458명으로 집계되었다. 군 병력 감축 계획이 있었으나, 2015년 1월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하자 국내 영토를 상시 보호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감축 계획의 실행을 중단하고 병력을 증가시켰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핵확산금지조약 비핵보유국이 새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과 보유국이 비보유국에 대하여 핵무기를 양여하는 것을 동시에 금지하는 조약.

8) 외교

프랑스 외무부
프랑스 외무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가까스로 전승국()의 일원이 되었으나, 4년간에 걸친 독일군의 점령으로 본국이 피폐해진 데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이어 알제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등 외교활동은 정체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드골의 제5공화국은 안으로 알제리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밖으로는 강력한 지도력과 독자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둔 눈부신 외교정책을 전개하여 세계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드골의 구상은 유럽의 부흥과 자립으로 ‘세계의 안정과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며 그 유럽의 중심에는 ‘위대한 프랑스’가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근본을 이루었다. 드골은 얄타·포츠담협정에 따라 미국·소련 양 세력권으로 분할된 세계적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유럽통합 정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동시에 제3세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을 회복함으로써 스스로도 미국·소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3세력’이 되어 양자간의 조정역할을 하며 실추된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드골 외교의 구체적 특징은 다음 3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유럽 통합에 관해서는 EEC(European Economic Community:유럽경제공동체)에 참가하고 프랑스·독일 협력을 획기적으로 추진하였다. 유럽 국가들이 ‘연방’이나 ‘합중국’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다만 프랑스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들로 구성되는 연합()’에 머물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우랄까지’ 동서 유럽의 접근을 도모하여 유럽의 발언권 확대에 힘썼다.

둘째, 미국에의 도전이다. 드골은 2차례에 걸쳐 영국의 EEC 가맹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미국을 대신한 영국이 "트로이의 말"로서 프랑스의 주도권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자적인 핵무장을 추진하고 1967년에는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의 통합사령부에서 탈퇴하였다. 이것도 미국의 군사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강화한다는 의도에서였다.

셋째, 드골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물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방문하여 적극적인 경제원조계획을 추진하고 이른바 ‘제3세력’에 프랑스의 성가()를 크게 높였다. 또 동남아시아에 대한 중립화 구상을 발표하고 파리에서 베트남 평화회의를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64년에는 중공을 승인하였다. 중공 승인은 중국대륙이 참가하지 않는 아시아의 평화나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유럽 문제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고도의 외교정책이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드골외교는 미국·소련의 상대적 기반의 저하, 중·소 대립 등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소련 양극 체제를 뒤흔들었으며, 세계의 다극화()를 가져왔다. 퐁피두의 대통령 취임 후 외교정책은 한편에서는 드골의 자주독립 노선을 계승하였지만, 영국의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가맹 교섭에 청신호를 보내는 등 미비점을 보완한 데 이어 1973년 1월에는 영국을 가입시켰다. 이것은 달러 위기 때문에 미국·영국 사이의 관계가 이전보다 약화되었고, 또 상승하는 서독의 지위와 균형을 취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테랑 시대의 기본 외교정책은 미국·소련 초강대국에 대한 ‘프랑스의 독자성’의 유지, 유럽의 지위강화 등으로 보수정권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의 핵무기, 아프가니스탄·폴란드 문제 등에서는 전()정권보다 오히려 강경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서구 동맹국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러나 대소() 경제 제재에는 반대하였다.

한편 1982년 1월 프랑스 국영 가스회사(GDF)는 시베리아 가스 구매계약을 체결, 1984년부터 25년간 연간 80억㎥의 시베리아산() 가스를 도입하기로 하였다. 중동정책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에 접근하고 있으나 이스라엘의 강경방침에는 강한 반발을 나타냈으며, 중동평화의 주도권을 겨냥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미테랑 정부는 제3세계를 중시하고 원조강화, 불개입(), 억압정권의 제재, 무기수출의 제한 등을 주장하였으나 실제 무기수출량은 미국·소련에 다음가는 세계 제3위였다. 미국은 당초 좌익정권의 출현, 특히 공산당 입각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나 대통령 미테랑은 1982년 3월 미국을 방문하는 등 양국의 상호 협조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과의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였는데, 프랑스는 1982년 1월 니카라과에 무기(초계정·헬리콥터 등)를 원조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유럽 관계에서는 보수정권보다 친 NATO적 입장을 보이고 있으나 군사기구에 복귀할 의사는 없음을 재확인했다. 포클랜드 분쟁에서는 영국을 지지하고 대()아르헨티나 무기 금수()에 참가하였다.

1982년 10월의 정기협의()에서 서독과 군사·전략면에서의 협력강화에 합의하고, 전문가에 의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프랑스는 제3세계의 옹호자로서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에 대한 제3세계 외교활동의 중심으로 파리의 OECD 본부,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의사당 등은 국제정치·국제경제의 중심지임을 보여준다. 1945년부터 EU(European Union:유럽연합)의 통합을 기본 외교정책으로 추진한 프랑스는 1992년 2월 EU에 가입하였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포클랜드전쟁 남아메리카대륙의 동남단, 아르헨티나의 대륙부에서 약 500km 떨어진 남대서양의 소도인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둘러싼 영국·아르헨티나 간의 분쟁.
포츠담협정 1945년 영국·미국·소련 3개국 수뇌 사이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조인된 독일의 전후처리 방침에 관한 협정.
유럽경제공동체 유럽의 지역적 경제통합기구.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의 제5공화국 2대 대통령.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재임했다. 1944년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1962년 총리에 취임, 1968년까지 연속 4차례나 총리를 지냈으며, 1969년 드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유럽공동체 EEC(European Economic Community:유럽경제공동체), 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유럽석탄철강공동체), Euratom(European Atomic Energy Community:유럽원자력공동체)이 통합하여 설립한 기구.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의 정치가. 1981년 사회당 출신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파 정당의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좌우동거체제’를 만들어냈다. 유럽연방구상, 독·프 통합군 창설 구상을 발표했다. 1993년 유럽연합 발족을 성사시켰다.
유럽연합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연합기구이다. 2012년 지역공동체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얄타 회담 제2차 세계대전 종반에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1945. 2. 4~11).
북대서양조약기구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과 군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체결한 북대서양조약의 수행기구.

9) 유럽연합과의 관계

프랑스는 유럽연합의 회원국이자,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무너진 유럽을 재건하고 유럽 각국이 서로 간의 신뢰를 쌓기 위해 만들어진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회원국이다. 초국가주의 원리를 기반한 국제기구이며, 유럽연합의 초석인 석탄철강공동체는 이탈리아, 서독,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프랑스 총 6개의 국가로 이루어져 있다. 1951년 파리에서 체결된 파리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이 기구에 속한 회원국들은 공동의 석탄 및 철강 시장을 만들었고 천연자원에 대한 경합을 상쇄하였다. 이후 원자력, 경제활동 등을 관할하는 공동체들이 합쳐지면서 1993년 오늘날의 유럽연합이 출범하였다.

EU 이사회(Council of the EU)에서 각국 장관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EU 법률을 채택하고 정책을 조정하는데, 정책 분야에 따라 프랑스 각 부서의 장관들이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또한 유럽연합의 대표적인 경제자문기구인 유럽 경제 사회위원회(European Economic and Social Committee)와 각 지역 발전 및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자문기구인 유럽 지역위원회(European Committee of the Regions)에서 각각 20여 명의 프랑스가 대표가 활동하고 있다.

각 EU회원국은 EU에 분담금을 지불하고 있는데 각국의 경제 규모에 따라 그 금액이 정해진다. 2018년 기준 프랑스는 EU가입 이후부터 2017년까지 프랑스 전체 경제 규모의 0.85%인 20,573억 유로를 분담금으로 지출하였다. EU로부터 받은 경제적 혜택은 프랑스 전체 경제 규모의 0.61%인 14,778억 유로였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EU로부터 수혜받는 것보다 기여하는 것이 더 큰 기여국이다. 프랑스가 EU 예산에 지불한 분담금으로 EU의 회원국들은 도로 및 인프라 건설, 연구지원 및 환경보호 등을 위해 사용된다.

2019년 기준 유럽연합 내 무역은 프랑스 수출의 59 %를 차지하고, 수입 측면에서는 전체 수입 규모의 69%를 유럽연합 회원국으로부터 의존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다양성 속의 통합을 모토로 삼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시절부터 모든 회원국의 언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있다. 현재 유럽연합의 공식언어는 24개이며 브렉시트로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함과 동시에 프랑스는 유럽연합 내에서 불어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프랑스어는 프랑스 문화와 사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매개체이기 때문에 프랑스어의 사용을 더욱 더 강조한다.

5 . 경제

1) 산업

라데팡스
라데팡스

프랑스는 1947년 이후 경제사회발전계획을 실시하여왔다. 1950년대까지는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재건과 산업 전반의 근대화가 그 기본목표였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 1974년 석유위기 때까지는 산업구조의 고도화, 전략산업 확충 및 기술개발 촉진에 역점을 두었으며, 석유위기 이후에는 에너지 및 원자재 확보정책에 제일의 역점을 두었다.

1980년대 프랑스 산업 전반을 살펴보면, 원자력·우주항공 등은 세계 최첨단 수준에 와 있으나 조선·철강 등은 불황으로 국제시장에서 고전하였다. 자동차도 국내와 아프리카 등 전통적 수출시장에서 일본산 자동차의 진출에 압도되고 있었으며 농업 분야에서는 이탈리아, 에스파냐와 경쟁했다. 전통적 농업국이었던 프랑스가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을 보이게 된 것은 정부 부문과 민간부문의 협조를 통한 경제계획의 실현으로 요약되는 프랑스 특유의 ‘관민 혼합경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무기제조·운수·보험 등의 분야에 국영기업이 있었으나 1944∼1948년에 걸쳐 기간산업의 전 분야에 걸쳐 본격적으로 산업 국유화가 급격히 진행되어 전기·가스·석탄·철도의 거의 전부, 해운·항공(예컨대 에어프랑스)·금융·보험·광고·자동차·화학공업 등 상당한 부분이 국유화되어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국유화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들 프랑스 국영기업은 일반적으로 자주적인 경영권을 가지고 민간기업과 거의 같은 형태로 운영되었다.

1946년부터 소위 ‘모네(Monnet) 플랜’이라고 불리는 ‘근대화 설비계획’에 따라 정부와 산업계 간의 관민 협조를 바탕으로 전후 수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계획과 강력한 공업화 정책에 따라 선진공업국으로 부상하였다. 농업은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줄어든 반면, 광공업·서비스 부문의 비중이 커졌다. 국유화 정책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꾸준히 계속됐으나 특히 1981년도 사회당 정권의 등장으로 대대적인 국유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회당 정부는 공공부문의 확대, 즉 국유화 및 산업투자의 확대를 통한 전략산업의 지원·육성을 내세웠으며, 국유화의 대상은 11개 기업그룹과 36개 은행 및 2대 금융그룹이었다.

신국유화법이 전면 실시되면서 국유화 부문의 고용 90만 명, 기업수의 약 23%, 총매출액의 약 29%가 국가의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국유화 정책은 1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경제 악화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여 경제정책은 긴축정책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실패도 한몫을 한 결과 사회당은 의회에서 지배권을 잃었다. 뒤이어 취임한 총리 시라크 주도로 이제까지 국유화해 온 기업의 민영화가 이루어졌다.

유럽연합 시장 통합에 의욕을 가진 미테랑 대통령은 경제기반의 강화, 금융·자본시장의 개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2년에는 14년 만에 약 57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등 농산물과 군수품 및 첨단 분야의 수출이 호조를 보였다. 1990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경제정책의 기조는 고용증대, 재정적자 축소, 물가 억제, 민영화 추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프랑스는 2019년 기준 세계 7위 수준의 명목 GDP를 기록하며 관광산업, 방위산업, 제조업, 농업 등에 있어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2018년 기준 연간 약 9천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세계 제 1위의 관광대국이다. 2017년 기준 약 182억 달러 규모의 방산 무기를 수출하며 방위산업에서도 세계를 선도한다. 프랑스의 주력 제조업으로는 자동차, 기계, 건설, 방산, 항공, 전자공업 등이 있다.

농업의 비중은 다른 선진 공업국에 비해 큰 편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업국인 동시에 농업국으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프랑스 전체 농경지 면적은 약 2,700만 헥타르이며 이는 프랑스 영토의 54% 수준이다. 또 EU 전체 회원국이 보유하고 있는 총 농경지의 1/3을 차지한다.

농업은 19세기 이래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도 소농경영을 근간으로 해왔으나 지금은 기계화 중심의 대규모 농업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농업경영의 통합이 촉진되어 농가수가 크게 줄어드는 경향으로, 농촌인구의 도시 유출이 현저하다. 프랑스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의 종류는 대단히 풍부하다. 유럽 최대의 농업국으로 주요 식량은 거의 자급자족하며, EU 여러 나라에 대한 식량공급국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보리·옥수수·감자·사탕무·포도주·낙농제품 등이다. 특히 포도주 생산은 세계 제1위이며, 다음으로 밀·식용육의 생산이 많다. 국토의 25%가 목초지인 프랑스는 소와 말 사육을 비롯한 축산업도 활발하며, 이밖에 국토의 약 25%가 임야이기 때문에 송진·테레빈유(식물의 수지를 증류하여 얻는 휘발성 기름)·목재·호두나무 등의 임산물이 산출된다. 2016년 기준 프랑스는 세계 제 6위의 농업 생산국이며 EU 농업 분야 총 생산의 17%를 차지한다. 

또한 유럽 유수의 수산국으로, 주요 어획물은 대구·연어·고등어·새우·굴·조개 등이 어획된다. 이밖에 광공업으로는 석탄·석유의 이용량이 현저하게 줄어든 반면, 원자력 에너지의 이용률이 커졌다. 2017년 기준 프랑스 전력 사용량의 71.6%를 원자력 발전으로 충당하고 있다. 프랑스의 2017년 기준 총 58기의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다음 세계2위를 차지한다. 프랑스 전역에서 총 19개 단지 내에 설치되어 있다. 원전에서 얻는 전력으로 주변 국가와 EU 역내에 전력을 수출하고 있다.

프랑스는 신재생에너지를 독일 다음으로 많이 생산하고 있다. 2016년 기준 프랑스의 신재생에너지원별 생산 비중은 목재 42%, 소수발전 20%, 바이오연료 9%, 풍력 7%, 태양열 3% 순이다.

2) 운송교통

프랑스 고속열차 TGV
프랑스 고속열차 TGV

프랑스의 철도망은 19세기 말에 만들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모두 국유화하여 프랑스 국유철도회사에 통합되었다. 주로 파리에서 다른 도시로 나가는 노선들이 대부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철로가 거의 파괴되었지만 전후의 경제계획으로 재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전화 보급 사업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용도가 낮은 농촌 지역의 철도가 폐쇄되었다. 철도는 종합역이 없고 6개의 종착역과 4개의 교외선 종점이 있다. 각 역의 주변은 1968년부터 실시된 새 도시계획에 따라 부도심을 형성하였다.

1980년대 초부터 파리와 여러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고속열차인 테제베(trains à grande vitesse, TGV)가 개통되었다. 프랑스 남동부 지역, 특히 리옹과 지중해 연안 도시들은 교통을 이용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이용빈도가 높았다. 1994년 런던, 제네바, 로잔, 브뤼셀을 있는 고속 열차가 개통되었다. 런던과 파리를 잇는 유로스타(Eurostar)는 해저터널을 사용하여 약 3시간만에 두 도시를 연결한다. 2018년 기준 연간 약 9백만 명이 유로스타를 이용한다.

국내 도로망은 17세기 루이 14세 시대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잘 정비된 나라에 속하였다. 세계대전 중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 후 완전히 정비되어 세계에서도 자랑할 만한 도로망을 갖추었다. 프랑스의 고속도로인 오토루트(Autoroute)는 프랑스 전국을 연결하며 1960년대 중반부터 건설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경제 발전 속도를 높이고 많은 운송용 차량을 수용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고속도로 교통량은 1970년 이후 2010년대에 들어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차량의 약 5 분의 1이 상업용이다. 증가하는 교통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간선도로와 고속도로를 포함하여 총 약 965,000km에 달하는 광범위한 도로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민간기업이 투자하고 운영하며 통행료를 부과받는다. 파리, 리옹, 마르세유 및 릴과 같은 대규모 도시 중심에 초점을 맞춘 초기의 지역 네트워크뿐 아니라 수도에서 뻗어 나오는 방사형 경로를 확장하였다. 2020년 기준 프랑스의 오토루트는 전국적으로 건설되어 전국의 도시들을 잇고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교통 운영기관으로는 프랑스 철도 협회 (Société Nationale des Chemins de Fer Français), 프랑스 국유 철도(Société Nationale des Chemins de fer Français), 국영 항공사인 에어프랑스, 파리교통공단(Régie Autonome des Transports Parisiens)이 있다. 수도 파리에는 촘촘한 네트워크가 조성되어 있고 다양한 교통 수단이 운영된다.

1939년 이후 시내에는 노면전차가 없어지고 1900년에 건설된 지하철(Métro de Parissms)은 16개 주요 노선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으며, 요금이 싸고 빨라 평일에는 매일 500만 명이 이용한다. 14개의 노선을 가지고 있는 지하철은 파리 시내와 교외 일부를 연결한다. 2017년 기준 302개의 역이 있다. 생-라자르역(Saint-Lazare)과 하우스만 생-라자르역(Haussmann Saint-Lazare), 아브르 코마르탱역(Havre-Caumartin), 오베르역(Auber), 오페라역(Opéra) 등 파리 도심에 있는 역들은 역간 거리가 가까워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는 RER(Reseau Express Regional)는 파리 도심에서 교외 지역을 연결한다. RER은 총 5개의 노선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의 지하철과 RER은 파리교통공단이 운영한다.

버스는 300여 개의 노선이 있으며 장거리 운행도 하고 있다. 시 외곽을 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으며, 간선국도와 연결되어 있다. 국영철도망을 통해 고속열차가 파리∼리옹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를 연결한다.

항공화물 및 여객 수송용 운송수단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해마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맞아들이는 파리를 중심으로 한 항공운송은 큰 신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유럽 각지는 물론 북아메리카·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중근동·극동에도 취항한다. 파리 근교에 2개의 공항이 있다. 프랑스 국제공항인 샤를드골공항은 파리 중심에서 북동쪽으로 약 2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74년 개항한 이 공항은 서유럽에서 런던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전체 프랑스 여객의 약 3분의 2를 수용한다. 1932년 개항한 파리 오를리 공항(Aéroport de Paris-Orly)은 주로 국내선을 운용하며 일부 해외 노선을 취항한다. 파리를 중심으로 약 20km 떨어져 있으며 남쪽에 위치한다. 파리의 북동쪽으로 11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르부르제(Le Bourget) 공항은 1919년에 개항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공항이다. 오를리 공항의 개항 이후 가까운 유럽 국가들로 취항하였고 샤르드골 개항 취항과 함께 운항 업무를 중단하였다. 터미널은 항공박물관으로 꾸몄고 공항 활주로는 개인용 여객기와 에어쇼로 이용된다. 니스와 마르세유, 리옹, 리옹, 보르도, 툴루즈 및 스트라스부르에 지방 공항이 있다.

또한, 내륙교통 수단의 하나로 내륙의 작은 하천을 이용하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해운도 대외 수송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나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프랑스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항구도시 르 아브르(Le Havre)는 화물을 하역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독일·벨기에·지중해를 잇는 운하가 발달되어 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프랑스국영항공 프랑스의 국영 항공회사.

3) 무역

프랑스는 전 세계의 무역을 주도하는 무역 선진국으로 특히 기계, 화학 및 화학 제품, 열대 농산물, 의류 및 직물과 같은 전통적인 산업 제품이 주요 수출품이다.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았던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무역 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1992년부터 프랑스 관광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비상품 거래, 특히 관광으로 인한 긍정적 인 균형과 함께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는 유럽연합 회원국이기 때문에 회원국가와의 무역에 있어서 관세 혜택을 받는다. 1968년부터 회원국들 간 동일한 관세 제도를 운영하고 이를 준수하고 있다. 수출입 시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하는 등의 관세 혜택을 받는다. 대외무역의 4/5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이루어지며 수출입의 3/5 이상이 EU 국가를 대상으로 한다. 21세기에 들어 프랑스 무역에서 러시아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프랑스 제품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대 하기 위한 무역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EU, 유럽국가들과의 거래 이외에도 일본이나 미국과의 FTA를 체결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30년까지 에너지를 제외한 무역 분야에 무역수지 균형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스와 석탄의 매장량이 적기 때문에 석유와 화석 연료는 수입에 의존한다.

국제통화기금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9년 프랑스의 수출액은 전년 대비 2.9% 감소하여 5,697억 3,200만 달러를 기록하였으며, 수입액은 전년 대비 4.7% 감소한 6,511억 7,9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2018년 프랑스의 주요 수출국은 독일이 15%(약 832억 1,000만 달러)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으로 미국 8%(약 453억 1,000만 달러), 스페인 7.9%(약 443억 2,000만 달러), 이탈리아 7.6%(약 427억 5,000만 달러), 벨기에 7.2%(약 403억 2,000만 달러), 영국 6.8%(약 383억 9,000만 달러), 중국 4.4%(약 246억 2,000만 달러), 네덜란드 3.7%(약 208억 6,000만 달러), 스위스 3.4%(약 189억 달러), 폴란드 2.1%(약 11억 9,000만 달러) 순으로 나타났다. 주요 수출 품목은 기계류·원자로·보일러 12%, 운송수단 9.9%, 항공기 9.2%, 전기·전자장비 7.9%, 의약품 6%, 플라스틱 4%, 향수 및 미용제품 3.5%, 음료 및 식초 3.4%, 화석연료·원유·증류제품 3.3%, 광학기기 및 의료기기 등 3%, 철강 2.9% 등이 있었다.

2018년 프랑스의 주요 수입국 역시 독일이 16%(약 1,022억 5,000만 달러)로 가장 큰 거래규모를 차지하였다. 이외 중국 9.1%(약 590억 4,000만 달러), 이탈리아 7.8%(약 504억 1,000만 달러), 벨기에 7.2%(약 464억 달러), 스페인 6.6%(약 429억 달러), 미국 6.4%(약 415억 8,000만 달러), 네덜란드 4.6%(약 300억 5,000만 달러), 영국 3.8%(약 242억 8,000만 달러), 스위스 2.7%(약 176억 4,000만 달러), 폴란드 2%(약 127억 달러), 일본 1.8%(약 118억 7,000만 달러), 러시아 1.8%(약 118억 1,000만 달러) 순으로 비중을 차지하였다. 주요 수입 품목으로는 기계류·원자로·보일러 13%, 운송수단 11%, 화석연료·원유·증류제품 11%, 전기 및 전자장비 8.8%, 플라스틱 3.9%, 의약품 3.8%, 항공기 3.2%, 광학기기 및 의료기기 등 3%, 유기화학물질 2.5%, 철강 2.1%, 의류 1.9% 등이 있었다.

4) 고용노동

프랑스에서는 노동문제가 ‘개인적 문제’로 생각되는 경향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데 그것은 19세기 이래의 ‘인구위기’, 말하자면 세대에서 세대로의 계승이 1:1로 이루어지는 특수 상태에 있었던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공업국으로 새로이 출발하면서 노동문제는 비로소 사회적·경제적 문제로 취급되기에 이르러, 1914년에는 전국실업금고가 창설되고 1919년에는 기술·직업교육에 관한 아스티에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고용’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기본방침은 1945년에 세워졌다. 1949∼1950년, 1952∼1953년의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큰 실업문제는 없었으며, 1954년에 23만에 달했던 실업자 수도 알제리 전쟁 등의 영향으로 1957년에는 8만 명대로 줄어들었다. 1958년 이후 드골 정권에 의한 비교적 순조로운 연차계획의 실현은 프랑스의 경제발전을 지속시켜 주었고 불어나는 도시인구는 각종 공업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실업자 수는 계속 증가하여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민노동자의 유입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프랑스는 한때 유럽공동체(EC, European Community) 국가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었으나, 주5일 근무제가 점차 확대되면서, 특히 파리 등 주말을 교외에서 보내는 인구가 많은 곳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회당 정부는 1985년을 목표로 주 35시간 노동과 정년(노령연금 수급자격)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등의 정책을 공약하였으며, 그 제1단계로 노·사 대표 사이에 1982년 2월 1일부터 노동시간을 1시간 단축하여 주 40시간에서 주 39시간으로 단축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1982년 1월에는 연간유급휴가를 4주간에서 5주간으로 1주간 늘리기로 각의에서 결정하였는데, 경영자 측은 임금을 그대로 둔 채 노동시간만을 단축하면 원가상승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반발하였다.

2019년 기준 프랑스의 연간 공휴일은 10일이고 연간 유급 휴가기간은 5주이다. 62세부터 퇴직연금을 받을 수 있고 실업시 실업수당을 받는다. 프랑스의 법정 근로시간은 주당 35시간이다. 주로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서 법정 근로제도를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일반 기업에서는 35시간 이상 근무할 수 있고 추가 수당이 제공된다. 기간제 근로자나 시간제 근무제 고용시 35시간 근로를 적용해야 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근무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휴일이다. 일반적인 근무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 혹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이다. 점심시간은 45분에서 1시간까지 사용하며 기업마다 다르다. 유연근무제를 도입하여 근무시간을 조절 할 수 있는 기업이 많아지는 추세다.

노사관계의 조정은 호텔업, 신문·잡지업, 가내공업을 제외한 부문의 ‘프랑스고용자 전국평의회(CNPF)’와 노동조합단체인 ‘노동총동맹(CGT)’, ‘노동자의 힘(FO)’, ‘프랑스 노동자 민주동맹(CFDT)’, ‘프랑스 그리스도교 노동자동맹(CFTC)’ 및 교육계의 ‘국민교육연맹(FEN)’ 등이 맡고 있는데, 분쟁은 계약방식에 의해 해결해야 할 의무를 각각 지고 있다. 또 1950년의 법률에 따라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집단관계를 정하는 단체계약의 체결은 조합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 계약은 부문별, 또는 일정 수의 기업에 대해 전국적 혹은 지역별의 모든 노동조건이 함께 포괄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 노동부가가 분야·지역별로 일률적 조건을 적용하기도 한다.

2015년에 프랑스의 실업률은 10%를 초과하였으나, 조금씩 감소하여 2019년에는 8.62%까지 낮아졌다. 2019년 4/4분기 프랑스의 근로자 수는 약 2,854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한편 2015년 24.55%까지 상승했던 15-24세 실업률은 2019년 20.96%까지 낮아졌으나 여전히 높은 수치이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알제리전쟁 1954년부터 8년간에 걸쳐 프랑스와 벌인 알제리의 독립전쟁.

6 . 사회

샹젤리제 거리
샹젤리제 거리

프랑스의 사회·문화는 유럽 서단(西)에 위치하는 지리적 조건과 민족 형성의 역사적 조건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다. 자연조건을 살펴보면, 유럽 지형의 기복 있는 특색이 모두 프랑스의 자연에 집약되어 있어 풍경이 다양하다. 총연장 2,000km 이상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해양성 기후의 영향과 더불어 예로부터 "아름다운 나라 프랑스", "사랑스런 프랑스"라고 불리어왔을 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프랑스의 6각형"은 지협()으로서 동서 및 남북 양 방향의 교차점을 이룬다.

지중해 문명은 북쪽을 향해서는 론 계곡을 통하여 라인 계곡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로라게 안부()를 통하여 "풍요의 땅" 아키텐분지를 지나 한편으로는 푸아투 안부를 넘어 루아르계곡으로부터 파리분지·플랑드르평원에 이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해협을 건너 영국에 도달한다. 프랑스 서쪽에서는 대서양·영국해협·북해를 통하여 남북방향으로 전파된 켈트계()의 독특한 영향이 지금까지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예를 들어 공동정신을 요구하는 ‘오픈 필드’의 농업경관에 북동부에서의 게르만의 영향이 잘 나타난다. 자연·주민·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요소를 갖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일찍 민족을 형성한 국가이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으로 이 지역에 지중해 문명이 전해지고 도시와 도로도 건설되었다. 거리가 먼 동방()의 이질문화()와의 직접 접촉이 적었던 풍요한 이 땅에 로마 문화를 기초로 한 그리스도교 국가가 발족하였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에 ‘조국’이라는 의식이 확고해진 것은 중세 봉건시대의 발루아 왕가가 중앙집권에 의한 왕역()의 확장에 전력을 쏟고 있던 15세기이다. 영국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일어선 ‘오를레앙의 소녀’ 잔 다르크의 출현이 계기가 된다. 그녀는 겨우 싹트기 시작한 프랑스인의 민족 의식과 가톨릭 신앙을 구체적으로 승화시켜 민족국가로서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브르타뉴·오베르뉴 등지가 왕역에 편입된 15세기 말에는 현재의 프랑스와 거의 비슷한 영역이 통일되었고, 16세기에는 다른 국가에 앞서 강대한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그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사회·문화의 조직 및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잔 다르크 15세기 전반에 영국의 백년전쟁 후기에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이다. 1429년의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도왔다.

1) 도시생활

1998년 현재 프랑스는 인구의 50% 이상이 인구 5만 명 이상의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파리 인구는 1000만 명에 이른다. 프랑스에는 인구 35만 명 이상의 도시가 12개이며 20만 명 이상의 도시는 30개이다. 2002년 현재 수도 파리에는 220만 명이 거주하며 위성도시까지 포함하면 1100만 명이 살고 있다. 1990년 인구 통계조사에 의하면 전체인구의 6%인 350만 명이 프랑스로 이민을 왔는데, 그중 14만 명이 유럽국가에서 들어왔다. 주요도시로는 마르세유(무역도시), 리옹(금융도시), 툴루즈(공업도시), 니스(휴양도시) 등이 있다. 역사가 긴 중앙집권의 결과가 여기에도 나타난다. 그와 같은 현상으로 인해 지방도시에서는 자본 및 인재의 부족 현상이 빚어지며, 프랑스 경제의 정상적인 발전이 크게 저해되고 있다.

그와 같은 사실의 자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치·행정상의 노력에 반영되어, 1세기 이상에 이르는 인구정체로부터 겨우 벗어나게 되는 한편 지방중심지로서의 소도시의 발전이 눈에 띄고 있다.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54개시(1975)로 늘어난 것은 그레노블과 같은 급격히 발전한 지방 공업·문화도시가 많아졌음을 나타내며, 한편으로는 인구 3∼4 명만의 소도시가 인근 농촌인구를 흡수하면서 새로운 작은 중심지를 형성해가고 있다. 물론 경제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부문에 노동인구가 집중되어 이동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으로, 그 방향은 농촌에서 지방도시로, 지방도시에서 파리지구로의 인구이동을 촉진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지방 소도시망은 여전히 근대공업화 이전의 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것을 어떻게 개선하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로 남아 있다. 프랑스 정부는 개선책의 일환으로 리옹·마르세유·릴·루베·투르크왕·툴루즈·보르도·스트라스부르·낭트·낭시 등 8개 공업지구의 종합적 발전을 위해 특별법을 만들어 원조하고 있다.

프랑스는 풍요한 국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로부터 ‘프랑스의 사막’이라고 불려온 과소지대()의 활용과, 근대적 지방도시망에 의한 새로운 국토골격()의 형성이 가장 긴요한 과제이다. 그것은 1947년에 시작된 제1차 계획 이후 1980년에 종료된 제7차 계획까지 변하지 않는 개발 초점의 하나였다. 한편 국민들의 생활태도에서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예로부터 프랑스 국민 기질의 두드러진 특성은 ‘가정’에서의 안주를 원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현재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토지와 직결되었던 세대로부터 이미 3∼4세대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활의 기조에는 ‘전원()’적인 것을 계속 소유하고, 전원적인 향취가 느껴지는 가구를 사랑하며, 금전 문제에서도 신용경제의 발전을 무시하는 ‘장롱 속의 축재()’의 경향이 도시에서도 의외로 많다. 장기휴가는 온 가족이 고향에서 즐기며, 퇴직 후에는 고향에 살기를 원하는 도시인이 많아 프랑스의 정신은 여전히 ‘토지’와 밀접하다. 프랑스인의 국민성을 살펴보면 법률주의는 정의감과, 개인주의는 개인의 존중과, 보수주의는 인간성의 부정에 대한 경계심 또는 소위 현대적 생활의 여러 조건에 대한 신중성과, 안주는 모국에의 애착과 각각 표리일체를 이룬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프랑스 오드프랑스 레지옹(Région) 노르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수도.
툴루즈 프랑스 옥시타니 레지옹(Région) 오트가론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주도.
루베 프랑스 북서부의 오드프랑스주(레지옹:Region) 노르 데파르트망(Département)에 있는 공업도시.
스트라스부르 프랑스 그랑테스트 레지옹(région) 바랭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주도(主都).
니스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Région) 알프마리팀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수도.
마르세유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Région) 부슈뒤론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수도.
리옹 프랑스 남동부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Région) 론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주도.
낭시 프랑스 그랑테스트 레지옹(Region) 뫼르트에모젤 데파르트망(Department)의 수도.
보르도 프랑스 누벨아키텐 레지옹(Region) 지롱드 데파르트망(Department)의 수도.
공업도시 도시의 여러 기능 중 공업기능이 발달한 도시.
낭트 프랑스 서부 루아르아틀랑티크 데파르트망(Department)의 수도.

2) 국민생활

뤽상부르 공원
뤽상부르 공원

프랑스는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문명의 이기의 보급률이 높아 세계 최상의 생활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 가구의 TV 보급률 75%, 전화 보급률 75%, 자가용 보급률 78% 등이다. 주택 보급률은 54.5%이고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높은 편이다. 프랑스인의 56%가 단독 주택에서 사는데 도시에서는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이 많지 않으며 아파트를 많이 이용하지만 파리의 아파트는 오래 되고 낡은 것이 많다. 따라서 가계비에서 주거비(전기세, 난방비 포함)가 차지하는 비중도 22.3%나 된다.

또 프랑스인은 휴가를 무척 즐기는데, 1936년 이래 법률로도 유급휴가가 보장되어 있다. 여름 휴가시에는 인구의 50%가 해안이나 시골에서 장기간 머무르기 때문에 7∼9월의 파리는 파리 시민보다 카메라를 멘 외국인이 더 많을 정도이다. 대부분의 상점들도 8월 중에는 휴가로 문을 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겨울철에는 알프스에서 스키를 즐기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13%가 별장을 가지고 있다.

또 식생활을 보면 아침식사는 빵과 커피뿐이나 점심과 저녁은 포도주를 곁들인 다양한 요리를 즐기고, 식후의 디저트 등 프랑스인의 식도락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의 관광지는 파리가 역사·문화·예술의 유산이 풍부하여 가장 훌륭하고, 그밖에 마르세유, 알프스의 몽블랑, 코트다쥐르 해안 등이 유명하다. 또 알자스·노르망디·브르타뉴·오베르뉴 등의 전원지대로 가면 아름다운 고성 등 향토색 넘치는 프랑스를 접할 수 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코트다쥐르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州) 해안 지역.
몽블랑산 알프스산맥의 최고봉. 높이 4,807m.
노르망디 프랑스 서북부의 레지옹(Région)이다.
마르세유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Région) 부슈뒤론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수도.

3) 사회보장

프랑스는 19세기에 ‘상호원조회사’(공제조합)가 있었고, 현재는 1만 4000개의 조합이 2200만 명의 조합원을 포용하면서 강제보험을 보완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 각국에서는 사용자 과실()의 입증을 배제하는 노동재해보상입법(勞)이 채택됨에 따라 프랑스에서도 1898년 4월 노동재해보상법이 시행되었다. 이어서 1910년에는 1930년의 ‘사회보험법’에 흡수된 ‘근로자·농업종사자 퇴직연금법’ 등이 성립되고, 또 1932년에는 가족수당법이 제정되었다.

프랑스에서 사회보험의 제도화는 유럽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나 가족수당에서는 벨기에와 함께 선구자 구실을 하였다. 프랑스는 1935년 이래 사망률출생률을 상회하게 됨으로써 ‘인적 자원의 조성’이라는 측면에서 1938·1939년 가족수당제도가 대폭 수정되었으며, 특히 1939년 7월의 ‘가족법전()’은 그 적용대상을 종래의 임금노동자는 물론 자유업자·자영업자 등에게까지 확대하여 실질적으로 그 범위가 전국민을 포함하게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보장제도의 골격은 1945·46년에 거의 확립되었다. 종전에 시행되던 사회보험법·노동재해보상법·가족수당법 및 노령 피고용자수당에 관한 일련의 입법은 1945년 10월 4일의 ‘사회보장의 조직에 관한 법률’로 통합되었고, 이어서 보험법으로서 ‘상공업 피고용자에게 적용되는 사회보장제도를 규정한 1945년 10월 19일의 법률’, 노동재해보상법으로 ‘노동재해·직업병에 관한 입법의 수정·통합과 이를 사회보장 조직에 통합시키기 위한 1945년 10월 19일의 법률’, 가족수당법으로서 ‘가족급여제도로 정한 1946년 8월 22일의 법률과 사회보장의 특별 송사에 관한 1946년 8월 22일의 법률’이 제정되어 현행 사회보장제도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입법을 통하여 사회보험과 여러 가족수당의 운영을 일원화하는 방침이 정해졌으나, 1949년 2월에 가족수당금고가 설치되고, 1952년에는 많은 부담금 취급조합 등이 창립됨에 따라 이 원칙은 무너지게 되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후 이른바 ‘1967년의 개혁’이 이루어져, 종래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대폭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종래 재정을 총괄하던 전국사회보험금고에 대신하여 질병보험금고, 노령보험금고, 가족·급여금고를 설치하였으며, 비농업수공업 및 독립근로자도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개혁의 정신은 사회보장을 프랑스 국내에 있는 모든 고용자에게 의무화하고, 그 운영은 사회보장 전국금고의 독립화 계획에 따라 국가의 직접관할을 피하여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의 상호부조제도의 전통에 바탕을 둔 자주적 성격을 존중하도록 하였다. 일반보험의 재원은 고용자와 피고용자로부터, 노동자재해보상보험과 가족수당은 고용자에게서 징수된 보험료만으로 충당한다. 역사도 길고 독창적인 프랑스의 사회보장 취급금액은 국가예산의 절반이나 되며 조직이 복잡하지만, 주요 수당의 지급비율이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제조합에 의한 질병수당의 보완, 퇴직연금 보완제도에 의한 노령연금의 보조 등도 사회보장제도와 공존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의 모든 국민은 가족수당, 퇴직연금,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는다. 가족수당은 1세기에 걸친 인구 정체의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고려된 만큼 종류도 많으며, 지출금액도 전체 금액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산전·출산·산후수당 등은 부수 의료비와 관계없이 지급되고, 또 수입과 자녀수에 대응하는 주거수당이 있다. 그리고 특징적인 수당으로 가족수당 이외에 단일급여수당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하자면 주부수당으로, 자녀의 양육을 위해 주부가 근무를 단념해야 할 경우 그 가계를 보조하는 취지에서 자녀수에 따라 부수입의 상한을 넘지 않는 가정을 대상으로 지급한다.

그밖에 철도·버스 운임의 할인도 프랑스 가족수당제도의 목표를 명료하게 반영하고 있다. 2018년 기준 프랑스의 사회보장 지출 비중은 33.4%이며 이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사회보장제도는 매우 광범위 하며 출생부터 사망까지 프랑스인의 삶을 책임진다. 제도 또한 매우 수평적이며 국가가 지원하고 고용주와 근로자가 일부를 부담하는 형식을 가진다. 전 국민의 최저생활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빈곤층에 매달 300~500유로를 지급한다.

4) 교육

센강변의 헌책방
센강변의 헌책방

프랑스는 중세를 통해 오랫동안 성직자에게 한정되었던 교육을 15세기 말에 이르러 파리대학교를 창설함으로써 일반에게 개방하려 했다. 르네상스에 의해 이와 같은 경향은 보다 더 강해졌으나 17세기에는 예수회가 상아탑을 고수하였다. 한편 그동안 라블레·몽테뉴·데카르트·파스칼에 이어 볼테르 및 백과전서파(Encyclopédiste) 등이 해석과 이론면에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여 다음 세대 교육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백과전서파는 18세기 프랑스의 지식인 그룹으로서, 영어로 작성된 기술, 과학, 예술분야의 백과사전을 번역하고 개정하는 작업을 하였다.

18세기에는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과 과학·기술의 경험주의라는, 언뜻 모순되는 2개의 경향이 교육의 사상과 방법에도 나타났다. 교육이 진실로 대중에까지 보급된 것은 대혁명 때부터이며, 그때까지 남성의 반, 여성의 3/4이 문맹이었던 프랑스에서 1791년 전체 국민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선언되고 탈레랑·콩도르세·라카나르 등에 의해 새로운 일반교육방침이 작성, 실시되었으며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808년에는 나폴레옹이 ‘제국대학’을 창설, 여기에서 국가교육제가 확립되었으며, 1850년에 이르러 사립교육을 허가하였다.

현재의 교육제도는 제3공화국의 교육제도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1880년에는 여성에 대한 중등교육의 기회가 열렸고 다음해에는 초등교육의 무상이, 1882년에는 그 의무조항 및 교내에서 종교교육의 금지조항이 제정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교육의 원칙은, 교육의 자유, 즉 공·사립 교육의 공존, 무상 공교육의 원칙, 공교육과 종교의 무관성, 모든 공적 자격은 공개시험을 통해서 국가로부터 발급된다는 4가지이다. 영재교육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교육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랑즈뱅의 개혁, 제5공화국이 수립된 뒤 1959년의 개혁을 거쳐 1968년 봄 소르본 학생들을 중심으로 야기된 ‘5월 사태’를 계기로 큰 변화를 겪었다.

또한 1969년 6월에는 인구 증가에 따른 학교의 증설, 기술·직업교육, 사립학교 및 외국과의 협력사업 등의 책임을 맡는 각외장관이 따로 임명되었다. 한편 교육부가 관할하는 교육 이외에 농림·노동자 양성 및 청소년·스포츠 담당 국무장관 등이 담당하는 각 분야의 교육부문, 그리고 국방·문화·사법·공업발전·과학연구 등을 담당하는 부처에도 각각 교육 부문이 있다. 의무교육은 10년(6∼14세)이고 유치원에서 중등교육·직능교육까지 무료이다.

대학교육은 약간의 등록금을 받는 이외는 무료이며, 사립학교도 있으나 소수이다. 초등교육은 6∼10세, 중등교육은 콜레주(Collège)(11∼14세)와 리세(Lycèe)(15∼18세)로 이루어진다. 콜레주에서는 프랑스어, 수학, 고대 언어문화, 물리화학, 예술사 등 인문학과 과학 등을 중점적으로 학습하며 컴퓨터 활용 능력도 함양할 수 있도록 한다. 콜레주 과정을 마치고 국가고사인 브레베(Brevet)를 통과하면 과정을 수료할 수 있다. 리세에서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거나, 기술 자격증 취득과 같은 취직 준비교육을 실시한다. 리세를 마치고 선택한 계열의 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èat)에 합격하면 통학 구역 내의 희망하는 대학으로 진학한다.

프랑스의 대학교는 일반 공립대학교(Université)와 그랑제꼴(Grandes Ecole)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공립대학교는 대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이름 붙인다. 수도 파리에는 파리 1대학부터 13대학까지 13개의 대학교가 있다. 그랑제꼴은 엔지니어링, 경영 등 하나의 과목에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는 곳이며, 매년 졸업생의 수가 100명에서 300명 정도로 규모가 작은 학교이다. 선발시험을 거쳐 입학할 수 있는 명문 대학을 통칭하는 비공식적 개념이다. 그랑제꼴 준비반인 프레파(Prèparatoire)에 입학하여 2년의 공부를 마친 학생들이 그랑제꼴 선발시험을 치르게 된다. 그랑제꼴에 해당하는 학교는 파리정치대학(Science Politique),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 국립행정학교(ENA) 등의 전문학교가 있다. 국립행정학교에 진학하면 고급관료가 되는데, 그들은 정·재계에 있으면서 지도층을 구성한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볼테르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대표적 계몽사상가.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고, 오늘날 《자디그》,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역사 작품이 높이 평가된다.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였다.
장자크 루소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작품은《신 엘로이즈》,《에밀》,《고백록》등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탈레랑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외교관. 성직자가 되어 오툉의 주교 등을 지냈으나 삼부회 위원이 되어 교회재산의 국유화를 제안하자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나폴레옹을 정계에 등장시키고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영국 주재 대사가 되어 벨기에의 독립을 도왔다.
콩도르세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정치가. 16세 때부터 적분·해석 등의 수학적 업적을 쌓았으며, 26세에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789년 철학부장이 되어 18세기 사상가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입법의회·국민공회의 의원으로도 선출되어 문교 조직계획과 헌법안 등을 제출하였다.
파리대학교 1215년 파리에 설립되어 1968년에 해체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 된 대학.
블레즈 파스칼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종교사상가. '파스칼의 정리'가 포함된 《원뿔곡선 시론》, ‘파스칼의 원리’가 들어있는 《유체의 평형》 등 많은 수학·물리학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고 연구하였다. 또한 활발한 철학적·종교적 활동을 하였으며, 유고집 《팡세》가 있다.
고등사범학교 프랑스나 일본의 중등교원을 양성하는 교육기관.

7 . 문화

노트르담대성당
노트르담대성당

자연·인문 어느 면에서도 다양성이 풍부한 프랑스가 정치·행정면에서 재빨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것은 언뜻 보면 역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주변 국가들과의 접촉이 쉬워 다른 문명·제도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은 데다(예컨대 일부에서 게르만의 관습법을 채용한 사실 등), 지역적 차이가 컸기 때문에, 이를 통일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프랑스인의 본질적인 기질로 알려진 주지주의()와 법률주의()의 2대 흐름이 이와 같은 체제 확립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주지주의야말로 프랑스 문화의 근본 모습이다. 프랑스어()는 라틴어가 점차 골(Gaul)화하여 형성된 것인데 이미 스트라스부르의 선서(842)에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다.

12,13세기에는 프랑스어에 의한 최초의 중요 문학작품 《롤랑의 노래》로 대표되는 서사시가 나타났으며 이에 뒤이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른바 ‘로망 쿠르투아’의 시대를 맞이하는 등 당시의 중세 봉건사회에서 기사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사고()·이론을 제일로 하고 표현의 이론 정연함을 추구하는 주지주의가 중세 봉건제의 확립·발전과 더불어 점차 프랑스인의 기질에 침투하여 16세기의 프랑스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명료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경향은 프랑스 문화의 명석한 논리와 비판을 즐기는 지성, 구체적인 것을 존중하는 실증적 정신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이와 동시에 한편에서는 행동으로 옮기기 전 사고의 과정에서 ‘참된 인생’을 터득하려는 경향 때문에 눈앞의 사실을 분석하는 측면에서 후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가 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오히려 ‘원형(:prototype)의 나라’이고 ‘양산()의 나라가 될 수 없는’ 일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지주의의 보편성과 추상성 때문에 프랑스 문화의 이념은 세계적으로 넓게 받아들여져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가 계승한 로마 문명의 보편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풍부하고 다양한 국토와 천혜의 기후 아래, 프랑스인들은 조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북돋워지는 한편, 중앙권력이 점차 확립됨에 따라 권력을 두뇌로 하는 유기체로서 국가를 이해하는 추상적인 국가관이 생겼다. 또 나아가서는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창조력을 소생시켜 이것을 헤쳐나가야 할 ‘우리 프랑스’라는 관념이 프랑스인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심어졌다. 이것이 ‘교회의 장녀()’라는 종교적인 의식과 결부되어 쇼비니즘(배타적 애국심)의 전통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적지 않다. 또한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추상적 관념이 법률주의로 정착되었다.

교회의 신성()을 배경으로 한 국왕 아래에서도, 또 이것을 공화제의 이념으로 바꾸어 놓은 뒤에도 이 독자적 국가관은 존속되었으며, 프랑스인 스스로도 너무나 현실을 무시하고 추상화해버린 이 사실을 반성하는 반면, 그것을 소중히 아끼는 모순을 되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파리에 강력한 뷰로크라시(관료정치)가 확립되는 정신적 밑바탕이 완성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하는 한편 명료한 카테고리의 설정을 즐기는 정신은 동질의 것을 통한 조직에 대하여는 편향성이 있다. 예컨대 종적() 방향의 전국조직, 즉 중앙집중의 경향은 행정뿐이 아닌 직업 등에서도 아직까지 명확하며, 현재의 프랑스가 국토의 재편성이라는 큰 문제를 앞에 두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평() 방향의 조직, 즉 이질()의 것을 포함한 ‘지역’이라는 견해는 프랑스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범위의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국왕 사이의 역사적 관계, 또 교회의 이념으로부터 평등을 출발점으로 하는 프랑스 사회에 개인주의의 정신이 생긴 뒤 근세에는 자유와 법률주의의 사상에 뒷받침되어 강력하게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혁명을 완수하고 정치적 ‘자유’의 대원칙을 수립한 프랑스인이 근대 산업혁명에는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인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에 시작된 인구 정체로 말미암아 산업 근대화의 필요성이 적었다는 사실과 병행하여 기업에서 개인의 주도권, 나아가서는 ‘인간성’의 상실은 프랑스의 개인주의에 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강대해진 프랑스에서는 드 말레르브 궁전을 중심으로 한 활동의 영향 아래 국민문화로서의 고전주의가 개화되었지만, 여기에서도 보편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으며 당시 프랑스의 군사적·정치적 우세와 더불어 유럽의 문화중심지가 되었다. 종교개혁르네상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칼뱅의 엄격한 종교생활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휴머니즘(인문주의)이 나타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12세기에 파리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양식이 각지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포함하는 추상의 산물이었던 점도, 이 시대에 체계화되고 파리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철학 역시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서 고전주의의 조락 이후 18세기에 시작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출발점으로 디드로의 《백과전서()》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움직임은 과학적 탐구심과 동시에 자유검토의 정신을 진작시켜 사회적으로는 대혁명의 1단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독재시대를 거쳐 19세기에는 왕정()이 복고되기도 하였으나 서민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루이 필리프가 즉위함으로써 프랑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때는 어떤 의미에서 확실히 대립적인 낭만주의가 활발해졌지만, 이것을 가리켜 반드시 반동적() 또는 히스테리컬한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프랑스 사회 자체가 18세기 말의 소란스러운 동란()의 생활로부터 탈피를 바라고 있었고 루소나 샤토브리앙 등에 의하여 이미 탄탄대로가 닦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문학과 정부 및 사회적 현실의 연관성을 강조한 운동이었고, 진보적 운동인 동시에 조국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애국주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 감상적 측면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다. 1848년의 혁명에 의해 제2공화국이 성립되고, 그 뒤를 이어 제2제정()이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패전하여 제3공화국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과학·기술의 분야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는 동시에 문예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도 마치 12세기의 프랑스에서 본 바와 같이 또다시 세계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세계의 문학·예술·음악·연극 등의 모든 예술활동은 파리에 집중되고, 각각 반발과 공명()을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틀 속에서 다시 창조되었다. 다다이즘·미래파()·추상주의에서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표현을 통하여 잇달아 저마다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프랑스 문화에 존재하는, 많은 요소의 복합성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실존주의 등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는 가톨릭국가인 동시에 칼뱅의 나라이고 디드로의 나라이며, 한편에서는 지드와 사르트르가 있다. 또 한편에서는 페기·베르나노스도 태어난 나라이다. 이것은 추상과 보편성을 기본으로 각 시대를 뛰어넘어 온 프랑스 문화의 두께를 짐작하게 하는 특성인것이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롤랑의 노래 프랑스의 무훈시 중 최고 ·최대의 걸작.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세 유럽의 최대 연애담(戀愛譚).
샤를 몽테스키외 프랑스의 사상가로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評定官)과 원장을 지냈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0여 년이 걸린 대저(大著) 《법의 정신》을 저술하였으며 사법 ·입법 ·행정의 3권분립 이론으로 왕정복고(王政復古)와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다.
드니 디드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자.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주의 사상가이다. 《맹인서간》에는 무신론의 경향을 나타내었다. 《백과전서》의 편찬에 평생을 바쳤다. 대표작은 《달랑베르의 꿈》, 《수도녀》 등이다.
장자크 루소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작품은《신 엘로이즈》,《에밀》,《고백록》등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앙드레 지드 문학의 여러 가능성을 실험한 프랑스 소설가. 《신프랑스 평론》지(誌) 주간의 한 사람으로서 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 20세기 문학의 진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사전꾼들》을 발표를 통해 현대소설에 자극을 줬다. 주요 저서에는 《좁은 문》등이 있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샤를 페기 프랑스의 시인 겸 사상가. 희곡《잔 다르크》에서는 잔 다르크를 민중과 사회주의의 영웅으로 묘사하였다. 또 《샤르트르 성모에게 보스 지방을 바치는 시》는 그리스도교 시의 걸작이다. 실증주의를 비판하였으며, 휴머니즘의 전통을 옹호하였다.
조르주 베르나노스 20세기 전반 프랑스의 소설가.《악마의 태양 아래서》는 이른바 ‘성성(聖性)’의 드라마로, 살아 있는 실재인 악마와 성성과의 싸움을 그린 작품이다. 그 외《환희》, 걸작《시골 사제의 일기》(1937) 등이 있다.
프랑스어 라틴어에서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등과 함께 분화되어 국민어(國民語)로 성장한 로망스제어의 한 갈래.
장 칼뱅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하고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저서에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 《로마서 주해》 등이 있다.
프랑수아 샤토브리앙 19세기 프랑스 낭만파 문학의 선구자.《그리스도교의 정수》(1802)는 그리스도교를 고양하는 범신론적 경향이 강했다. 대혁명 후 황폐한 민심에 큰 영향을 끼쳤고, 낭만주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게 하였다.
장 폴 사르트르 프랑스의 작가·사상가. 철학논문 《존재와 무》(1943)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전개한 존재론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시대 사조를 대표한다.

1) 문학

프랑스 문학은 프랑스 국민들이 갖는 국가적 자부심이자 유럽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요소이다. 프랑스 문학이라 함은 프랑스와 아프리카, 벨기에, 캐나다, 모로코 등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프랑스어로 작성된 문학작품을 말한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인 프랑스어는 프랑스 정신을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11세기부터 중세 프랑스어로 쓰여진 프랑스 문학은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토착어 문학 중 하나였다. 15세기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등으로 인해 명성이 가려졌지만, 16세기부터의 프랑스 문학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체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 이 시기에는 휴머니즘과 종교개혁 운동으로 프랑스 또한 신구교의 분란에 놓였고, 당시 프랑스 문학은 사회제도와 구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다. 18세기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은 유럽 전역과 미국 문학 전통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 프랑스 문학이 퍼지며 유럽대륙 밖에 프랑스어가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대중교육 지침에 따라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문학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의 교육기관에서는 프랑스의 고대 소설, 시, 연극 등을 교육하며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문화 예술 기구는프랑스 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와 프랑스 연구소(Institut de France)이며 문학 작가와 시민들을 대상으로 대중적인 행사와 교육을 제공한다.

프랑스는 노벨 문학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국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01년 시인 르네 쉴리프뤼돔은 프랑스에서 첫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1904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1915년 로맹 롤랑, 1985년 클로드 시몽, 2014년 파트릭 모디아노 등의 문학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2) 식문화

프랑스 요리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중세 초기 조리법을 따른다. 프랑스 요리는 일반적으로 16세기에 프랑스에 유입된 설탕으로 인해 짠 음식과 단 음식 사이에 분명한 구별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부터 프랑스의 식문화에서는 설탕을 이용한 달콤한 디저트가 식사 마지막에 제공되는 것으로 굳어졌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로 손가락을 사용하며 식사를 하던 프랑스인들도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포크는 흔한 식사용 도구였으나,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음식은 삶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취식을 위한 것이 아닌 예술의 형태로 묘사되고 영혼이 담긴 것으로 여겨졌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사회적, 정치적 기반을 뒤엎었고 왕과 혁명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요리는 더욱 더 번창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레스토랑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프랑스 요리의 발전에 중요한 시점으로 여겨진다. 당시 프랑스의 레스토랑 주방장들은 고객에게 새로운 요리를 접하게 하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애썼으며, 이로 인해 전세계의 다양한 요리들이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또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는 전문 요리서적이 다수 출판되었는데, 레스토랑에서 접했던 음식을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요리서적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또 궁정과 귀족들만 맛볼수 있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던 버터를 사용한 고기 요리들이 대중화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는 프랑스 사회에서 전문 요리사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수석 셰프는 요리를 하지 않고 특정 요리를 만드는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19세기 프랑스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가 설립돼 요리에 대한 규칙을 확립하고 미래의 요리사에 대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 학교는 현재까지도 프랑스 요리 분야에서 최고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세계적 명성의 교육기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더 짧은 조리시간과 더 많은 영양을 담은 가볍고 현대적인 음식을 창조하는 데 힘썼다. 이 시기 분자 요리가 개발되며 프랑스 요리사들이 화학적 기법을 가미하여 새로운 맛을 창조하고 요리의 세계를 급진적으로 확장 할 수 있었다.

프랑스인에게 식사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아침식사는 크로아상과 바게트류에 커피나 차를 겻들인다. 점심에는 포도주를 곁들여 다양한 요리를 즐기는데 현대에 들어서는 줄어든 식사시간으로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음식을 선호하는 프랑스인들도 늘어났다. 저녁은 보통 6시 즈음 아페라티보(Aperitivo)로 시작된다. 아페라티보는 라틴어로 “연다”라는 뜻이다. 햄, 소시지, 치즈와 같은 간단한 핑거푸드와 함께 저녁식사를 여는 의식이며 와인 한잔, 맥주 한잔을 먹는 가벼운 식사이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저녁식사는 8시부터 시작된다. 저녁으로 레스토랑을 찾거나 브라세리에서 지인,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프랑스는 훌륭한 요리와 더불어 수준 높은 와인의 본고장이다. 최고의 와인너리 지역은 알자스, 보르도, 부르고뉴, 루아르, 론 밸리, 프로방스랑그도크루시용이다. 현재 프랑스 지역에 있는 와이너리는 고대 로마 통치 하에 있을 때 포도나무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때부터 와인은 프랑스의 무역상품이자 프랑스인 생활의 일부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교의 부상과 함께 예수의 피로 여겨지는 와인의 중요성이 더욱 더 커졌다. 

3) 스포츠

프랑스인들의 국민 스포츠는 단연 축구이며, 축구를 프랑스의 국가 경기로 간주한다. 축구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04년에 프랑스 축구 국가 대표팀이 창설되었고 그해 말 벨기에와의 첫 경기는 3-3 무승부를 기록했다.

사이클링 또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매년 7월에 3주 동안 열리는 자전거 경주인 투르드 프랑스(Tour de France)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이클링 경기이다. 1903년부터 시작된 이 경기는 전 세계에서 개최되는 프로 스포츠 경기 중 가장 많은 관객수를 동원한다. 이 경기를 직접 관람하기 위해 1,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프랑스에 오며 전 세계 35억 명의 시청자들이 TV를 통해 경기를 관람한다.

4) 축제 및 기념일

프랑스는 축제의 나라라고 불릴만큼 1년에 걸쳐 수 많은 축제와 기념일들이 있다. 프랑스의 기념일들은 대부분 가톨릭에서 유래되었기에 가톨릭 축일과 함께 기념된다. 5월 8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 7월 14일 혁명 기념일,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휴전 기념일 등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으며, 부활절 다음날인 예수승천일, 8월 15일 성모승천일, 11월 1일 만성절, 12월 25일 성탄절 등 로마가톨릭교의 종교 기념일을 공휴일로 지킨다. 1월 1일과 5월 1일 노동절도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공휴일에는 대부분의 행정기관들과 은행,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1월 6일은 주현절로 아몬드가 들어간 파이 종류인 갈레트 데 후아(gallettes des rois)를 먹는 날이다. 파이 안에 장난감을 넣고 구워 파이를 먹는 중 작은 장난감을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그 해에 행운이 따른다고 믿는다. 12월 말부터 1월 초까지 상점과 빵집에서 다양한 종류의 갈레트 데 후아를 구입할 수 있다.

2월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니스 카니발이 개최된다. 매년 2월 중 2주간 열리는 이 행사에는 전 세계에서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참여한다. 니스 중심부에서 이어지는 거리를 중심으로 각종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부활절 47일 전을 기념하는 마르디 그라(mardi gras)는 매년 부활절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3월 중순이 된다. 이 날은 가톨릭과 관련한 축일로 색색의 다양한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날에는 프랑스식 크레페나 도넛을 먹는다.

5월에는 칸 영화제가 열린다.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와 더불어 세계 3대 국제 영화제로 1946년 처음 개최되었다. 프랑스의 남쪽에 위치한 칸에서 매해 5월, 12일간 진행된다. 전 세계의 영화인과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모여든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며 낮이 가장 긴날인 6월 21일에 음악축제(fete de la musique)가 열린다. 파리에 있는 20개의 구 특성에 맞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울려퍼진다. 1982년에 시작된 이 축제는 현재 프랑스 외에도 세계 100여 개국이 참가하며 국제적 축제로 발돋움하였다.

매년 11월 셋째주에는 보졸레 누보 축제(fete du beaujolais nouveau)가 열린다. 1951년 시작된 이 축제는 프랑스 부르고뉴 보졸레 지방에서 재배된 와인을 기념한다.

12월에는 리옹 빛 축제(fete des lumieres)가 가장 성대하게 개최된다. 리옹지역에서 1852년 12월 8일에 처음으로 개최된 이 축제는 전국적인 축제가 되었다. 중세시대에 리옹을 지켜주는 성모마리아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아름다운 불빛을 피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간 개최된다.

8 . 대한관계

한국공원 입구
한국공원 입구

프랑스는 서유럽 국가 중 한국과 가장 먼저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나라이다. 1835년(헌종 1) 한국명 ‘나백다록’이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 모방(Maubant)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 땅을 밟은 이래 1836년에는 조선 주교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한국명 범세형()]와 신부 샤스탱(Chastain)이 잠입,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탄생시키는 등 포교활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1839년 주교 앵베르, 신부 샤스탱, 모방 등이 사학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참수된 데 이어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 때는 주교 베르뇌(Berneux)를 비롯한 7명의 신부가 참형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독 로즈(Roze)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한강 하구까지 침입, 이른바 병인양요가 일어났으며 흥선대원군통상수교거부정책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흥선대원군이 몰락한 뒤 서유럽 제국에 문호를 개방한 것을 계기로 1886년에는 프랑스의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와 한성판윤() 김만식(金) 사이에 한불수호조약() 및 통상장정()·선후속약() 등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국운 쇠퇴와 일제의 강점으로 공식관계는 끊어진 채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 채널로서 이용되는 데 그쳤다.

한국과 프랑스의 본격적인 우호관계는 8·15광복 이후 1949년 2월 정식국교가 수립되고 양국의 상주공관이 설치되고 난 뒤부터 시작된다. 6·25전쟁 때에는 UN군의 일원으로서 전투 병력을 파견한 혈맹이었으며, 외교적으로는 우방국으로서 경제·과학기술·문화협력 등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교 이후 관세협정(1963)·민간항공협정(1974.6) 등이 체결되었다. 

한편, 1985년 4월 파비위스(Fabius) 총리가 프랑스 총리로는 처음으로 내한하였다. 1989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하여 미테랑 대통령과 정상회담(첨단기술 이전 등 합의)을 가졌으며, 1995년 3월 김영삼 대통령도 정상회담을 가졌다. 1999년 6월 선준영 외교통상부 차관이 제 8차 한·불 정책협의회 참석차 파리를 방문하였다. 1998년과 1999년에는 김종필 국무총리, 2000년과 2002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991년 총리 로카르, 1993년 대통령 미테랑, 2000년에는 대통령 시라크가 방한하였다. 2011년 5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2013년 11월과 2016년 6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였다. 2015년 11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한하고, 2018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는 등 양국 정상 간의 교류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1979년 투자보장협정 1981년 이중과세방지조약을 체결하였다. 1981년 과학기술협력협정, 2007년 사회보장협정, 2009년 워킹홀리데이 비자 협정을 체결하였다. 1989년 10월부터는 한국인들의 프랑스 입국 비자발급제도가 폐지되었다.

2019년 프랑스의 대한국 수출액은 전년 대비 43.2% 감소하여 약 58억 3,2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최근 2년간 프랑스의 대한국 주요 수출 품목은 화장품, 가방, 의약품, 집적회로 반도체, 항공기, 항공기 부품, 보석, 승용차, 펌프, 자동차 부품 등이었다. 2019년 프랑스의 대한국 수입액은 약 37억 2,4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전년 대비 50.2% 감소한 수치였으며 프랑스는 한국과의 무역에서 21억 8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최근 2년간 프랑스의 대한국 주요 수입 품목은 승용차, 축전지, 전기자동차, 집적회로 반도체, 자동차 부품, 합성수지, 제어용 케이블, 항공기 부품, 원동기, 타이어 등이 있었다.

2017년 기준 프랑스의 대한국 투자 누적 금액은 77억 4,000만 달러이며, 한국의 대프랑스 투자 누적 금액은 25억 3,000만 달러에 달한다. 2019년 프랑스에 거주 중인 재외동포의 수는 약 29,000명으로 집계되었다.

프랑스와 북한은 수교를 맺지 않았다. 1968년 9월 프랑스에 북한 민간무역대표부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1976년 6월 통상대표부로 격상되었다. 1984년 12월 1일 자로 파리 주재 북한 통상대표부를 일반대표부로 승격시켜, 북한은 외교적 지위만 갖지 않을 뿐 기능 면에서는 실질적으로 일반 대사관에 준하는 대표부를 두게 되었다. 1991년 2월에는 1976년 11월에 설치된 주 프랑스 유네스코(UNESCO) 대표부와 일반대표부를 통합하였으며, 2011년 10월에는 북한에 프랑스 협력사무소가 개설되었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병인양요 1866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가 처형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가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
- ⓒ doopedia & doopedia.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트위터 URL 복사

포토커뮤니티

사진 목록
분류 사진 제목 올린이
(사진수)
등록일

여행기

사진 목록
분류 사진 제목 올린이 등록일

지식나누기

두피디아는 수록된 정보가 상업적 목적 등 이용자가 의도한 특정 목적에 적합하다는 점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수록 정보에 포함된 의학, 법률, 세무, 금융 등 전문분야의 정보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두피디아는 정보의 이용과 관련하여 이용자에게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